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04
404화. 협상 (1)
하늘에서 떨어진 듯, 혹은 땅에서 솟은 듯.
아무런 전조도 없이 노인이 나타난 이후.
지클리 연합과 슈미트 연합의 사람들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오한에 시달렸다.
“어흐… 어째 좀 춥지 않나?”
“너도 그러냐? 나도 아까부터 갑자기 그러던데.”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오한이 단순한 추위가 아닌, 두려움에서 오는 추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흡사 포식자 앞에 놓인 연약한 피식자처럼.
산군이 은연중에 흘린 기운에 노출된 이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절로 몸이 움츠러든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현상이 계속되자 사람들도 그제야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추위가 보통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또한, 그 모든 게 노인이 나타난 이후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이 추위의 원인이 노인이며,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란 것은 어렵지 않게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누구지?”
“어디서 저런 늙은이가?”
너도 나도 노인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순간.
그의 정체를 떠올린 건 나이가 좀 있는 중년의 고수들이었다.
“호랑이를 닮은 노고수라…….”
“설마…….”
오래전.
그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
[저 중앙 산맥에는 음흉한 호랑이가 한 마리가 살고 있으니, 그가 바로 저 대산(大山)의 주인이니라.] [호환(虎患)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산의 주인(山君)이 산을 떠나는 것을 늘 경계하여야 할 게다.]기억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옛이야기가 노인의 얼굴과 맞물려 생생히 되살아났다.
이에 그들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사, 사, 산군?!”
“산군이다!”
몇몇이 내지른 절규와 같은 경악성은 이내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유리…….”
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유리를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
‘이 상황에서 갑자기 제자?’
산군의 제안에 유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아무래도… 노친네들한테 사랑받는 운명인 건가?’
요한도 그렇고, 산군이란 늙은이도 그렇고.
심지어 백검병단의 그 빌어먹을 늙은이와 검주까지도 그랬다.
자신은 이상할 정도로 처음 만난 노인네들에게 호의를 받아 왔었다.
다만…….
‘그 호의가 단순히 진짜 호의로 끝난 적이 없는 게 문제지.’
호의를 보였지만, 늘 그 속에 꿍꿍이가 숨어 있었다.
요한은 자신과 거래를 하려 했고.
백검병단의 그 늙은이는 자신을 죽이려 했으며.
검주의 호의는 지금까지도 그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리의 예감상 이 늙은이라고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유리가 뒤틀리려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제의를 잘못하신 거 같습니다만?”
“무엇이 말이냐?”
“그쪽.”
유리가 턱짓으로 죽은 아론을 가리켰다.
“영감님 제자 아니었습니까?”
“맞다.”
“그럼 제자를 죽인 자를 제자로 들이겠다고요?”
“문제 될 게 있느냐?”
“문제가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요?”
유리의 뚱한 표정에 산군은 피식 웃었다.
“똑똑한 녀석인 듯싶었건만,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
“내가 너에게 왜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리와 산군, 둘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놈에게 살길을 열어 주려 함이다.”
“…….”
“아무리 이 스승이 싫어 떠난 못난 제자라 하여도 이 몸의 제자였다. 그런 아이를 죽인 널… 내가 어찌할 성싶으냐?”
산군에게서 뿜어져 나온 무시무시한 기세가 유리를 옥죄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압력.
평범한 이라면 졸도를 해도 십수 번은 졸도했을 압력이었지만, 유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 정도야 뭐.’
검주의 백보 의식에 비하면 산군의 압박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 압박이 들어오니 옛 생각도 나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글쎄요? 영감님이 딱히 뭘 할 거 같지는 않은데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예.”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아니면 오만한 건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산군의 기세가 한층 더 거세지며 유리를 짓눌렀다.
그 흉흉함이 어찌나 지독하던지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던 사람들조차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듯, 일촉즉발의 상황.
그럼에도 유리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끼는 제자가 죽을 때까지 구경만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연유가 뭡니까?”
“…….”
“진즉 끼어들어 제자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으셨던 분이, 이제 와서 죽은 제자의 복수를 하시겠다고요?”
“…….”
“정말로?”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라는 듯, 맹랑하기 짝이 없는 유리의 눈빛에 산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리를 옥죄던 기운을 거둬들이며 입을 열었다.
“고놈 참… 주둥이를 놀리는 솜씨가 요한 그놈을 쏙 빼닮았구나. 어디서 제 놈이랑 똑같은 걸 주워다 제자로 삼은 건지. 쯧.”
“……?!”
“뭘 그리 놀라고 있어? 뇌운을 그리 보란 듯이 썼으면서 네 스승이 요한 그놈인 걸 몰라보길 원한 게야?”
평소였다면 자신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고, 그저 거래 관계를 맺은 것뿐이라고 설명했을 유리.
하지만 그는 이를 굳이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한테 영감님 제자를 하라고 한 겁니까?”
“흐흐, 뭔 상관이냐? 이미 뒈진 놈이 제자를 빼앗겼다고 관 뚜껑이라도 열고 튀어나올까?”
“…….”
…관 뚜껑은 아니고 제 머리 뚜껑은 열고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 뒈진 영감탱이가 지금 제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서 말이죠.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유리를 보고 오해한 산군이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왜, 내가 네 스승을 욕보여 기분이 좋지 않으냐?”
산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자, 그럼 슬슬 확답을 주거라.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재차 이어진 산군의 제의에 유리는 간단히 답했다.
“싫은데요.”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 짧은 확답.
이에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산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리 답한 산군의 시선이 아론의 주검에 닿았다.
“네 말대로 난 내 제자가 죽을 때까지 나서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하지만 그건 이 아이가 미워서가 아니다.”
“…….”
“오히려 믿었기에… 이 녀석이 성취를 이루고 널 죽이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 끝까지 믿었기에 나서지 않았던 것뿐이다.”
서글픔이 담긴 산군의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끼었다.
“하지만 결국 벽을 넘지 못하였구나. 모자란 놈.”
그의 분노가 유리를 향했다.
“오해하지 말거라. 난 딱히 네놈이 밉지 않다. 오히려 그 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편이지.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게다. 어찌 그놈에게만 이런 행운이 따르는 건지를 몰라서.”
아니, 산군의 분노는 유리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쯧, 그놈 제자가 내 제자 하나를 뺏어 갔으니, 나 역시도 그놈의 것을 빼앗아 보려 했건만.”
요한과 인연이 있음을 암시하는 산군의 말에 유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음흉한 늙은이.”
혹시나 싶었더니만, 역시나였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더니, 저 늙은 괴물도 속에 꿍꿍이를 감추고 있었다.
“뭐, 어쩌겠느냐, 선연(善緣)이라는 것이 억지로 맺는다고 맺어지는 게 아닌 것을.”
그리 중얼거리며 산군이 아론의 주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으으으-!
그러자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흘러나와 아론의 시신을 감쌌고.
파스스-.
이내 시신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제자의 주검을 무(無)로 되돌린 스승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한데 말이다, 내 오래 살아오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단다. 선연은 쉬이 만들어지지 않으나 악연(惡緣)은 그 반대라는 것을.”
의미심장한 산군의 이야기에 유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옘병, 빌어먹을 노친네. 결국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서 길게도 간을 봤네.”
그리고 그런 유리의 중얼거림이 신호였을까.
고오오오오-.
산군에게서 숨 막히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과연 네놈과 나의 연은 악연으로 흘러가게 될지… 아니면, 여기서 끊기게 될지.”
그 말과 함께 산군이 유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무기를 쥔 것도 아닌, 마치 벌레를 쫓는 듯 너무도 가벼운 휘두름.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파생된 아신기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한 수의 위력이 지금껏 상대해 온 아론의 아신기를 훌쩍 웃돌고 있지 않은가.
하여 유리는 이를 악물고 광인을 펼쳤다.
곧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른 금광월관.
유리는 최대한 긁어모아 증폭시킨 마나를 아신검에 담았다.
그리고 곧장 산군의 아신기를 향해 휘둘렀다.
스걱-.
콰아아아앙-!
실로 어마어마한 폭음이 둘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내장이 진탕되며 짙을 핏물을 토해 낸 유리.
쿨럭-!
안 그래도 요양이 필요할 정도였던 내상이 산군의 일격을 받아 내며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유리는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그극-.
‘버텨야 한다!’
산군의 아신기와 자신의 아신검이 힘겨루기에 들어간 상황.
여기서 집중력을 잃으면 자신 역시 아론과 같은 꼴이 될 터.
하여 유리는 악을 쓰며 검을 밀었다.
그러던 그 순간.
쩌적-!
“……?!”
어디선가 들려온 불길한 소리.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유리의 백강철검이었다.
그리고.
텅-!
유리가 어찌 손을 쓸 새도 없이 검신이 중간에서 톡 부러지며 뒤로 튕겨 나갔다.
날아온 검신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유리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큭!’
검신이 부러지며 흔들린 집중력.
그로 인해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고, 한번 밀리기 시작한 유리의 아신검이 속절없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제… 젠장!’
더욱더 마나를 끌어모으고, 광인까지 극한으로 운용해 보았지만…….
그그그극-!
이미 한계에 달한 유리는 산군의 아신기를 밀어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져 밀리는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그러다 결국 산군의 아신기가 지척까지 다랐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사실에 유리의 낯빛이 어두워진 순간.
스륵-.
유리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어?’
창 한 자루를 쥔 채 나타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보고 유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텟샤?’
호리호리한 체형과 낯익은 형태의 창.
그리고 품은 기운마저도 테레시아와 비슷했다.
하지만.
‘아닌데?’
여인은 테레시아가 아니었다.
그 명백한 증거는 그 흉흉한 산군의 아신기를 그녀가 너무도 손쉽게 처리하고 있다는 거였다.
‘강하다.’
그것도 그냥저냥 강한 게 아니다.
‘명인!’
그녀는 명인이었다.
그렇게 유리가 자신을 보호한 여인의 등을 바라보던 순간.
콰아앙-!
아신기를 완전히 날려 버린 메이가 산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저 가볍게 인사만 나눈다고 하여 지켜보았더니… 존장께서 까마득히 어린 후배에게 손속이 너무 과하시네요.”
“허허, 그저 가볍게 인사만 나누지 않았더냐? 이보다 더 얼마나 가벼이 인사를 나누라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산군이 쓴 힘은 정말 말 그대로 가벼운 인사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메이의 사나운 눈빛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 경계 가득한 시선에 산군은 웃음기를 머금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와 나의 인연은 앞으로도 악연으로 쭉 이어지려는 모양이다.”
“…….”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유리를 향해 산군은 마지막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터. 오늘은 훼방꾼이 끼었으니, 다음번에 제대로 놀아 보자꾸나.”
그 말을 하며 유리의 모습을 천천히 시야에 담은 산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
“…….”
그렇게 산군이 떠나가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중 메이 윈체스터가 유리에게로 몸을 돌렸다.
테레시아가 나이를 들면 이러할까.
누가 봐도 테레시아의 혈육이란 걸 알 수 있는 그녀가 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
하지만 메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부럴, 잘해 놓고 막판에 이러면 너무 모양 빠지는데.”
난데없는 유리의 욕설에 눈이 동그래진 메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는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저기, 초면에 이런 말씀 드려서 상당히 죄송합니다만.”
“어? 뭐, 뭐가 말이니?”
“저 기절합니다. 그러니 뒤처리 좀요.”
그리 통보하고는 그대로 까무라쳐 뒤로 넘어가 버린 유리.
쿵-!
“…….”
통나무처럼 쓰러져 버린 그를 보고 메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을 끔뻑이는 것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