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98
398화. 베오그라드 전쟁 (13)
아론 슈미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놈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퍼져 나가기 무섭게 회의장 내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작스럽게 비상 회의가 열리게 된 이유.
그건 바로 지클리 연합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때문이었다.
“대체 뭐가 어찌 수상하다는 거지?”
“놈들이… 진영을 간추리고 있습니다.”
“그럼 저들이 저리 움직이는 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들 하는가?”
아론의 물음에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흠…….”
“음!”
전쟁을 앞둔 이들이 진영을 간소화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전쟁을 포기하고 이른 시일 내에 병력을 후퇴시킬 생각이거나.
혹은 단숨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단기전을 준비하는 경우거나.
모두가 그 두 가지 경우를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어느 것이 정답인지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그런 좌중을 슥- 훑어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던 아론.
톡톡-.
곧 손가락이 멈추고, 그에게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쉽게 가기는 글른 모양이군.”
“…….”
“다들 부대를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춰라.”
아론의 명령은 적들이 단기전을 준비한다고 판단을 내렸다는 뜻.
이에 누군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아직 조금 시간이 있습니다. 별동대로부터 소식이 들어오면 움직이시는 게…….”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쾅-!
아론이 내려친 탁자가 부르르 떨리자, 좌중이 전부 자라목이 되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아론은 일갈을 내질렀다.
“어리석기는!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냐! 별동대의 기습이 성공했다면 저놈들은 이미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있을 거다! 그런데 저리 느긋하게 진영을 추스르고 있는 게 어딜 봐서 제 등 뒤에 칼이 놓인 놈들이 할 행동이란 말이냐!”
아론의 말처럼 별동대의 기습이 성공했다면 지클리 연합은 여유가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것이 아론으로 하여금 적들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한 첫 번째 근거였으며.
‘게다가 이토록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놈이 물러날 리 있을까.’
조금 전부터 지클리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이 무시무시한 살기가 저들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두 번째 근거였다.
아론은 지클리 연합 진영이 자리한 방향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맹랑한 것.’
아신검의 묘리에 실어 보낸 흉포한 살기는 같은 경지에 도달한 아론만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울리 지클리가 자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이자 도발이리라.
‘애송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아론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살기를 띠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탁자 끝에 앉은 중년 여인에게 닿았다.
“내 분명히 말했었다. 이번 일은 그대가 책임지고 성공시키라고.”
중년의 여인.
이번 별동대의 이야기를 처음 꺼낸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녕 실패했단 말인가.’
단지 소식이 조금 늦어진다고 여겼건만,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지게 될 터.
어쩌면 그로 인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하여 그녀가 덜덜거리며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알아내라.”
“…예?”
“저들의 후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별동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낱낱이 밝혀내거라! 또한, 생존자가 있다면 반드시 살려서 데려올 것이며,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끝을 흐린 아론의 눈에 시퍼런 살광이 번뜩였다.
“…그 흉수를 찾아, 내 눈앞에 끌고 와라.”
“…….”
“그것만이 네가 살 길이다.”
이번 별동대에 포함된 20인의 벌목꾼.
아론에게 있어 그들은 자신 하나만 믿고 따라 나온 친구이자, 형제요, 자식과 같은 존재였다.
슈미트 연합에 소속된 다른 이들이 언제든 갈아 치울 부속품과 같다면, 벌목꾼들은 자신이 세울 가문의 기둥이 될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 작전으로 인해 그런 귀중한 자원의 절반이 날아가고 말았다.
물론 아론은 아직 그들이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있지만, 만약 그들이 죽었다면…….
‘너희의 혈채는 내 섭섭지 않게 치러 주마.’
반드시 흉수를 찾아 복수를 하리라.
아론은 그리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아론의 살기에 중년 여인은 바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녀는 무조건 찾아야만 했다.
자신을 대신해 아론의 화를 감당할 제물을 말이다.
그렇게 여인이 구명줄을 찾아 떠나고 며칠이 흘러.
뿌우우우-!
둥둥둥-!
우렁찬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북소리.
마침내 강을 사이에 두고 두 연합이 서로를 마주했다.
***
아론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클리 연합은 후퇴가 아닌 전면전을 택한 것이다.
이에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던 슈미트 연합 역시 곧 전투 태세를 갖춰 나갔다.
그사이 막사를 빠져나온 아론은 강물의 유속을 유심히 살폈다.
‘느리군.’
그간 두 진영은 크리스털 호수로부터 뻗어 나온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진영을 맞대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강은 두 진영에게 있어 천연의 해자로, 전쟁 억제기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으니.
이는 서로가 서로를 노리기 위해선 도강(渡江)이란 큰 고비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강을 넘는 쪽이 공성의 부담을 짊어지고.
반면 강 건너에 자리한 이들은 수성의 이점을 지니게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쉽사리 서로를 공격하지 못했던 상황.
아론의 동진(東晉)이 막히게 된 것도 지클리 연합이 생각보다 빠르게 강 건너편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너희가 이제는 거꾸로 강을 넘어 우리를 칠 생각이라는 건가.’
지금까지 강이라는 배경을 무기로 수성을 펼치던 놈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공성을 하겠다니.
‘대체 어디서 비롯된 자신감인 거냐.’
오히려 저들이 먼저 강을 넘어와 주겠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무슨 계책을 가지고 강을 넘을 것인지 말이다.
‘건기를 믿는 건가?’
보름 전쯤 시작된 건기로 인해 강물의 수위는 물론이거니와 유속도 상당히 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수심이 깊었다.
쉽사리 도강할 수 있는 수심은 아니었다.
아론이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강 건너편을 노려보고 있을 때.
척척-.
털 조끼를 입은 노인이 아론의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그래, 확인해 봤더냐.”
노인은 아론을 따라온 벌목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이자, 공인 7단의 노고수였다.
그는 아론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저 새끼들, 어딘가로 병력을 빼돌렸수다. 머릿수가 우리 예상보다 좀 모자랍디다.”
“대충 어느 정도냐?”
“한 2천쯤? 그런데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놈들이 여전히 저 강 너머에서 눈깔 부라리고 있는 걸 보면, 빠진 놈들은 싹 다 쭉정이요.”
현재 대치 중인 양 진영의 전력은 각각 1만 오천.
그중 2천은 많다고 하기도, 적다고 하기도 애매한 숫자였다.
물론 진짜 그 2천이 대부분 하급 전력이라면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지만, 아론은 묘하게 그들의 행방이 신경 쓰였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느냐?”
“미안하외다. 시간이 넉넉지 못해서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수다.”
“흠… 그렇단 말이지. 넌 어찌 생각하느냐. 저들이 그 정도 병력을 어디로 빼돌렸을까?”
“글쎄올시다.”
살짝 턱을 쓴 노고수가 답을 내놓았다.
“강을 넘어야 하니, 어디서 뗏목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겠수?”
상당히 그럴듯한 답이었기에 아론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던 순간.
둥둥둥-!
다급하게 울리기 시작한 경고의 북소리.
이에 아론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고, 동시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
아론은 짧게 탄식했다.
하지만 곧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며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아무래도 네놈과 나는 어쩔 수 없는 산골 촌놈인 모양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뗏목이나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건만, 흐하하.”
그런 아론의 웃음에 노고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킁, 하여간 누가 도시 놈들 아니랄까 봐, 돈이 아주 썩어 넘치는 모양이구려.”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은 노고수의 시선이 향한 곳.
둥둥둥둥-!
격한 북소리를 행진곡 삼아 강의 끄트머리에서 등장한 건 다름 아닌 수십 척에 달하는 선박이었다.
강의 하류에서 힘차게 노를 저으며 올라오고 있는 배들을 보고 아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대단하구나.’
수십 척의 선박은 군용이 아닌 인근에서 운용 중인 상선이었다.
이를 고작 며칠 사이에 저리도 많이 끌어모으다니.
저들 가문에서 운영하는 선박만으로는 저 숫자를 채우지 못했을 테니 빌려 온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상선은 상가에 있어 크나큰 재산이었다.
그런 목숨과 같은 상선을 내준다는 것에서 저들이 베오그라드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 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론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저들이 가진 재물과 영향력이 내 것이 된다!’
저들을 꺾고 베오그라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좁디좁은 산에 갇혀 썩어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다.
자신의 대는 물론이요, 자신의 후손들, 자신을 따라 그린 후드를 나온 이의 후손들까지.
꾸득-.
아론의 주먹이 울끈 말려들어 갔다.
그사이 강을 거슬러 올라온 선박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체결을 시작했다.
강 위에 배로 만든 널따란 다리가 생기는 것을 본 아론은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보다 저쪽 놈들의 머리가 더 낫구나.’
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다니.
간단하지만 꽤 쓸 만한 계책이지 않은가.
물론 이는 수십 척의 선박을 동원할 수 있는 저들만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론이 감탄하며 정면을 바라볼 때.
쿵-!
마침내 모든 선박이 연결되었다.
그러기 무섭게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배 다리를 내달려 강을 건넜다.
마침내 그의 두 다리가 땅을 디딘 것을 본 슈미트 연합이 술렁였다.
“우, 울리 지클리다!”
“울리 지클리!”
울리 지클리.
싱 가문이 자중하는 사이 베오그라드의 최강으로 부상한 신흥 고수.
그가 배 다리의 선두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강렬한 기운을 흘려 댔다.
거기서 ‘이 다리를 공격하고자 한다면 나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라는 의지가 선명히 읽혔으니.
이를 본 아론은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진영을 뒤로 물려라.”
“예?”
당장 달려들어 공격을 해도 모자랄 판에 진영을 뒤로 물리라니?
이해 못 할 명령에 노고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론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 또한 우리의 전리품이 될 터인데 함부로 부숴서야 쓰겠느냐.”
“흐하하! 그렇긴 하군요. 알겠습니다! 진영을 뒤로 물리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겠수다!”
대소를 터뜨린 노고수가 사라진 사이 아론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흉포한 살기를 감지했다.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을 도발하던 놈의 살기가 더욱 선명해진 것이다.
이에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재촉하지 마라, 애송이.”
재촉해 봤자, 네놈의 명줄만 짧아지는 것이니.
아론의 살기 어린 비웃음이 울리 지클리를 향했다.
***
“기회다! 빠르게 넘어라!”
페트라는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내지르며 병력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진영을 뒤로 물리다니.’
아무리 배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또한, 병력이 다리를 넘을 때까지 울리 지클리가 지켜준다고 하여도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들은 다리를 넘어오는 병력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게 아닌가.
그건 건들지 않을 테니 제대로 붙어 보자는 아론의 의지였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저들이 잃은 벌목꾼 스물과 정예 삼백은 전체 병력 수에 비해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전력으로 따지면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만한 전력의 공백이 발생했는데도 저만한 자신감을 보이다니.
‘근거 있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오만?’
페트라는 차라리 이것이 아론의 오만이었으면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전쟁을 치름에 있어 전술과 전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러한 전술과 전략이 무의미해지는 때도 있었으니.
바로 전력에 전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지닌 전략 병기급 고수가 존재하는 경우.
그리고 페트라가 정의한 ‘전략 병기급 고수’는 공인 7단 이상의 고단수였다.
영역을 완성한 공인 7단의 고수는 수백, 수천의 칼날로도 상하게 할 수 없기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전력이며.
공인 8단과 9단은 능히 일인 군단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고.
명인의 위를 완성한 존재는 그 자체로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다름이 없었다.
전략과 전술?
전략 병기급 고수를 상대하는 전략과 전술은 오로지 하나였다.
같은 경지의 고수가 나서는 것뿐.
하여 아론의 저 자신감이 오만이 아닌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쉽지 않겠구나.’
어쩌면 이 전쟁의 승패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게 되리라.
그런 불안한 생각을 애써 떨쳐 낸 페트라.
“서둘러 움직여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병력을 다그쳤다.
***
지클리 연합의 병력 대부분이 강을 건너간 그 시각.
“오오! 붙는다!”
때맞춰 도착한 유리는 이마에 손을 붙이고 눈을 반짝였다.
흡사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강을 건널 의지는 티끌만큼도 읽히지 않았다.
이에 앨 지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대에 합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응, 해야지. 그런데 그게 지금은 아냐.”
“예? 그럼 언제…….”
살짝 초조함이 느껴지는 앨의 목소리에 유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먼저 가 보든가.”
“하지만…….”
어딘가 머뭇거리는 그 모습에 유리는 조소를 지었다.
“왜, 이제 와서 겁나?”
“…….”
“달라지고 싶어서, 성장하고 싶어서 날 따라온 거라면 일단 이 악물고 뒈질 각오로 달려들어. 그 작은 용기가 널 바꿀 계기가 될 거니까.”
“……!”
유리의 잔잔하지만 강인한 목소리에 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에 자리한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신 그들의 눈에 감도는 건 깊은 감동이었다.
“…감사합니다. 살아남으면 꼭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래,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유리가 또 손을 휘휘 내젓자 앨을 선두로 베오그라드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일제히 다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다리를 얼추 건넌 걸 보고 유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갔네?”
“그러게? 갔네.”
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자 유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쓸모없는 혹 덩어리를 드디어 떼어 냈군.”
자신들을 따라온 앨 일행은 이동 중엔 좋은 핑곗거리가 될 쓸모 있는 혹 덩어리였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지금에 와서는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 악성 종양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유리의 중얼거림에 어쩐지 좋은 말을 해 준다 싶었던 이들은 ‘이 새끼가 그럼 그렇지’란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가 테레시아가 물었다.
“그래서 우린 언제 건너갈 생각인데?”
“글쎄?”
“설마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 거야?”
여기까지 와 놓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니.
무언가 그답지 않은 선택에 테레시아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유리가 피식거렸다
“어차피 지금 저 난장판에 끼어봤자 개싸움밖에 더 하겠어? 그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최대한 눈치 좀 보다가 끼어들어서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하되, 실속은 실속대로 챙겨야지.”
“실속?”
“안 보이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봤자 어차피 사람들은 몰라.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농땡이를 쳐도, 짧고 굵게 큰 거 한 방만 터뜨려 주면 실적이 쭉쭉 오른다니까?”
“…그러니까 농땡이를 치시겠다?”
“물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칠 생각이지.”
“…그래서 앨 지클리를 저리로 보낸 거구나.”
농땡이를 치고 있는 걸 앨 지클 리가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여자만 밝히는 반푼이처럼 보여도 이 전쟁의 주축인 지클리 가문의 장자였으니 말이다.
그런 유리의 의도에 테레시아는 얘는 여전하다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
전방에서 들려온 어마어마한 함성.
그와 함께 마침내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장관에 유리 일행의 시선이 고정됐다.
그들이 아무리 요람 출신이라고 해도.
그리고 나름 용병으로 굴러먹은 유리라고 해도 이 정도 인원이 맞붙는 전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저게… 전쟁이야?”
“어마어마하군.”
“배고프다…….”
고수와 고수.
강자와 강자의 싸움만을 겪어 본 그들에게 세력과 세력의 대규모 접전은 꽤 강렬한 충격이었다.
“거대한 두 괴물이 서로를 물어뜯는 느낌이야.”
“확실히 그런 느낌이긴 하네.”
멀리서 지켜본 대규모 전면전은 테레시아의 말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생명체가 맞붙는 느낌이었다.
뒤섞였다 떨어지고.
서로의 약점을 물어뜯고.
인간의 군집으로 이뤄진 거대한 괴물은 쉼 없이 서로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싸움의 우위에 있는 건 페트라라는 좋은 머리를 가진 괴물이었다.
‘역시 만인장이란 호칭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네.’
페트라의 지시에 따라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지클리 연합이란 이름을 가진 괴물은 상대를 크게 몰아붙였다.
어디의 병력이 밀리고 있는지.
어디에 구멍이 뚫렸는지.
그에 대한 대처가 실로 경이로운 속도로 일어났다.
전황을 읽는 눈이 밝은 뛰어난 지휘관 한 명이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와아아아-!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함과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는 슈미트 연합.
이를 본 유리는 볼을 긁적였다.
“어라, 이거… 농땡이 피우다가 끝나겠는데?”
이거이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이길 거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유리의 기우였다.
지클리 연합으로 기울었던 승기.
이를 단숨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도 모자라 반대로 기울게 만든 외침이 들려왔으니.
[아버지이이이!]강 건너에 울려 퍼진 높디높은 괴성.
이에 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옘병… 적당히 큰 거 한 방 터뜨릴 계획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이건 커도 너무 크잖아?
이걸 내가 감당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어쩔 수 없네.’
상황을 보니 이건 자신이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상이란 것도 전쟁에서 이겨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 먼저 간다. 그리고… 자기 목숨은 각자 알아서 챙겨.”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남긴 유리.
파측-!
그의 신형이 뇌전에 휩싸여 사라졌다.
푸른 뇌전의 빛이 이어지는 곳을 본 테레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보단 네가 더 조심해야지 않을까?”
아마 저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한 곳을 향하고 있을 유리.
그의 뒷모습을 잠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테레시아가 빠르게 걱정을 털어 내고 창을 움켜쥐었다.
“우리도 가자.”
“옙!”
“배고프다!”
“가시죠.”
테레시아를 필두로 마왕성의 사천왕이 전쟁터를 향해 달려 나갔다.
앞서 나아간 마왕의 흔적을 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