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10
410화. 레드너 (1)
“언젠가 말해 준 적이 있을 거다. 레드너 가문은 고대 동방의 현인에게서 비롯된 가문이라고.”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레드너 가문이 시작부터 무가(武家)였던 것은 아니다.”
대략 400여 년 전.
레드너의 시조가 가문을 만들었을 당시만 해도 레드너 가문은 무가 아닌 학문을 다루는 집안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주로 연구한 주제는 다름 아닌 고대 동방의 학문.
“연구하는 분야가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느 한 고대 동방의 현인과 인연이 닿게 됐지.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 레드너 가문의 역사가 바뀌었다.”
고대 동방의 현인.
즉, 고대 동방의 지식인이라 불린 이와의 만남 이후, 레드너 가문은 본격적으로 마체술을 연구해 나갔고.
그러다 마침내 5대 가주에 이르러 뇌익과 운보라는 희대의 마체술이 탄생하며 대륙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생이 학자 집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집안 사람들은 대대손손 외골수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그게 문제였지.”
뭐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죽어라 파고드는 성향.
다행히 역대 가주들이 마체술에 꽂혀 있었기에 대대로 레드너 가문의 가주치고 약한 이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마체술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가문을 관리하는 데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가문의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기보다는 개인의 강함을 우선시했던 레드너의 가주들.
그러한 가주들 덕분에 레드너의 명성은 점점 드높아졌지만, 가문의 세(勢)는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깎여 나갔다.
그리고 이는 요한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나는 더 심했지.”
레드너 가문의 14대 가주 요한 레드너.
5대 가주를 뛰어넘는 천재라 불린 그였지만, 그러한 재능만큼이나 역대 가주 중 그 누구보다도 외골수적 성향을 타고난 이였다.
“난… 일평생 위만 보고 살아왔었다.”
강해지기 위해, 검주를 꺾기 위해 가문을 내팽개치고 평생 대륙을 떠돌았다.
그렇게 검주가 앉은 검좌만을 올려다보며 살아온 삶.
죽은 뒤, 이제야 이를 회고하는 요한의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내겐 여동생이 하나 있다. 검주를 꺾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사이 내 빈자리를 그 아이가 대신하고 있었으니… 내 검은 그 아이에게 전해 주거라. 그 검이 그리 보여도 가주지보(家主至寶)다.”
요한의 설명에 유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냐?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할 말은 내가 아니라 영감이 있는 거 같은데?”
“…….”
유리의 지적에 이번에는 요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그가 한숨 섞인 말을 토해 냈다.
“애새끼… 하여간 눈치는.”
요한이 살짝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레드너 가문에 도착하거든… 좀 돌봐 줄 수 있겠느냐?”
“돌봐? 레드너 가문을?”
“거창하게 도와 달라는 건 아니다. 그냥 살펴보다가 가문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면 네놈 능력이 되는 선까지만 돌봐 달라는 뜻이다.”
“…….”
다시 말이 없어진 유리.
그의 빤한 시선에 요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네놈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많지.”
“해 봐라.”
“정말 해도 돼?”
“해 봐.”
“영감탱이, 드럽게 뻔뻔하네?”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이에 요한은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러는 사이 유리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살아 있을 땐 나 몰라라 하며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가, 뒈지고 나니까 이제 와서 후회가 돼?”
“…….”
“그렇게 후회할 거였으면 뒈지기 전에 가서 뭐라도 해 줬어야지.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해 놓고서 이젠 나보고 가서 도와 달라?”
유리의 신랄한 비판이 이어질 때마다 요한의 어깨가 조금씩 밑으로 추욱- 쳐졌다.
“왜 영감탱이가 했어야 할 일을 나한테 떠넘기는데? 뒤늦게라도 가문 사람들에게 뭐라도 해 주고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거야?”
“…….”
“정신 차려. 날 이용해서 마음의 짐을 덜 생각 따윈 하지 말고 그냥 속죄하듯 후회를 안고 살아. 아니, 살 것도 아니지. 이미 뒈졌으니까.”
“…….”
유리의 비판이 끝났을 땐, 요한의 어깨는 마치 탈골이라도 된 듯 푹 꺼져 있었다.
“…옘병할 놈.”
요한은 작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더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유리의 말이 너무도 바른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바른말이기에 더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이미 죽어 세상에 없어진 내 짐을 덜고자 저 녀석에게 떠넘길 수 없는 노릇이겠지.’
이미 가뜩이나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것 중 많은 것을 유리에게 떠넘긴 상태다.
여기서 더 녀석의 어깨에 짐을 얹는다면 그건 참으로 뻔뻔한 작자이지 않은가.
“…조금 전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해라.”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거로 해?”
“거, 애새끼! 그만 툴툴거리고 다시 오기나 해! 네놈의 아신검에는 아직 미진함이 많다! 이참에 그 미진함을 싹 뜯어 고쳐 줄 터이니!”
“괜히 뻘쭘하니까 승질은.”
“이 새끼가 진짜!”
쾅-!
“으악, 이 미친 영감탱이가?! 나 방금 팔 잘릴 뻔했잖아!”
요한의 기습적인 공격에 대경실색한 유리.
그가 검을 휘두르며 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
흐엑 흐엑-.
금방이라도 넘어가는 게 아닐까 싶은 거친 숨소리가 후텁지근한 산속으로 퍼져 나갔다.
흐엑 흐엑-.
짙은 단내가 섞인 숨이 토해지길 얼마나 흘렀을까.
숨소리의 주인인 율리아는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도, 도착!”
끼익- 쿵-!
용병단의 식구가 여섯으로 늘어나면서 덩달아 커진 붕붕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이에 수레 안에서 다섯 사람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으니.
“흐아암!”
“뭐야, 벌써 도착했어?”
“생각보다 빨리 왔군.”
“배고프다.”
“고생했어. 율리아.”
어기적어기적 수레에서 기어 나오는 이들을 보고 율리아가 숨을 할딱거렸다.
“여, 연속 세 번은 너무 힘들다고! 있잖아, 유리… 우리 돈도 많은 데 말 좀 사면 안 될까?”
“말보다 힘 좋고 빠른 사람이 여섯이나 있는데, 굳이 말이 필요한가?”
어림도 없다는 뜻.
씨알도 먹히지 않는 유리의 반응에 율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우우…….”
베오그라드를 떠난 지 3개월.
그간 소월 용병단과 함께하며 율리아는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보상 많이 받아 왔잖아! 돈도 많잖아! 그런데 왜 맨날 수레 타고 다니면서 노숙이냐고!’
마차도 아닌 수레를 타고 이동하는 건 그렇다 쳐도, 지난 석 달 동안 제대로 된 곳에서 잠을 자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그래도… 오늘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겠지?’
그런 기대를 품고 율리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프롬펠 행정구의 남부이자, 열대 기후의 영향을 받는 대수림의 초입.
수백 년간 그 땅을 지켜 온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풍스러운 저택을 둘러싼 담벼락은 담쟁이넝쿨에 뒤덮여 온통 초록빛이었으나.
하지만 거무튀튀한 쇠창살로 만들어진 입구는 마치 어제 만들어진 듯 말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쇠창살의 정중앙에 각인된 문장을 본 유리가 물었다.
“잘 찾아온 게 맞아?”
“맞아. 삼각형의 형태로 겹쳐진 3개의 원. 구름을 상징하는 레드너 가문의 문장이야.”
율리아의 확언에 유리가 목을 쭉 빼고 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엄청 조용하네.”
저택의 규모는 조금 큰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망해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진즉에 망한 거 아냐?’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저택은 상당히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상태.
‘일단 들어가 볼까?’
그리 생각한 유리가 철창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응?”
유리의 시선이 누군가와 마주쳤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뒤.
그곳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민 작은 소녀가 있었다.
“너, 여기 사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
낯선 이가 던진 질문에 아이는 황급히 다시 나무 뒤로 머리를 숨겼다.
그러고는 유리가 다시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그대로 뒤돌아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겠는가.
“…뭐냐, 저 꼬맹이는?”
이를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테레시아가 다가왔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일단 저 꼬맹이가 뛰어갔으니 다른 사람을 불러오든가 하겠지.”
“알았어, 일단 기다려 보자.”
“그럼, 시간 난 김에 묻는 건데, 메이 윈체스터…….”
“고모님?”
“그래, 네 고모 되는 사람은 왜 레드너 가문에 있던 거냐?”
유리의 물음에 테레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너도 몰라?”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셔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거든. 내가 집을 나와서 애니스톤 가문에 머물게 된 건 고모님의 추천 덕분이었지만, 그 뒤로는 나도 뵌 적이 딱 두 번뿐이야.”
그중 한 번은 베오그라드 전쟁이 터지기 전, 울리 지클리를 만나러 가라는 심부름을 시켰을 때며.
나머지 한 번은 전쟁이 끝나고 산군으로부터 유리를 구해 줬을 때였다.
‘그런 메이 윈체스터가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라.’
대체 왜?
유리가 그런 고민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오? 누가 온다!”
쇠창살에 바짝 붙어 있던 아린이 저 멀리서 나타난 이를 보고 소리쳤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는 회색빛 머리카락을 한 중년 사내였다.
그는 출입구에 다다른 뒤 유리 일행을 보고 환히 미소 지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테레시아를 보고 미소 지었다는 게 옳았다.
끼익- 쿵-!
유리 일행을 가로막고 있던 쇠문이 열리고.
“테레시아 윈체스터 양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하하, 확실히 그분을 똑 닮으셨군요. 자매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그분이라시면… 저희 고모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메이 윈체스터, 그분을 이야기한 겁니다.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 리오 레드너라고 합니다. 편하게 리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리오님. 그런데 혹시 저희 고모님께서는…….”
테레시아의 물음에 리오가 슬쩍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나누시죠. 다른 분들도 따라 들어오시고요.”
그리 말한 리오가 먼저 앞장서자 유리 일행이 그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어느 한 독채.
그 안에서 테레시아를 마주한 리오가 입을 열었다.
“메이 님한테 테레시아 양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를 기다리셨다고요?”
“메이 님께서 머지않아 당신의 조카분이 찾아올 테니 한동안만 데리고 있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리오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테레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씀은… 고모님이 여기에 안 계신다는 뜻입니까?”
테레시아의 물음에 리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도 오래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종종 기별 없이 찾아오셔선 하루 이틀씩 머무시다 사라지곤 하셨죠.”
“이런…….”
사람을 부른 당사자가 정작 자리에 있지도 않다니.
테레시아가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시죠. 떠나신 지 꽤 되었으니, 곧 머지않아 불쑥 나타나실 겁니다. 그 전까지는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머무시길.”
“…감사합니다.”
테레시아가 고개 숙이는 걸 본 리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 전까지 푹 쉬고 계시지요.”
그렇게 말을 마친 리오가 등을 돌려 별채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잠깐.”
나직한 목소리가 리오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어진 유리의 이야기가 리오를 돌려세웠으니.
“아직 이쪽은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데?”
“예?”
리오가 자신을 바라보자 유리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풀러 리오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이걸 왜……?”
오늘 처음 본 청년이 난데없이 왜 자신에게 검을 내민단 말인가.
그런 의문 어린 시선 속에 유리는 덤덤히 말했다.
“받아요.”
“…예?”
“레드너의 것을 되돌려주는 거니까.”
그 말에 그제야 검을 제대로 보게 된 리오.
“이건…….”
그러자 그의 눈에 담겨 있던 의문은 서서히 경악으로 바뀌어 갔고, 이내 홀린 듯이 양손으로 검을 건네받고 말았다.
철걱-.
양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거기다 손때 묻은 흔적까지.
“서, 설마?!”
작게 중얼거린 리오는 검을 뒤집어 가며 검파의 문양을 살폈다.
그러다 마침내 확신을 얻은 리오.
“당신…….”
그가 떨리는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외삼촌과는 어떤 관계십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