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05
405화. 협상 (2)
갑자기 나타난 산군과 유리가 대화를 나누다가 맞붙은 순간.
또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여인이 산군의 공격을 가볍게 맞받아치고.
이후 여인과 무어라 대화를 나눈 산군이 홀연히 사라진 뒤, 유리가 기절하여 쓰러지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전장의 분위기를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특히 슈미트 연합의 분위기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메, 메이 윈체스터다.”
“그림자 여왕……!”
명인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메이 윈체스터.
또한, 수십 년간 산속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산군과 달리 대외 활동을 해 온 메이였기에 그녀를 알아보는 이들은 상당했다.
하여 산군이 사라지고 그녀만 남았을 때, 슈미트 연합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슈미트 연합이 메이를 바라볼 때.
“물러가세요.”
메이의 잔잔한 목소리가 마나를 머금고 전장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산군께서 손을 쓰지 않는다면 저 또한 이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물러들 가세요. 그럼 쫓지 않겠습니다.”
그런 메이의 선언에 슈미트 연합 수뇌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들은 메이의 마음이 바뀔세라 목청 높여 소리쳤다.
“후, 후퇴다!”
“후퇴하라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후퇴 명령에 따라 슈미트 연합이 허겁지겁 전장을 이탈했다.
한편,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메이 윈체스터.
슈미트 연합의 병력이 거의 안 보일 때쯤이 되어서야 그녀는 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大)자로 뻗어 세상 모르고 잠든 청년.
‘이 아이의 마체술…….’
그의 마체술을 어찌 그녀가 몰라보겠는가.
레드너 가문의 뇌운(雷雲).
그건 자신에게는 은사(恩師) 되는 분의 상징과 같은 마체술이었다.
그리고 최근에야 그 은사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였건만.
‘세상에 이리도 똑 닮았다니!’
그 산군을 상대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걸 보니 성깔이 영락없이 그분을 빼다 박은 수준이지 않은가.
그리고 성깔만 그분을 닮은 게 아니었다.
재능 역시 그분을 닮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넘어섰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을 주워 오신 겁니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한 나이.
하지만 그가 이룩한 경지는 저 나이 때의 자신조차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실로 경이롭기 짝이 없는 재능이었다.
스륵-.
천천히 유리를 안아 든 메이.
기절한 그의 고요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메이의 눈에 다정함과 애틋함이 흘렀다.
“네가 그분께서 세상에 남긴 유일한 분신이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르르-.
평온했던 유리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며 돌연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아닌가.
마치 몹쓸 것을 들었다는 듯 말이다.
“…추운가?”
하지만 이내 다시 평온해진 유리의 표정을 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메이.
유리를 안아 든 그녀가 강 쪽으로 등을 돌린 순간.
스륵-.
메이의 신형은 어느새 강 건너에 나타나 있었다.
“헙?!”
“와, 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타나자 지클리 연합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환영하지도 못하고.
분위기상 메이 윈체스터가 적이 아닌 걸 알지만, 스스럼없이 대하기에는 명인이란 이름값이 주는 압박이 엄청났다.
하여 이도 저도 못 하고 그저 멀찍이 바라볼 때.
“유리!”
“배고프다!”
메이를 둘러싼 인파를 헤치고 네 사람이 나타났다.
그 선두에 선 이를 보고 메이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텟샤, 왔……!”
그녀가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찰나.
“유리!”
테레시아가 인사도 없이 자신의 품에 안긴 청년을 빼앗듯 데려가자 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리, 정신 차려 봐!”
“유리이이! 죽으면 안 돼애애!”
“배고프다!”
“걱정 마라. 죽진 않았다. 그러니 일단 다들 비켜 봐. 내가 깨워 볼 테니까.”
“배고프다!”
“맞아, 군터 나쁜 놈! 왜 아픈 애를 때리려고 하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때려 볼 수 있겠냐? 그리고 지난번에는 나보고 때려서 깨우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왜 안 된다는 거냐?”
“배, 배, 배고프다.”
“우, 우린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 도, 도무지 모르겠는걸?”
“그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믿지. 그러니 조용히 내게 그 녀석을 넘겨라. 잠깐이면 된다. 금방 끝나.”
엔라이트의 항구 도시 여관에서 유리의 뺨을 쳐 깨우려다 역으로 얻어맞고 날아갔던 군터.
복수를 꿈꾸는 그가 친구들과 옥신각신하는 틈에 끼어 유리를 걱정스럽게 살피는 테레시아.
메이는 그런 조카의 모습에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유리를 살피다가, 유리의 멱살을 잡은 군터의 뒤통수를 찰싹 두들겨 주며 일어난 테레시아가 메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고모님.”
“텟샤.”
테레시아의 눈동자 속.
조금 전까지 걱정하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안에 섞인 안도와 기쁨에 메이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는 아이니?”
메이의 시선이 유리에게 닿은 것을 느낀 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테레시아가 유리와의 관계에 관해 설명을 하려던 찰나.
툭-.
메이가 테레시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을 끊어 냈다.
어린 조카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는 그녀.
“그럼 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들으마.”
“…고모님?”
“할 일 없는 늙은이한테 붙잡혀서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단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 봐야 하거든.”
“아!”
벌써 돌아간다는 고모의 말에 테레시아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에 더욱 짙어진 메이의 미소.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니?”
“저는…….”
“저 아이와 함께할 거니?”
살짝 갈등하던 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흠…….”
테레시아의 답에 메이의 시선이 잠시 유리의 손에 닿았다.
기절하였음에도 끝까지 손에 쥐고 있는 반 토막 난 검.
이에 메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아이가 깨어나면 전해 주렴. 레드너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예?”
테레시아가 놀라 되물었지만, 이미 눈앞에 메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휘오-.
메이가 머물던 자리에 작게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그 속에 섞인 검은 기류.
하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자 테레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고 싶은 말만 하신 뒤 사라지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참 자유분방해도 너무 자유분방한 고모님이셨다.
***
며칠 뒤.
빛이 풍성하게 들어오도록 설계된 실내.
그런데 환한 낮임에도 그 안의 분위기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분위기의 원인은 실내에 착석한 이들 때문이었다.
“어쩌면 좋단 말이오…….”
“으음…….”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슈미트 연합.
아니, (전)슈미트 연합의 수뇌부들이었다.
이제 연합의 구심점이었던 아론 슈미트와 그 일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이 머리를 싸매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전쟁을 어찌 마무리해야 할지를 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맡은 의장이 의견을 구하는 말을 계속해서 했지만, 쉽사리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협상밖에 답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의견다운 의견을 내뱉은 이는 다름 아닌 아론의 명령을 받고 떠났던 중년 여인이었다.
살고 싶으면 후방의 별동대에게 벌어진 일을 조사해 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본진으로 복귀하여 회의에 참석한 거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린 좌중의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종전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협상이라… 과연 저들이 응하겠소이까?”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저들 역시 수장을 잃었다.
하지만 자신들과는 달리 저들에게는 아직 아론을 꺾은 ‘그’가 있었다.
그가 존재하는 한 이 전쟁은 이미 저들이 다 이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저들이 협상에 응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복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미 패배한 것과 다름없는 전쟁.
하지만 전쟁을 항복으로 끝내는 것과 협상으로 끝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만약 항복을 하게 되면 많은 것을 내어 주어야 할 테지만.
협상을 하게 되면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이를 저들도 알고 있다는 것.
이에 좌중의 표정이 어두워진 찰나.
“듣기로는 아론을 꺾은 유리 홀랜드란 자가 많이 다쳤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중년 여인의 물음에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분명 내상을 입었을 것이오.”
“그 정도라면 꽤 긴 시간 요양을 해야 할게요.”
유리가 아론을 꺾은 뒤 지쳐 보이던 모습도.
또한, 그가 산군과 일격을 주고받은 뒤에 기절하는 모습도.
회의장에 자리한 모두가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그렇게 좌중이 확인을 해 주자 중년 여인은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렇다면 협상을 시도할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이미 그 싸움으로부터 며칠이 흘렀는데도 아직 저들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전부 그 젊은 고수가 회복되길 기다리고 있는 걸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지요.”
“이대로 그 고수가 완전히 회복된다면, 그때는 협상이 아닌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합니다.”
“흐음…….”
“또한, 저들 역시 더 이상 전쟁을 길게 끌고 싶을 생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잊으셨습니까? 저들이 이번 싸움에 얼마나 많은 용병을 고용했는지?”
“아!”
“다 이긴 전쟁을 굳이 길게 끌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쩌면 저들도 협상을 반길 겁니다.”
“으음…….”
여인의 말에 좌중은 침음을 흘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들이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요!”
“그리합시다!”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볼 수 있겠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그렇게 회의를 통해 활로를 찾은 (전)슈미트 연합은 그날 바로 지클리 연합에 사람을 보냈다.
협상 타결을 위한 사절을.
***
지클리 연합의 진영.
그중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막사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혀업상? 혀어어어업상?”
자신이 가져온 소식에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듯한 유리를 보고 페트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들이 돌았나? 당장 백기 치켜들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와도 모자랄 판에 감히 협상을 논해?”
유리의 입꼬리가 크게 씰룩였다.
“그리고 그 머저리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여기 윗대가리 새끼들은 하나같이 대가리에 똥만 찼나!”
쿨럭-!
“끄악, 내상 도진다! 시부럴!”
길길이 날뛰다 피를 토하는 유리를 보고 페트라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진정시켰다.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이 전쟁은 사실상 유리 혼자서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하여 항복을 받아 내며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협상으로 끝낸다고 하니 열불이 치솟는 것도 당연하리라.
하지만.
“네가 이 전쟁의 영웅이라고 해도… 결국 전쟁을 유지하는 돈은 그 윗대가리들의 가문에서 나온다. 넌 그들에게 고용된 존재일 뿐이고.”
“…….”
“그러니 어쩌겠니. 그 윗대가리들이 전쟁을 길게 이어 가서 얻는 이득보다 협상을 통해 빨리 끝내는 게 더 득이 된다고 계산을 내린 것을.”
“쯧.”
“그걸 우리 같은 고용인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다.”
페트라의 설명에 입술을 삐죽이기는 했지만, 유리도 잠잠히 기운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포기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줌마.”
“응?”
“혹시 이번 협상에 사람 하나 박을 수 있어?”
“사람을? 협상단에 사람을 심겠다는 거니?”
“어. 협상권을 가진 사람 중에 한 자리 정도 만들 수 있을까?”
유리의 물음에 페트라는 곰곰이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을 판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다.”
전쟁 영웅 유리 홀랜드.
그가 이번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유리의 요구는 충분히 처리될 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전쟁은 그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페트라의 확답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윗대가리들한테 전해 줘.”
“그런데 누굴 심으려는 거니?”
그런 페트라의 물음에 유리가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최고의 협상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