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96
396화. 베오그라드 전쟁 (11)
유리 일행이 별동대를 정리하는 데 만 하루가 꼬박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 오래 걸린 데에는 아린의 설명처럼 연이어 올라온 신호탄에 적들이 의문을 품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유리의 목적이 별동대의 섬멸이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게 꼼꼼히 적들을 사냥한 유리.
그가 단순히 후방 부대를 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적을 섬멸하는 데 중점을 둔 이유는 간단했다.
‘정보의 격차.’
이곳에서 슈미트 연합의 별동대가 전멸한 것을 자신뿐 아니라 이제 지클리 연합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사실을 정작 슈미트 연합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정보의 격차는 현재 고착된 전선이 꿈틀거리게 만들 터.
‘페트라 아줌마라면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지.’
적의 정예 중 정예라는 벌목꾼 스물이 전멸.
거기에 나름 추리고 추린 병력 삼백도 증발.
이는 적의 전력에 크나큰 공백이 생긴 거였다.
즉, 다시 말해 유리가 별동대를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전면전이란 폭탄의 심지에 불씨를 붙였다는 뜻이었다.
‘과연 언제쯤 터지려나?’
페트라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곧장 병력을 움직이자고 주장할 것이다.
문제는 수뇌부들.
‘그 쫄보들이 과연 전면전을 치르자는 페트라의 말을 순순히 따를지가 관건이네.’
거기까지 생각한 유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페트라가 잘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유리의 입장에선 전면전을 치른다면 지금이 좋았다.
만약 이로써 전면전이 발발하고, 지클리 연합이 승리한다면 그에 따른 유리의 기여도는 상당한 수준이 된다.
후방 보급 부대를 살리고 위험 요소까지 제거.
패할지도 모를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도 모자라 상황을 유리하게 전환시켰다.
유리와 소월 용병단의 기여도에 관해서 무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여 유리는 지금 이대로 전면전이 발발해 지클리 연합이 승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율리아에게 받을 보상도 많아지니까.’
전쟁 기여도에 따른 추가 보상.
이를 떠올린 유리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좋아, 그럼 이제 열심히 늦장을 부려 볼까?’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제 페트라가 윗대가리들을 잘 설득해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굳이 일찍 본진으로 돌아가서 개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느긋하게 가서 싸우는 시늉이나 좀 해야지.’
물론 그것도 전면전에서 지클리 연합이 이긴다는 가정하에였지만…….
“에이,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설마 지겠어?”
자신이 저들의 전력을 얼마나 깎아 줬는데?
사람 새끼들이라면 이기겠지.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베오그라드 행정구에 자리한 크리스털 호수.
용의 요람이 자리한 몽파르체 호수, 니제르 행정구의 아르고 호수와 더불어 세계 3대 대호(大湖)로 분류되는 수원지였다.
그중 크리스털 호수의 맑고 투명한 물이 햇빛을 머금고 수정처럼 반짝이는 광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로 꼽혔다.
베오그라드에서 전쟁이 벌어지든 말든, 크리스털 호수 주변의 휴양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호수 주변을 거니는 한 여인도 그런 휴양객 중 하나로 보였다.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와 샌들.
햇볕을 가리는 챙이 넓은 모자.
손에 쥔 네모난 가방까지.
사뿐사뿐, 호수 주변을 걷고 있는 30대의 여인은 누가 봐도 호수 주변으로 소풍을 나온 이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호수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마침내 도착한 장소.
호수의 외진 곳에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낚싯대를 걸어 놓은 채,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호랑이를 닮은 듯한 형형한 인상의 노인.
그 또한 휴양을 하러 온 모양인지 꽤 화려한 차림새였는데.
여인이 노인의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얌전히 앉으며 물었다.
“온 지 얼마나 됐어요?”
“한 서너 시간쯤 됐다.”
“뭐 좀 잡았어요?”
그녀의 친근한 물음에 노인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이 미물이 어째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다. 영 물지를 않으니, 쯧.”
“물고기도 아는 모양이죠. 산에서 나무나 쪼개던 사람에게 잡히는 게 얼마나 치욕적인 건지.”
“허허.”
노인이 가볍게 너털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어째 너는 볼 때마다 젊어지는 것 같구나. 보자, 올해 네가… 마흔을 넘겼던가?”
“마흔을 넘긴 지가 언제인데요. 쉰을 넘긴 지도 꽤 됐답니다?”
고작 30대로 보이던 여인의 실제 나이가 50을 넘겼다는 걸 들으면 많은 이들이 깜짝 놀라리라.
이에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앙칼진 꼬맹이가 벌써 나이 오십을 넘겼다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너도 어디 가서는 제법 원로 티를 내고 다니겠어.”
“제가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영감님 앞에서는 나이 자랑을 할 수 없죠. 안 그렇습니까…….”
살짝 말끝을 흐린 뒤, 여인의 목소리가 은은히 낮게 깔렸다.
“산군?”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여인의 호칭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거다.
산군(山君).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이자 중앙 산맥의 지배자.
오랜 시간 중앙 산맥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알려진 그가 버젓이 크리스털 호수의 휴양지에 모습을 드러낸 거다.
그리고 그런 산군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는 여인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이 먹은 게 뭔 대수라고. 젊음만큼 좋은 게 또 어딨을까.”
“그리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산군께서도 젊은이 못지않게 기력이 팔팔하시네요. 유감스럽게도.”
“허허,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일찍 뒈져야 네년 가문이 활짝 기를 펼 텐데. 안 그러냐, 메이?”
“그걸 아시는 분이 은퇴 안 하고 뭐 하셨어요? 진작 은퇴하시고 첫째 제자분께 산군 자리를 넘겨주셨으면 베오그라드가 저 난리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쯧, 아론 그 녀석은 그릇이 작아서 안 돼. 심지어 제 분에 넘치는 걸 담으려 하지. 그런 놈이 산군 자리를 꿰차면 그린 후드는 얼마 되지 않아 자멸할 게야.”
“듣던 중 참 아쉬운 소리네요, 그런 분이 후계가 돼야 했는데. 그럼… 이번에 후계자로 낙점한 둘째 제자는 좀 다른가 보네요?”
“아암! 다르고말고!”
첫째 제자 이야기 때와 달리 둘째 제자를 언급한 산군의 표정이 환히 펴졌다.
“그놈은 난놈이야!”
진중한 성품.
굳건한 인내심.
수를 쓰는 머리와 무재(武才)까지.
산군은 자신의 둘째 제자가 천재라 칭해지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다고 확신했다.
“잘 기억해 둬라. 언젠가 우리 그린 후드가 좁은 산을 벗어나 대륙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면, 그 선두엔 그 아이가 있을 테니!”
“…….”
믿음과 애정이 듬뿍 담긴 산군의 목소리에 메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 영감, 어지간히도 그 아이를 아끼는구나.’
그러니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둘째 제자를 자신의 후계로 점찍은 것일 터이지.
‘아론 슈미트가 나이 여든이 넘도록 받지 못한 후계의 위(位)를 그 아이는 벌써 받았다라…….’
이는 다시 말해 그 둘째 제자의 재능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중앙 산맥과 맞닿아 있는 윈체스터 가문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살짝 굳어진 메이의 표정을 보고 산군은 프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살짝 미간을 좁힌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제자 자랑하려고 부르신 거는 아닐 테고.”
오늘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산군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메이의 물음에 산군은 눈웃음을 지었다.
“놀자고 불렀다.”
“…….”
“그리 볼 거 없다. 정말로 혼자 놀기 적적하여 부른 거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미간을 좁힌 메이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글쎄요. 영감님이랑 노는 건 딱히 재미가 없을 거 같은데.”
“허허, 너무 빼지 말거라.”
산군이 그리 말함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세.
이에 인근 호수의 물이 태풍을 맞은 듯 출렁였다.
그사이 산군의 기운이 일대에 벽을 둘렀다.
마치 메이를 가두듯 말이다.
이에 메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아 달라는 게 아니라, 가지 말라는 거군요.”
메이는 산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놀아 달라고 부른 게 아닌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 부른 거였다.
그 점이 메이는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울리 지클리는 혹시 모를 사태에 산군을 상대해 달라며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메이가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싶었다.
‘아론 슈미트는 더는 그린 후드가 아니니까.’
이번 베오그라드의 전쟁은 후계 싸움에서 밀린 아론이 그린 후드를 나오며 시작됐다.
그린 후드에서 자신의 추종 세력을 끌고 나온 그는 그린 후드가 아닌 자신의 가문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거였다.
하여 더는 그린 후드가 아니게 된 아론을 위해 산군이 나서는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메이 윈체스터.
그러던 와중 갑자기 산군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확인하러 왔다가 갑자기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거였다.
‘이 노인네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메이의 눈빛에 산군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그 긴 세월, 내 수발을 들던 제자였네.”
비록 그린 후드를 떠나 남이 되었다고 해도 한때나마 애정을 들여 키운 제자였으며, 여든이라는 나이만큼 자신과 추억도 많이 쌓인 큰아이였다.
“장성한 제자가 분가(分家)하여 일가를 이뤄 보겠다는데, 스승으로서 작은 선물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메이는 그 말을 듣고 현재 상황이 완벽히 이해됐다.
‘내가 이 전쟁에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나를 붙잡아 두려는 거구나.’
그리고 실제로 메이는 이 전쟁에 어느 정도 개입을 할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 윈체스터 가문과 반목해 온 그린 후드.
그곳에서 수십 년을 보낸 아론 슈미트가 베오그라드를 손에 넣는 건 윈체스터 가문에 득이 될 게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딱딱히 굳은 메이 윈체스터의 표정을 본 산군이 흉흉하게 깔아 놓았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노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 붙잡지는 않을 생각이네. 그저 큰애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이 늙은이와 좀 놀아 주게나. 같이 낚시도 좀 하고.”
산군의 표정도, 말투도, 내뱉은 말도 모두 인자했지만, 메이는 그게 경고이자 협박으로 들렸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보낼 생각이 없으니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다.
‘어찌할까…….’
아무리 산군이라고 해도 그녀가 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완벽히 막을 수는 없을 거다.
다만 문제는…….
‘내가 전쟁에 개입하면, 이 늙은이도 똑같이 나오겠지.’
자신과 함께 이곳에서 놀아 달라는 산군의 말.
이는 메이를 붙잡아 두겠다는 것과 동시에 산군 본인 역시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협상안일 터.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자신도 끼어들지 않을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거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메이가 입을 열었다.
“하아… 첫째 제자분은 좋겠네요. 이렇게 든든한 스승님도 계시고.”
“클클, 그런데 정작 그놈은 그걸 모르지. 고얀 놈.”
“좋아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감님과 같이 놀아 드리죠.”
“잘 생각했네.”
“하지만 영감님도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겁니다.”
“걱정 말게, 그럴 생각은 애당초 없으니. 다 늙어서 애들 싸움에 뭣 하러 끼어들겠는가.”
산군은 그리 말했지만, 메이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이 전쟁… 저만 붙잡아 두면 첫째 제자분이 이길 거라고 계산이 섰을 테니까요.”
“흘흘, 참으로 영민한 것이 나이만 좀 어렸으면 우리 둘째 짝으로 딱이었을 텐데.”
“어머, 전 좋은데요? 무려 20살 연하라니!”
“예끼, 이 사람아!”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
그런데 돌연 메이 윈체스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만약에 그런데도 첫째 제자분이 패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도 지면 그게 다 제 놈 팔자인 게지. 그런데…….”
메이의 질문에 말끝을 흐린 산군이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게다. 큰애가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
“…….”
산군의 확신에 메이는 말없이 호수의 남쪽을 바라보았다.
산군에게 발목이 붙잡힌 이 순간.
그녀는 자신보다 먼저 전쟁터에 합류한 조카의 존재가 걱정되었다.
‘텟샤… 제발 무리하지 마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