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3
42화. 용패갈이 (1)
시작의 숲이 오랜만에 거친 눈보라에 휩싸였다.
아직 해가 떠 있을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숲.
그 곳곳,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예비 기수들은 눈 폭풍이 그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달여간 지속된 생존 시험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달해 있는 대다수의 예비 기수들.
그런 상황에 날씨까지 요란하니 분위기가 처질 법도 했으나, 예상과 달리 예비 기수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바로 1월 1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비 기수들이 기다리는 건 신년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틀 뒤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숲에서 탈출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
예비 기수 대부분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요람의 50번째 기수가 된다!’
그건 곧 손에 잡힐 거 같은 희망이었다.
그 눈앞에 놓인 희망에 예비 기수들이 서서히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그날.
사선으로 쏟아지는 눈보라에 섞여 절망이 찾아들었다.
* * *
하늘을 가린 먹구름으로 인해 어둠이 내려앉은 시작의 숲.
휘오오오-.
눈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칠흑 속, 엉성하게 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움막으로부터 미약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실상 눈으로 만든 집에 가까운 허술한 움막이었지만, 차디찬 바람을 막기에는 충분한 보금자리였다.
그 안에 쪼그리고 앉은 데니스 웨인은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빌어먹을 날씨는 어떻게 된 게 끝까지 난리냐.”
그리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는 내심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처음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불을 피우는 법도 모르고, 식량도 구하지 못해 몇 날 며칠 동안 차디찬 눈만 삼키며 버텼던 초창기.
그때에 비하면 작은 움막과 모닥불이 있는 지금의 상황은 가히 혁신이라 칭해도 이상치 않았다.
‘이게 다 상점 덕분이야!’
포기를 결심하고 종을 치기 위해 가던 중 만나게 된 상점.
그곳에서 먹은 토사바의 맛은 정말이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이 받은 은화를 전부 소진해 버렸지만,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얻은 하나의 토사바로 인해, 난 다시 버텨 낼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용기와 희망을 얻은 데니스는 자신처럼 포기하려던 다른 사람들을 꾸준히 상점으로 인도했다.
‘좋은 건 나눠야지, 아암!’
물론 그 덕분에 자신에게 아주 약간의 식량과 부싯돌 등의 이득이 떨어지게 됐지만…….
‘결국 그들도 내 덕분에 상점을 빨리 알게 됐으니… 뭐, 서로서로 좋은 일 아니었겠어?’
다른 사람을 팔아먹은 사실을 적당히 합리화한 데니스는 다시금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그는 나직이 한탄했다.
“하,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는 건지.
남은 이틀이 2년처럼 느껴졌다.
“하아아…….”
데니스의 짙은 한숨이 추운 날씨 속에 새하얀 김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찰나.
“응?”
데니스는 저 멀리,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데니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게… 뭐지?’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흐음……?’
옅은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는 검은 무언가.
그 움직임이 점차 커졌고.
“어?!”
이내 거센 눈보라를 뚫고 데니스가 있는 움막 쪽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그는 눈보라 속에서 움직이는 게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어어어?!”
놀란 데니스가 다급히 자신의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데니스의 반응보다 ‘검은 무언가’가 더욱 빨랐다.
슉-.
눈보라를 뚫고 솟구친 은빛 섬광.
이를 향해 데니스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우득-.
은빛 섬광과의 충돌 직후, 데니스는 검을 쥔 팔과 어깨에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무, 무슨 힘이?!’
단 한 번의 충돌.
그로 인해 데니스의 손아귀가 찢어졌고, 놓쳐 버린 검은 저 멀리 날아갔다.
동시에 은빛 섬광은 데니스의 볼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 그의 움막까지 반으로 갈라 버렸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10초 남짓.
할 일을 마친 은빛 섬광이 그제야 검의 형태로 변했다.
척-.
데니스는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검의 예기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털썩-.
움막이 날아가고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데니스가 피워 놨던 모닥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렸다.
그사이 데니스는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의문의 습격자를 볼 수 있었다.
‘흑검병?!’
상대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하지만 흑검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도 어려 보였다.
자신과 많아야 두어 살 차이가 날 정도?
거기다 남자가 걸친 검은 옷은 자신이 입은 것과 같았다.
‘예비 기수?’
하지만 그 또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기수들과 같은 옷이었지만, 한 가지가 달랐으니까.
‘저건… 견장이잖아?’
남자의 어깨에 있는 노란색의 견장.
그 어떤 예비 기수도 사내처럼 견장을 차고 있는 이는 없었다.
주륵-.
주저앉은 데니스의 볼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어 눈빛보다 더 냉랭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쓰레기 같은 실력, 까 보나 마나 황룡패겠네.”
그리 말한 순간 남자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휘시시식-.
날카로운 파공음을 낸 검은 데니스의 전신을 누비며 옷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날카로운 살기에 데니스는 그대로 얼어붙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덜그럭-.
데니스의 옷 속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걸려들었고.
“이거군.”
이에 남자의 검 끝이 그것을 튕겨 올렸다.
‘어?!’
데니스는 바로 눈앞으로 솟구친 자신의 황룡패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인지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싶을 정도로 온 신경이 황룡패에 집중됐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황룡패로 날아드는 은빛 섬광을 인지할 수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점차 가까워지는 황룡패와 검.
그리고 마침내 황룡패에 은빛 칼날이 닿은 순간.
‘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한 데니스는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다.
쉬쉬쉭-.
‘아, 안 돼!’
하지만 그런 절규에도 습격자는 데니스의 황룡패를 무참히 도륙 냈다.
서석- 서걱-.
구리로 만들어진 황룡패가 나뭇조각처럼 손쉽게 잘려 나갔다.
공중에서 총 4번의 검격이 이어졌고.
투툭-.
바닥에 떨어진 황룡패는 무려 8조각이 되어 있었다.
“아…….”
데니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용패 조각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내… 내… 용패가?!’
시작의 숲에서 용패는 목숨과 같았다.
그런 용패가 조각났다는 건 데니스의 목숨도 조각났다는 의미.
‘이렇게… 이렇게 끝이라고?’
내가 한 달을 어떻게 버텼는데?
이제 이틀만 더 버티면 되는 건데?
이틀 뒤면 나도 요람의 기수가 되는 건데?
손에 잡힐 거리까지 다가왔던 희망이 완벽히 증발해 버렸다.
심지에 코앞에서 용패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았으니 그 절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안 돼… 안 돼애애애!”
이번에는 육성으로 절규를 내지른 데니스는 널브러진 황룡패 조각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러모았다.
그사이 데니스를 이리저리 살피던 습격자는 눈을 찌푸렸다.
“쳇, 개털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습격자.
그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니스를 향해 냉랭하게 일갈했다.
“당장 꺼져라. 너 같은 건 내 후배가 될 자격이 없다. 버러지 같은 놈.”
잔혹한 말을 남기고 습격자는 떠나갔다.
잠시 뒤,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린 데니스는 습격자가 남기고 간 말을 작게 되뇌었다.
“후… 배?”
그는 물기 서린 눈으로 습격자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응시했다.
* * *
시작의 숲 곳곳에서 예비 기수들의 절망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각.
단 한 명만이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으니.
“헤헷, 헤헤헤! 난 부자다!”
짤랑짤랑-.
묵직하게 부풀어 오른 천 주머니에 볼을 부비는 유리의 얼굴은 마치 배부른 고양이 같아 보였다.
그런 유리의 뒤편.
은신처 한쪽에 가득 쌓여 있던 비축품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견고하게 만들어진 나무 상자였다.
그 속에 자신이 껴안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주머니가 2개 더 들어 있다는 건 유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 이 묵직한 느낌… 너무 좋잖아?”
비록 진짜 화폐는 아니지만, 살면서 이 정도의 은화를 가져 본 적이 없었기에 유리는 대리 만족을 느끼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이게 진짜 골드였으면…….’
이번 일을 통해 유리가 모은 은화의 총합은 20만이 넘어갔다.
거기에 원래 유리가 가지고 있던 10만 은화까지.
이게 만약 진짜 골드였다면 무려 30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던 유리의 눈에 살짝 아쉬움이 깃들었다.
‘그 많은 예비 기수들의 은화를 쓸어 담았는데 고작 23만 은화라…….’
은화에 새겨진 숫자의 비밀.
그건 유리가 예측했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에 속했었다.
바로 요람에 들어온 방식에 따라 주머니 속 은화의 숫자가 달라진 것.
기부 추천으로 들어온 황룡패는 500.
은룡패주의 추천을 받은 예비 기수는 3,000.
금룡패주의 추천을 받은 예비 기수는 10,000.
‘백룡패 추천을 받은 사람은 확인 못 했지만… 대충 3만에서 5만 정도 되겠지.’
다시 말해 자신이 10만이나 되는 은화를 받은 건 흑룡패주인 요한에게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한 덕분에 받게 된 10만의 은화는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503명 중 삼십여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내 상점을 이용하지 않은 이는 없었어.’
심지어 황룡패를 지닌 사람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상점을 이용해 물건을 구매했다.
그 과정에서 황룡패에게 풀린 은화 95% 이상이 유리의 것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는데도 23만 은화인 거다.
유리 혼자서 받은 게 10만 은화인데.
“나 참… 이런 걸로 영감 덕을 보게 될 줄이야.”
만약 정말 예상대로 이 독특한 은화가 요람에서 화폐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영감이 계속 생색냈던 거 용서해 줄게.’
유리의 머릿속으로 ‘네놈이 미친 게야? 그 귀한 용패를 그냥 날려 먹게!’라며 땍땍거리던 요한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딸그락-.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유리의 표정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행복감은 온데간데없고 냉랭하게 굳어진 유리의 얼굴.
그는 옆에 있던 검을 들고 신속하게 일어났다.
‘침입자.’
빠르게 판단을 내린 유리는 지난번 애꾸눈 사내가 왔을 때처럼 행동했다.
모닥불을 끄고 장작 두어 개를 통로 쪽으로 내던진 그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눈이 어느 정도 암순응을 마친 순간.
유리는 통로 쪽을 노려보며 귀를 기울였다.
딱!- 캉!
‘함정은 제대로 작동했다.’
지난번 애꾸눈 사내의 습격 이후 유리는 그 일을 교훈 삼아 은신처의 함정을 다시 손봤다.
그 결과가 지금 들려오는 저 소리였다.
딱- 챙- 딸그락-.
통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
어차피 침입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위력을 더 낮추더라도 확실하게 신호음이 나게끔 함정의 목적을 바꾼 것이다.
딱- 딱- 챙!
점차 그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에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실력은 어느 정도 있는 놈이다.’
하지만 자신이 설치한 함정을 무시할 정도는 아닌 듯, 함정을 돌파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유리는 눈을 감았다.
그는 좀 더 소리에 집중하며 자신이 설치한 함정들의 위치를 그려 보았다.
그러자 유리의 머릿속에 나타난 입체적인 함정 지도.
챙- 캉- 쿵!
유리가 떠올린 함정 지도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가 섞여들었고.
‘소리로 보아 침입자는 한 명, 현재 위치는 아직 통로의 초입.’
곧 한 명의 침입자가 함정을 피해 날뛰는 모습이 생생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딱- 덜그럭-.
이 소리가 어디에 설치해 둔 함정이 발동하며 내는 소리인지.
챙-.
그걸 침입자가 막거나 쳐 낸 시간과 방식이 어떠한지 등등.
유리는 들려오는 소리를 완벽하게 분석해 내며 침입자의 실력을 유추했다.
그렇게 거의 함정 대부분이 파괴되어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 즈음.
침입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을 끝낸 유리가 슬며시 눈을 떴다.
동시에.
시익-.
어둠 속에서 붉은 입술이 비딱하게 뒤틀리며 작은 보조개를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