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38
이 싸움을 끝내러 왔다 438화(438/445)
438화. 백철 (2)
“팔찌?”
도철의 질문에 그제야 팔찌를 의식하게 된 유리.
그가 눈을 끔뻑였다.
팔찌는 블레어 이스카리오를 죽이고 그의 비밀 금고에서 얻은 것이었다.
차고 있으면 은은한 꽃향기가 나기에 계속해서 몸에 차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아, 이거?”
순간 아무 생각 없이 훔쳤다고 답하려던 유리.
그가 속으로 흠칫하며 말을 바꿨다.
“…주웠어.”
안 그래도 자신의 평판이 저점을 찍은 마당에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이라고 했다간 어찌 되겠는가.
그리고 그런 유리의 거짓말에 도철의 눈매가 게슴츠레 변했다.
“주웠다고? 이걸?”
“응.”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진짠데? 월루가 알려 줘서 주운 건데?”
“월루가 알려 주었다?”
“어, 지난번처럼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거 떨어진 곳까지 안내하더라고. 아니, 사실 월루가 튀어나온 건 그때가 최초였지.”
“흠…….”
원래 거짓은 진실 속에 숨겨야 하는 법.
진실과 거짓이 적절히 섞인 유리의 이야기에 도철의 의심 가득했던 눈매가 서서히 풀렸다.
지난번에 월루가 튀어나온 걸 지척에서 본 그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유리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이게 뭔데? 아는 팔찌야?”
“그 팔찌를 뺐다가 다시 껴 봐라.”
유리는 도철이 시키는 대로 팔찌를 뺐다가 다시 꼈다.
뺐을 땐 늘어났던 팔찌가 다시 유리의 팔에 맞게 줄어드는 것을 본 도철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역시…….”
도철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유리의 눈이 살짝 초롱초롱해졌다.
저건 분명 건 놀람의 표시였다.
워커 학파의 마이스터가 이리 놀랄 정도라면 분명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일 터.
그리고 유리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뭔데 이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팔찌는 고대 엘프의 것이다.”
“……?!”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의 팔찌라고?’
어느 시골 농가의 아이들이 나무줄기를 장난삼아 꼬아 만든 것 같은 이 팔찌가?
월루가 어떻게든 챙기라고 하도 칭얼대서 무언가 내막이 있으리라 여기긴 했지만, 설마 엘프의 팔찌일 줄이야.
유리가 신기하다는 듯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철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나무줄기와 머리카락을 섞어 꼬아 만든 팔찌는 고대 엘프의 전통 방식이다.”
이에 유리가 반문했다.
“그럼 누가 그냥 흉내 내서 만든 걸 수도 있는 거네?”
“형태는 흉내 낼 수 있을지언정 재료만큼은 흉내 낼 수 없지.”
“재료? 그냥 나무줄기 아냐?”
“쯧, 이렇게 무식한 놈한테 이런 보물이 가당키나 한 건지.”
“욕 말고 설명을 해 주세요.”
“에라이, 평범한 나무줄기가 그렇게 자유자재로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법도 있는 마당에 마법 걸린 나무줄기가 있을 수도 있지.”
“애당초 마법에 걸린 나무줄기를 어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거냐?”
“아, 그렇네.”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되물었다.
“그래서 이거 재료가 뭔데?”
“나야 모르지.”
유리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마치 나랑 장난치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 도철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프의 장신구는 그들이 손수 돌본 나무로 만들기에 그 재료 역시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그게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내 어찌 알겠느냐.”
“뭐야, 자기도 모르면서 날 욕한 거야?”
“다만 내 예상대로 그게 진짜 엘프의 팔찌라면 족히 천 년 이상 된 물건이다. 그 긴 세월을 버텨 냈으니 범상찮은 재료로 만든 팔찌임이 틀림없을 거다.”
“쯧, 그 정도는 나도 설명할 수 있겠다.”
유리는 툴툴거리면서도 다시 팔찌를 어루만졌다.
‘정말 엘프의 팔찌일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자동으로 크기를 조절하는 것부터 꽃향기를 풍기는 성능.
블레어 이스카리오가 다른 귀중품과 함께 비밀 금고에 숨겨 놓은 정황.
그 모든 조건이 팔찌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가리켰지만, 가장 확실한 큰 심증이 되어 주는 건 월루가 보였던 반응이었다.
‘블레어와 있었던 모든 일이 전부 이것 때문이었지.’
블레어와의 만남은 월루가 이 팔찌에게 자신을 안내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에는 잠잠하던 월루가 갑자기 난리를 치는 경우.
그건 분명 무언가 중요한 비밀과 얽혀 있다는 게 이번 월왕의 유해 사건으로 밝혀진바.
하여 이 팔찌가 엘프의 것이란 도철의 말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았고, 유리는 거기에 한 가지 가능성을 더했다.
‘어쩌면 이 팔찌… 월루와 인연이 있는 엘프의 팔찌일지도 모른다.’
그리 가정한 순간, 유리의 뇌리로 한 엘프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팔찌를 처음 팔에 찼을 당시, 월루에게서 전해진 여러 감정이 재차 떠올랐다.
안도.
환희.
서글픔.
당시 녀석에게서는 분명 그런 감정이 느껴졌었다.
‘만약 그 감정이 이 팔찌의 주인을 향한 것이라면…….’
환영 속 월왕을 슬프게 쓰다듬던 엘프 여인과 팔찌가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유리는 확신했다.
‘그럼 이 팔찌는 왜 블레어에게 있었던 거지?’
단순히 우연히 손에 넣은 걸까?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는 걸까?
여러 경우가 떠올랐지만, 유리는 그만 생각을 정리했다.
‘그만.’
정확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상은 그저 망상일 뿐.
그리고 이는 분명 독으로 작용할 거다.
‘나중에… 좀 더 명확한 무언가가 나타날 때까지는 미뤄 두자.’
잊자는 게 아니다.
정확한 연결 고리가 나타날 때까지만 잠시 고민을 미루자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유리는 계속해서 팔찌를 어루만졌다.
***
사흘 전.
[제법 실력 있는 놈이 만든 녀석이로군. 흠, 차라리 이 녀석을 쓰는 게 네놈 기운과 잘 맞겠어. 따로 길들일 필요도 없고 말야.]그 말과 함께 도철은 유리에게서 부러진 백강철검을 받아 갔고, 벌써 3일째 단련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땅-! 땅-! 땅-!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두들겨질 때마다 후끈한 열기를 머금은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멀찍이 떨어져 그 파장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유리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미친 수준이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달군 쇳덩이를 두들기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경에게 야금술을 배운 유리는 알아보았다.
‘광성극화술(鑛性極化術).’
과거 요람 시절, 세경과 유리가 한 내기에서 나온 세 번째 과제.
또한, 금속이 지닌 본연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워커 학파의 비기였다.
도철은 바로 그 비기를 무려 사흘간 내리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유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스터는… 마이스터라는 건가.’
도철은 골족으로서도 그리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런 노구로 사흘이나 광성극화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모자란 체력을 기술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또한, 도철이 어째서 워커 학파 최고의 장인이라 손꼽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땅- 땅- 땅-!
도철과 혼연일체가 된 망치가 시뻘건 백강철을 두들길 때마다 유리는 마나 핵에서 기분 좋은 울림을 느꼈다.
두근- 두근-.
‘다르다.’
세경이 광성극화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 역시 광성극화술을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도철의 광성극화술은 자신과 세경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과 세경의 망치질에서 들리는 소리가 강제로 각성을 겪는 금속이 내지르는 고통 어린 비명이라면.
도철의 망치가 닿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에는 기쁨과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근두근-.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진 유리는 대장간의 한쪽 구석에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지난 사흘간 메이와 나눈 논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간 메이와 나눈 논투는 유리에게 꽤 도움이 되었다.
수를 떠올리는 속도.
또한, 수와 수를 연결하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하지만 아직 이 논투에서 메이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자신이 이것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역시 나랑은 안 맞는 방식인가?’
메이처럼 논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논투를 한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터.
유리는 어쩌면 자신이 그 후자에 속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른 녀석들은 신났던데… 나만 빼고.’
지난 사흘간 이어진 메이와 유리의 논투에서 많은 것을 얻은 이들은, 논투의 당사자인 유리가 아닌 이를 옆에서 주워들은 다른 친구들이었다.
메이의 일대일 맞춤 대련과 수준 높은 논투를 매일 들은 덕분에 그들의 실력은 정말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유리가 보기에 테레시아, 군터, 아린, 뽀삐는 조만간 공인 5단의 벽을 넘을 듯싶었다.
‘이거 뭔가 당한 느낌인데?’
이게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논투인지.
아니면 다른 녀석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논투인지 헷갈릴 지경.
때문에 유리는 늘 논투가 끝나면 도철의 대장간을 찾았다.
자신에게 맞는 깨달음의 방식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도철도 유리를 계속 내쫓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막아도 기어들어 오는 유리의 모습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도철은 유리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작업에 들어갔다.
덕분에 투명 인간 대접을 받는 유리는 아주 편하게 도철의 대장간을 이용할 수 있었다.
스륵-.
오늘도 아무런 소득 없이 논투의 복기를 마친 유리는 살그머니 일어나 한쪽으로 향했다.
그가 멈춰 선 건 나무 상자의 앞.
덜컥-.
익숙하게 상자를 연 유리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백철을 바라보았다.
“흠…….”
사실 유리가 대장간을 자주 찾는 이유는 도철이 휘두르는 망치 소리에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백철 때문이었다.
‘마음이라…….’
도철은 분명 그리 말했었다.
드워프의 왕이 마음을 담아 두들긴 탓에 일반 철이 새하얗게 변했음은 물론이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마음이 이 백철 속에 담겨 남아 있다고.
유리는 그 말을 되새기며 턱을 쓰다듬었다.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대체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유리는 한번 그 마음을 느껴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며칠째 도철의 대장간을 찾는 중이었다.
“흐음.”
작게 침음하며 백철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린 유리.
이 각도 저 각도로 뒤집어 가며 살펴보고.
냄새도 맡아 보고, 두드려도 보고.
마나를 넣어도 보고.
마류로 파장을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도무지 뭐가 다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흐으으음…….”
이번에는 조금 길게 침음을 흘린 유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도철을 바라보았다.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그를 흘끗거리고는 유리는 고민을 시작했다.
‘천 년 묵은 쇳독… 괜찮을까?’
조화신수를 먹은 뒤로 어지간한 독에 면역이 생긴 유리였지만, 과연 천 년 묵은 쇳독까지 조화신수가 막아 줄지는 그도 미지수였다.
꽤 오랜 시간 갈팡질팡하던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린 유리.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스륵-.
살짝 혀를 내민 그가 혀끝을 서서히 백철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핥짝-.
* * *
땅- 땅-!
강하게 내려치던 도철의 망치질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멈춘 도철이 허리를 두들겼다.
“어그그.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구먼.”
고작 사흘이 아니라 칠주야 동안 망치를 휘둘러도 멀쩡했던 몸이 비명을 내지르다니.
세월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지는 도철이었다.
툭툭-.
그렇게 허리를 주무르던 도철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백철을 코앞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는 유리가 있었다.
백철에 정신이 팔린 듯 얼빠진 그 모습에 도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모자란 놈.”
요 며칠 자신의 대장간을 안방처럼 들락거리는 유리를 도철이 그냥 내버려 둔 이유.
그건 유리가 아무리 내쫓아도 다시 기어들어 오기에 포기한 것도 있었지만, 그가 딱히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 사흘간 유리가 한 거라고는 그저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정좌한 채 눈을 감거나, 지금처럼 뚫어져라 백철을 바라보는 것뿐.
자신이 말한 ‘백철의 마음’을 느껴 보겠다나 뭐라나.
그런 유리의 이야기를 떠올린 도철은 코웃음을 쳤다.
“쯧쯧, 그게 아무나 되는 거겠냐.”
도철이 그리 비웃을 때였다.
핥짝-.
유리가 백철을 핥는 걸 보고 도철의 미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다 그의 얼굴에 작은 감탄이 서렸다.
“허… 저 미친놈.”
아무리 쇳덩이와 물고 빨고 동고동락하며 평생을 보내야 그 안에 비로소 마음 한 자락을 담을 수 있게 된다지만.
그 경지에 오른 자신조차 천 년 묵은 쇳덩이를 핥을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그런 미친 발상을 한 것도 모자라 직접 실행에 옮긴 유리에게 도철은 서슴없이 엄지를 치켜올려 주었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잘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다가 생각에 잠긴 유리의 옆통수를 보며 도철은 피식거렸다.
“어림없다, 이놈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룬 걸 제깟 놈이 쇠 맛 좀 봤다고 느낄 수 있을 성싶으냐.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거였으면 내 당장 네놈에게 마이스터 자리를 내주고 말지.”
도철이 유리를 보며 그리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우웅-.
“…엉?”
갑자기 유리에게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이 도철의 얼빠진 얼굴을 환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