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07
407화. 협상 (4)
배고프다아아앗!
협상장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고성에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시작했네.”
흡족, 만족, 즐거움, 상쾌함.
그 네 가지 감정이 모조리 섞인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던 것도 잠시.
협상장을 바라보는 유리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혀어어업상? 누구 맘대로?”
자신이 용써서 겨우겨우 이긴 전쟁을 승전도 아닌 애매한 종전으로 끝내시겠다?
윗대가리들의 그런 어영부영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저들은 손해지만 내게는 이득이다.’
지금에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더 이득일지 모르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저들에게는 완벽한 승리가 필요해진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슈미트 연합을 통째로 집어삼킨 뒤 이번 전쟁으로 소비된 것들을 충당하여야 하니까.
그리고 그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필요할 터.
‘조금만 지나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용병 협회를 통해 받기로 한 정해진 보수가 있기는 했지만, ‘전공 보상’은 별도의 개념이다.
그리고 ‘유리 홀랜드’란 존재가 필요한 연합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그를 쓸 수밖에 없으리라.
‘대충 참여한 전쟁이라면 모를까 이왕 깊게 발을 들인 거, 제대로 한몫을 챙겨야지.’
그런 이유로 유리가 뽀삐를 저 협상장에 들여보낸 거였다.
‘협상?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봐.’
단, 말이 통할 수 있다면 말이지.
배고프다아아아!
다시금 들려온 뽀삐의 고함에 유리는 낄낄거렸다.
“이야, 우리 뽀삐 잘한다, 잘해!”
유리는 뽀삐에게 자세한 내막은 설명하지 않았다.
협상을 깽판 놓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 대신 협상장에 들어가 열심히 협상에 임하면 된다고 했을 뿐.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배고프다앗!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한껏 불만과 짜증이 섞인 뽀삐의 외침 덕에 협상장의 상황이 어찌 굴러가고 있는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좋아, 이걸로 1차 협상은 확실히 어그러졌을 테고.’
그리고 머리가 있다면 이번 일로 저들도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눈치챘을 거다.
‘나는 협상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경고를 말이다.
‘그때 저것들이 접촉해 오면 적당히 타협해 봐야겠네.’
연합에서도 자신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적당히 합의점을 찾으려 할 거다.
그때 가서 챙길 건 챙기고 물러나는 척을 해 주면 되리라.
“좋아, 좋아!”
흡족한 얼굴로 연신 낄낄거리는 유리.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세 쌍의 눈이 있었으니.
“…기절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팔팔해졌네.”
“그 팔팔한 기운으로 자꾸 못된 짓만 골라서 하려는 게 문제죠.”
“역시 그때 때려 봤어야 했는데…….”
며칠째 계속해서 아쉽다는 눈빛을 하는 군터를 뒤로하고, 테레시아와 아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배고프다!
쾅-!
그 뒤로도 한동안 뽀삐의 고성이 협상장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스륵-.
마침내 끝난 것인지 고성이 멈추고, 협상장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전)슈미트 연합의 협상단원들.
“하아…….”
“허…….”
“후우…….”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는 2남 1녀의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마치 기가 빨린 듯, 혹은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듯한 얼굴.
그들이 폴폴 풍기는 낭패한 기색에 유리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됐나 보네.’
저게 딱 자신이 보고 싶었던 얼굴이지 않은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
그런데.
스륵-.
곧이어 천을 걷으며 나온 두 사람으로 인해 유리의 고개가 우뚝 멈췄다.
‘어?’
조금 늦게 천을 걷으며 나온 이들은 지클리 연합의 협상단원들이었으니.
그들은 표정이 매우 환함은 물론이요, 입가에 은은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웃어?’
저 자식들이 지금 웃고 있으면 안 되는데?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유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런 그를 발견하고 협상단원 둘이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하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너무도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와 유리의 손을 사이좋게 하나씩 붙잡은 협상단원들.
유리의 손을 공손히 잡고 흔드는 둘의 눈에서 경외심이 물씬 풍기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단장님을 의심했습니다! 어찌 저런… 분을 협상장에 들여보낸 건지! 이 협상을 망치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그게 맞는데?
“하지만 겪어 보니 알겠습니다. 단장님께서 이 모든 걸 내다보고 계셨단 걸!”
…엉?
“저희가 아둔했습니다. 저도 나름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해 보았다 자신하였건만… 세상에 이런 식으로 협상을 주도하다니! 어찌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내가 뭘?
“오늘 참으로 좋은 경험을 하였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전부 단장님 덕분입니다. 이 공로는 꼭 상부에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뭘!
두 사람이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을 유리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혼미해진 순간.
“단장님 덕분에 일이 더 잘 풀렸습니다! 아니, 이건 기대 이상의 성과입니다!”
“하하, 준비해 온 것 이상으로 탈탈 털린 뒤 얼빠진 저들의 얼굴을 단장님께서 보셨어야 하는데 말이죠! 하하!”
“……?!”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어째?’
뭐가 잘돼?
기대 이상의 성과?
“…왜?”
“예?”
“단장님?”
어째서 잘된 건데?
머릿속에 가득 찬 의문이 곧 혼란으로 변한 순간.
스륵-.
협상장의 문이 걷히며 뽀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고프다!”
마치 자신이 해냈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드는 뽀삐.
그 모습을 본 유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고.
“…왜?”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마주한 유리는 ‘왜?’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
협상이 마무리된 지 며칠이 흘렀다.
강가에 앉아 빠르게 정리되는 진영을 보며 유리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옘병할 뽀삐 새끼…….”
그날 아린을 끼고 뽀삐와 삼자대면을 한 결과.
알아낸 사건의 자초지종은 간단했다.
[자기는 그냥 최선을 다해서 협상에 임했다는데?]아니, 자초지종이니 뭐니 할 것도 없었다.
뽀삐는 그냥 열심히 협상하며 상대의 의견에 반박했고.
그리고 그 ‘윽박지름’에 가까운 협상이 상대에게 먹혀들었단다.
‘…이게 먹힌다고? 왜?’
협상을 깽판 놓으라고 들여보낸 놈이 협상의 일등 공신이 되어 버린 상황.
뽀삐를 향해 ‘단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최고의 협상가입니다!’라고 칭찬하던 두 사람을 떠올리면 겨우 완치된 내상이 다시 도질 듯싶었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그래, 이걸 이해했다가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이거나, 아니면 내가 미친 거나… 둘 중 하나가 되는 거다!’
유리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한숨에 실어 억지로 흐트러뜨렸다.
‘이 돼지 새끼, 두고 봐라.’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린 뽀삐에게 한 달 동안 간식 금지령을 내리리라.
그리 복수를 다짐한 유리.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옆에 놓인 물건에 닿았다.
곧 유리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흰둥아…….”
산군과의 싸움에서 반 토막이 난 애검.
처음 검을 잡은 이후, ‘흰둥이’라 이름 붙여 지금까지 쭉 써 온 백강철검이었기에 그만큼 애정이 깊고 손에 익은 무기였다.
‘…이건 되살릴 수 없다.’
요람에 있을 적 세경에게 야금술을 배웠으니 알 수 있었다.
토막 난 검을 다시 이어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 내구도는 예전만 같지 않으리라.
아마도 앞으로 싸움이 조금만 격해진다면 툭 하고 부러져 나갈 터.
그런 무기를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하여 새로운 검을 장만하려 해 보았지만…….
‘성에 차는 검이 없다는 게 문제지.’
마음에 드는 검이 없었다.
애초에 백강철검의 재료인 백강철이 뛰어난 재료기도 했지만, 검의 단조 상태 또한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흰둥이’가 자신의 마체술… 즉, 레드너 가문의 마체술에 꼭 맞는 검이었다는 거다.
유리는 이러한 사실을 새로운 검을 장만하기 위해 알아보던 중 깨닫게 되었다.
‘무치네 할아버지가 정말 솜씨가 좋았던 거네.’
백강철검의 제작자는 명인인 랄프 슈넬.
요한과 친분이 있어 레드너 가문의 마체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장인.
하여 자신에게 맞는 검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찾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거긴 너무 멀어.’
랄프 슈넬이 거주하는 냉벽 산맥은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들를 생각이기는 하나,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은 임시로 영감 검을 쓴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유품이기에 레드너 가문에 검을 되돌려주면 반드시 새로이 검을 구해야만 했다.
‘직접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마음에 드는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년이 소요될 거다.
‘손에 맞는 검을 어디서 구하냐…….’
유리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웅웅-.
갑자기 들려온 진동음.
그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유리의 내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을 익히 경험한 유리가 눈을 끔뻑였다.
“월루?”
유리의 부름에 다시 들려온 진동음.
웅웅-.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듯, 혹은 검이 없으면 자기를 쓰면 된다는 듯한 울림에 유리가 피식거렸다.
“어디 반토막 난 검 쪼가리가 끼어드냐?”
내가 반토막 난 검을 쓸 거였으면 애초에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겠냐?
그런 유리의 타박에 월루가 작은 진동음을 흘렸다.
우웅…….
상당히 시무룩한 진동음을 말이다.
이에 어이없다는 듯 유리가 헛웃음을 지은 순간.
유리이이이이!
저 멀리, 본진으로부터 들려온 아린의 목소리.
소오오오니이이임 와아아아아써어어!
그녀의 외침에 유리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님?”
자신을 찾아올 손님이 누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가 걸음을 옮겼다.
***
“유리, 유리! 여기야 여기!”
진영의 입구에 들어서자 아린이 양팔을 휘저으며 유리를 반겨 주었다.
“너 왜 그렇게 신났냐?”
“후후후.”
“……?”
어딘가 모르게 너무 신이 난 아린을 쫓아 걸음을 옮긴 끝에.
유리는 어째서 그녀가 그토록 신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자신을 찾아왔다는 손님.
아린, 뽀삐, 군터, 테레시아에 둘러싸여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또한 안 그래도 유리가 정말 꼭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찾으러 갈 수고는 덜었네.”
유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찌, 잔금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우리 의뢰주님?”
그런 유리의 물음에 몰래 온 손님, 율리아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짤랑-!
그녀가 품에서 꽤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꺼내는 걸 보고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좋네, 그런데… 그것뿐이야?”
무언가 더 있지 않냐는.
그런 유리의 눈빛을 율리아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아, 기여도에 따른 성공 보수?”
“역시 대화 하나는 잘 통해서 좋다니까.”
“당연히 그것도 준비했지. 네가 아주 마음에 쏙 들어 할 걸로!”
“그거참 기대되네.”
소월 용병단이 이번 전쟁에 끼어들게 된 직접적인 원인.
그리고 유리가 생각보다 더 열정적으로 전쟁에 임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율리아가 주기로 한 전쟁 기여도에 따른 보상’이었다.
유리의 기대 가득한 시선에 율리아가 작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고민을 많이 해 봤어. 이 전쟁에서 너의 활약은 기여도를 책정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끄덕끄덕-.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너의 활약을 기여도 수치로 표현하면 100%… 아니, 120% 정도는 될 거야.”
끄덕끄덕-.
“그래서 과연 그 기여도에 걸맞은 보상이 뭐가 있을까, 그 엄청난 전공에 어울리는 보상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 시시하고 값어치가 떨어지는 걸 소월 용병단에 보상이라고 줄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끄덕끄덕-.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너희에게 세상 무엇보다 값어치 있는 걸 주기로 결심한 거야!”
끄덕끄덕-.
“나를!”
끄으으… 덕?
율리아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바로 이 율리아 싱을 말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