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9
38화. 혹한기 생존 (4)
통로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유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지난 열흘간 유리는 단순히 식량을 모으는 것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식량을 모으는 것만큼 그가 치중한 작업이 바로 은신처에 함정을 설치해 두는 일이었다.
은신처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한 발짝이라도 동굴로 들어온다면 발동하게 설치해 둔 함정.
비록 마체술을 익힌 이들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나 귀찮게 할 정도는 되는 위력이었다.
그리고 이는 유리에게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일종의 경종 역할을 할 터였다.
한데 침입자가 발생했음에도 함정이 발동한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경우를 뜻했다.
첫째, 침입자가 함정의 존재를 전부 알아차리고 건드리지 않았다거나.
‘혹은, 내가 설치한 함정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정도의 강자이거나.’
서서히 가까워지는 강렬한 기파로 보아 아무래도 두 번째 경우일 듯싶었다.
‘살 떨리게 강한 놈이네. 예비 기수 중에 이런 실력자가 있었나?’
다가오는 침입자는 숨길 생각이 없는지 기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실로 압도적인 기운에 유리는 확신했다.
저 침입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자신의 실력을 까마득하게 초월한 인물이란 걸 말이다.
‘어쩔까? 상대가 누군지 확인을 해?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도망쳐?’
유리가 생각하는 은신처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
그건 바로 탈출구였다.
지금이라도 미리 준비해 둔 비상 탈출구로 달려간다면 도망을 칠 수 있으리라.
다만 이 정도의 기운을 뿜어내는 예비 기수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강한 적의 존재만큼 향후 가치 있는 정보도 없을 테니까.
‘침입자한테 살기는 없다. 그렇다면…….’
약간의 고민과 빠른 결단.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더욱 빨랐다.
유리는 모닥불에서 불이 붙은 장작 두어 개를 집어 동굴 통로 쪽으로 던졌다.
동시에 나머지 모닥불을 끄고 동굴 한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해 숨을 죽였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5초 남짓.
유리는 어둠에 숨어 매서운 눈으로 입구 쪽을 응시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유리.
꾸욱-.
검 자루를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갈 때쯤.
저벅-.
통로의 끝자락, 장작불이 내는 옅은 빛으로 검은 부츠가 먼저 들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침입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유리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 사람이 왜?’
침입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애꾸눈의 흑검병 대장이었다.
유리는 고요한 눈으로 상대를 관찰했다.
동시에 조용히 무게중심을 뒤로 이동했다.
만약 애꾸눈의 사내가 무슨 반응을 보인다면 언제라도 등을 돌려 달아날 수 있게끔.
슥-.
애꾸눈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동굴을 전체적으로 훑은 그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 놓인 유리가 얼굴을 굳혔다.
‘여길 보고 있다!’
애꾸눈 사내는 어둠을 꿰뚫고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거다.
이에 유리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멈춰라, 유리 홀랜드.”
유리의 걸음을 멈춰 세운 목소리.
동시에 동굴 입구에서부터 전해지던 묵직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나는 널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피력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세 전환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애꾸눈 사내는 피식 미소 지었다.
“받아라.”
그는 그리 말하고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끌러 유리에게 집어 던졌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유리는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철그렁-.
그건 무언가가 담긴 작은 천 주머니였다.
‘이게 뭐지?’
유리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애꾸눈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한 유리의 눈빛에 애꾸는 사내는…….
저벅-.
아무런 말 없이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하는 인간이냐, 저건?”
* * *
여기저기 널브러진 함정의 잔해가 되돌아가는 애꾸눈 사내의 발에 차여 굴러갔다.
애꾸눈 사내는 통로에 널브러진 함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작 며칠 사이에 많이도 설치했군.’
비록 살상력이 뛰어난 함정은 아니나, 침입자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여 설치된 연계성은 매우 훌륭했다.
다른 예비 기수… 아니, 진짜 요람의 기수들이라 해도 충분히 먹힐 만한 위력이리라.
애꾸눈의 사내는 이 함정을 설치한 이를 떠올렸다.
‘유리 홀랜드…….’
오늘 애꾸눈 사내가 시작의 숲에 들어선 것은 예비 기수에게 어떤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원래라면 이런 일에 애꾸눈 사내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에 총괄 책임자인 그가 움직이는 것은 비효율적인 짓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움직인 것은 유리 홀랜드란 예비 기수 때문이었다.
열 번째 흑룡패주.
그리고…….
‘요한 레드너의 제자.’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력의 예비 기수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였기에 흑검병단의 부단장인 그가 직접 움직였다.
그리고 직접 본 유리 홀랜드에 대해 애꾸눈 사내는 간단히 평했다.
“재밌는 놈이군.”
완벽하게 은폐된 은신처.
혹한의 겨울을 버티는 생존 기술.
침입자를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함정의 수준.
그 세 가지만 보더라도 지금 숲속을 헤매고 있을 수많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놈이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사내가 높게 평가하는 요소는 조금 전 유리가 보인 판단력이었다.
모닥불을 끄고, 통로 쪽으로 장작불을 던져 침입자의 정보를 파악하려는 순발력.
동시에 자신은 어둠 속으로 은신하여 적과의 거리를 벌리는 치밀함.
거기에…….
‘그 녀석이 등지고 있던 건 분명 비상 통로였다. 만약 내가 약간이라도 공격할 낌새를 보였다면 바로 도망쳤을 터.’
유리 홀랜드는 분명 침입자의 실력이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적당히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만 하고 도망치려는 계획이었겠지.’
힘들게 마련한 생존 물자와 은신처도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과감한 판단력.
비록 자신이 기운을 흘려 알려 줬다고는 하나 침입자를 대비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고 그 모든 게 몇 초 안에 일어났다.
어지간히 빠른 판단력이 아니고서야 그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으리라.
‘적어도 요한 레드너의 위명을 등에 업은 쭉정이는 아니라는 거군.’
그 점이 애꾸눈 사내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녀석이 욕심도 많아 보인다는 거였다.
유리 홀랜드의 은신처, 그곳에 수북이 쌓여 있던, 과하게 많은 물자를 떠올린 애꾸눈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요람에서 재능만큼 중요한 건 욕망이지.”
* * *
침입자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끼고서야 유리는 경계심을 거뒀다.
그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흑검병이 건네주고 간 물건.
슥-.
천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어내니 쉽게 그 안에 든 물건이 드러났다.
‘이건……?’
철그렁-.
처음 주머니를 받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느낌이 오기는 했었다.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이 금속 재질이란 것을.
그리고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한 물건은 은빛의 작은 동전이었다.
“은화?”
대륙 공용 화폐는 골드라 불리는 금화와 실버라는 은화였다.
하지만 이 은화는 대륙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화폐가 아니었다.
유리가 철그럭거리는 은화 중 하나를 꺼내 살펴보았다.
크기와 모양은 지름이 대략 5㎝ 정도인 원형.
그리고 정중앙에 자리한 1㎝의 정사각형 구멍.
‘구멍 뚫린 은화라니…….’
독특한 특징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유리는 은화를 번갈아 뒤집어 보았다.
“흐음…….”
한쪽 면은 검(劍) 두 자루가 X자 형태로 교차하는 그림이, 반대쪽 면에는 10,000이란 숫자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은화는 쓰이지 않았다.
그런 은화가 총 10개.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은 아닌 거 같은데?’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세공 수준이 상당했다.
거기다 이런 걸 일부로 가져다줬다는 건 필시 쓰임새가 있다는 뜻.
‘이게 무슨 의미지?’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주어진 물건.
아마 그 쓰임새를 찾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팅-.
유리는 은화를 엄지로 튕겼다.
허공을 핑그르르 돌며 떨어진 은화.
이를 잡아 다시 엄지로 튕겨 올리기를 반복하며 유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걸 나만 받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였다.
‘분명 정확히 내 이름을 불렀어. 그건 여기가 내 은신처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말이겠지.’
다시 말해 이는 흑검병이 예비 기수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런 일을 목적도 없이 공연히 하고 있지는 않을 터.
‘몇몇 주요 인물의 동향… 어쩌면 모든 예비 기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파악된 이들에게 나와 같은 물건이 전해졌다고 가정한다면…….’
그럼 대체 왜 이 물건을 주었을까?
이걸로 뭘 하라고?
팅-.
한 번 더 퉁겨진 은화를 받은 유리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가 은화를 향해 코를 가져다 댔다.
킁킁-.
‘난다, 냄새가 나.’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유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져갔다.
물론 진짜 후각으로 느껴지는 건 짙은 금속의 냄새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본능적 후각은 다른 냄새를 맡았다.
‘확실해. 이건… 돈 냄새다!’
유리의 예민한 촉이 말하고 있었다.
이 독특한 은화.
이건 시작의 숲 혹은 용의 요람 내에서 ‘돈’이 되는 물건이라고.
‘돈이 되는 물건… 그게 다수의 예비 기수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뿌려졌다?’
유리의 머릿속에 파바밧- 불똥이 튀었다.
동시에 그는 지난 며칠간 답답하게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려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던 찝찝함의 정체.
그간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게 무엇인지 말이다.
더불어 유리는 어째서 흑검병들이 이 물건을 뿌렸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경쟁… 경쟁이었어!’
시작의 숲에 들어섬과 동시에 시작된 생존 시험.
그 방식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시험을 낸 주체가 바로 요람이라는 점을 더 깊게 파고들었어야 했다.
용의 요람이란 끊임없이 경쟁하며 성장하는 각축의 장.
그런 요람이 낸 생존 시험에서 경쟁이란 요소가 빠져 있었다.
물론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선점하는 것도 경쟁이라 부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용의 요람에서 고작 그 정도를 ‘경쟁’으로 취급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흑검병들이 ‘돈이 되는 물건’을 뿌렸다.
‘이 돈이 되는 물건이 정말 화폐로 쓰이거나 혹은 이 생존 시험에 영향을 미치는 점수 역할을 할지도 모르지.’
바로 이 작은 금속 쪼가리가 지금껏 시험에서 빠져 있던 ‘경쟁’이란 요소를 채워 넣을 물건이리라.
“이건 경쟁, 혹은 쟁탈이라고 불러야겠지?”
애꾸눈이 말했었다.
예비 기수 간에 살인을 제외한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
그건 아마도 지금을 염두에 둔 조건일 터였다.
‘눈치 빠른 녀석들은 아마 곧장 움직일 거다! 다른 놈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그럼 이런 경쟁에서 자신이 뒤처질 수는 없었다.
유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로 뛰쳐나가려던 찰나.
“어라… 가만?”
우뚝 멈춰 선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이 얽혔다.
무언가 거슬리는 듯한 표정.
‘이게 맞나?’
유리는 팔짱을 끼고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흠…….”
눈을 감고 턱을 쓰다듬는 유리.
“흐으으으음…….”
한참 동안 무언가 고민에 잠겨 있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유리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났다.
“그거다!”
오른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내려친 유리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