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51
50화. 특별 할인 판매점 (2)
순식간에 이뤄진 유리의 태세 전환에 애꾸눈 사내는 물론 주변의 흑검병까지 모두 눈만 끔뻑였다.
고요한 적막 속.
모두를 대표해 애꾸눈 사내가 물었다.
“…고민조차 없는 거냐?”
“떠먹여 주다시피 하는 기회를 내뱉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배가 부르지도 않아서요.”
“낯짝도 두껍군.”
“자꾸 그렇게 칭찬하시면 좀… 부끄러운데요.”
“…….”
정말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유리는 보며 애꾸눈 사내는 말을 아꼈다.
그사이 유리는 너무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굽신거렸다.
“물건을 반납하려면 조금 이동해야 하는데… 어찌, 숨긴 곳으로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라.”
원래라면 이런 일의 마무리는 그냥 밑의 수하들이 처리할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 요물이 대체 어디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는지.
훔친 포인트를 어디다 숨겼는지 말이다.
때문에 애꾸눈 사내는 쫄래쫄래 움직이는 유리를 따라 걸었다.
그 뒤로 흑검병 열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유리를 필두로 한 무리가 이동한 장소는 주둔지에서 꽤 떨어진 물가였다.
그곳에 도착하기 무섭게 유리는 말릴 틈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 그는 순식간에 고개를 처박고 잠수해 들어갔다.
잠시 후.
보글보글-.
작은 물거품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유리.
낑낑거리며 물 밖으로 나오는 그의 손에 밧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읏차!”
뭍에 올라 작은 기합성을 낸 유리가 밧줄을 잡아당기니 거기에 엮인 물건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를 본 애꾸눈과 흑검병들은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허…….”
애꾸눈 사내의 옅은 탄식.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도난당한 게 포인트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밧줄에 엮여 줄기줄기 끌려 나오는 것은 포인트만이 아니었다.
흑검병의 것으로 보이는 옷.
각종 장화는 물론 수통, 우의, 허리띠, 모자 등등.
심지어 1개씩도 아니고 물건별로 여러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엮여 나오자 애꾸눈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벽 없다고 하지 않았냐?”
“에이, 이건 훔친 게 아니죠.”
“그럼?”
“전리품을 취한 걸 보통 훔쳤다고 표현하지는 않잖아요?”
“…….”
“아, 그리고 분명 훔친… 아니, 얻은 전리품의 절반은 가져갈 수 있게 해 준댔죠?”
“…….”
사람이 이 정도로 뻔뻔하면 되레 당하는 사람도 인정하게 되는 법이었다.
도무지 이건 갱생의 여지가 없는 놈이라고.
작게 한숨을 내쉰 애꾸눈 사내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희희낙락거리는 유리를 보고 애꾸눈 사내는 수하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제오늘 주둔지 경계를 선 놈들 전부 경위서 제출하라고 해라.”
“예…….”
수하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최소한의 인원은 주둔지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한데 유리라는 녀석은 그 주둔지를 제집 안방처럼 헤집고 다니며 온갖 물건들을 긁어모은 것이다.
그제야 애꾸눈 사내는 머릿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허, 그랬었지…….’
과거, 운룡이라 불리던 요한 레드너.
그에게 운룡이란 칭호를 만들어 준, 레드너 가문의 절기 운보를 일컫던 또 다른 별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유령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다고 하여 유령보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오히려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왜 잡힌 거냐? 네놈 능력이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 그거요? 제가 원래 맛있는 거는 가장 마지막에 먹는 편이거든요?”
“……?”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일 비싸고 좋아 보이는 곳만 마저 털고 끝내려고 했는데…….”
“…했는데?”
“뭐가 있어야 털지, 높은 분 막사라 비싼 보급품이 있을 줄 알았더니 뭔 이상한 종이 쪼가리만 잔뜩 있고. 그래서 더 찾기도 뭐하고 시간도 애매해서 그냥 나오다가… 하필 딱 저 흑검병 아저씨랑 눈이 마주쳐 버렸지 뭐예요.”
“…….”
“덕분에 함부로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죠.”
“…….”
“운만 좋았어도 좀 더 털 수 있었을 텐데… 쳇, 재수가 없으려니까.”
…앞뒤 말이 다르잖아, 이 새끼야.
그러니까 운만 좋았으면 좀 더 과욕을 부렸을 거란 이 말이냐?
“앞으로는 그날 운수 좀 점쳐 보고 욕심을 부리든가 해야겠어요.”
“…진짜였군.”
“네?”
“아니다.”
애꾸눈 사내는 그제야 인정했다.
자신이 유리 홀랜드란 놈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이 녀석은 무슨 의도가 있어서 내 막사를 안 턴 게 아니라, 그냥 털 게 없어서 맨손으로 나온 거였어.’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애꾸눈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저거 잡은 놈… 누구라고?”
그 물음에 한 흑검병이 앞으로 나서며 관등 성명을 댔다.
“흑검병단 21조 소속……!”
“됐고. 너 휴가 가라.”
“…예?”
“포상 휴가다. 9박 10일.”
“가, 감사합니다!”
“잡을 때 팔다리라도 부러뜨렸다면 9박이 아니라 30박이라도 보내 줬을 텐데, 쯧.”
“……?!”
“그리고 저 녀석… 음?”
인상을 쓰고 유리를 바라보던 그가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기운이 크게 늘었군?’
그가 유리를 다시 본 건 그 동굴 속에서 이후 20여 일만이었다.
난데없이 녀석이 자신의 막사에서 잡혀 온 상황에 놀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지금 녀석의 마나가 그때 당시에 비해 크게 늘어난 상태란 걸 말이다.
‘어디서 영약이라도 주워 먹고 온 건가?’
그렇지 않다면 단기간에 저 정도로 마나가 늘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하긴 시작의 숲이 생겨난 지 오래됐으니 영약 한두 개쯤 굴러다닐 법도 하지.’
그리고 저 녀석이라면 분명 어디서 그걸 주워 먹고 왔다고 해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그가 아무런 말 없이 유리를 바라보던 순간.
“부단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애꾸눈이 다시금 손을 내저었다.
“저 녀석이 훔친 포인트는 절반을 가져갈 수 있게 해 줘라. 단, 그 외에 훔친 물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절반으로 잘라서 내줘라.”
“엥? 아니, 그, 그런 게 어딨습니까?!”
터무니없는 명령에 유리가 반발했지만, 애꾸눈 사내는 조소 지을 뿐이었다.
“난 분명 절반을 내어 준다고 했다. 사과 4개 중 2개여도 절반이고, 반쪽짜리 4개여도 절반 아니냐? 무슨 문제라도?”
“와…….”
“포인트라도 온전히 가져갈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마음 같아서는 그것도 전부 반으로 쪼개서 던져 주고 싶으니.”
“…….”
“쯧.”
작게 혀를 찬 애꾸눈 사내는 그렇게 떠나갔다.
그리고 그가 남긴 명령을 흑검병들은 충실하게 이행했다.
스걱- 스걱-.
유리가 도토리 모으듯 열심히 모은 물건들이 그가 보는 앞에서 정확히 반으로 잘려 나갔다.
그로부터 잠시 뒤.
훌쩍-.
두 쪽 난 물건들을 알뜰살뜰 주섬주섬 챙긴 유리는 다른 50기 들과 같이 흑선에 올랐다.
그렇게 유리와 300명의 생존자를 태운 배가…….
뿌우웅-.
긴 나팔 소리를 내며 선착장을 떠나갔다.
요람의 본토를 향해.
* * *
흑선의 갑판, 구석진 자리.
“으그그그-.”
길게 기지개를 켠 유리가 어깨를 토닥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나같이 마음 여린 사람한테는 남 등쳐 먹는 일 따윈 적성에 안 맞아. 고되다, 고되.”
유리는 알까?
입으로는 ‘고되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반들반들 빛나고 있다는 걸?
툭툭-.
뭉치지도 않은 어깨를 툭툭 토닥이던 유리 아쉽다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에잉, 쪼잔한 인간.’
반으로 쪼개진 물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덕분에 그가 욕한 쪼잔한 인간이 누구인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주기로 한 거였으면 시원하게 내줄 것이지. 그걸 또 반으로 쪼개고 있네.’
유리의 머릿속, 애꾸눈 사내에 관한 정보에 ‘뒤끝 있는 쪼잔한 성격’이라는 항목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뭐, 포인트도 제법 챙겼고, 나머지 물건도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
흑검병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으로 자르라는 명령을 어찌나 충실히 이행했던지, 물건들은 깔끔하게 반토막 나 있었다.
덕분에 약간의 수선만 한다면 어찌어찌 사용이 가능할 듯싶었다.
‘평소였다면 그래도 이 정도까지 궁상맞은 짓을 하진 않았겠지만…….’
그러나 본토를 다녀온 입장에서 조금은 궁상맞을지라도, 챙길 수 있을 때 챙겨 두는 것이 좋다는 게 유리의 판단이었다.
본토를 떠올리던 유리의 고개가 살짝 수그러졌다.
그리고.
“후후… 후후후.”
옅은 웃음소리가 깔림과 동시에 머리카락 사이에 감춰진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흐흐흐흐.”
원래라면 유리는 지금 시작의 숲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시작의 숲을 벗어나는 게 탈락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다시 돌아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요람 본토에서 짜잔- 하고 나타나서 합류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이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 완전히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기존의 계획을 파기하고 새로운 계획을 짠 것이다.
그로 인해 시작의 숲과 요람 본토를 왕복하는 개고생을 하게 된 유리.
“…너, 이 변태 난봉꾼 새끼, 딱 기다려라.”
그의 잇새로 묘한 흥분 담긴 목소리가 흐른 순간.
유리가 품은 기억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12월 31일 03시 무렵.
촤하아악-.
파도가 몰아치는 모래사장.
그 새하얀 모래 위로 젖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백사장에서 시작된 발자국은 인근의 숲으로 이어졌고, 그 끝에 한 인영이 드러났다.
쫘아악-.
속옷 차림으로 젖은 옷의 수분을 짜내는 이는 다름 아닌 유리였다.
팡-!
적당히 물기를 털어 낸 옷을 다시 주섬주섬 껴입은 그는 하늘을 올려 보았다.
곧 유리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쩐지 육지가 드럽게 안 나오더라니, 방향을 잘 못 잡았었네.”
유리가 시작의 숲을 떠난 건 7시간 전.
그 시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헤엄쳤다.
일반 배보다 몇 배나 빠른 헤엄 속도라면 하루 거리쯤은 진즉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을 터.
하지만 중간에 발생한 기상 악화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먹구름만 안 끼었어도.’
물길을 반쯤 건넜을 때, 다시금 눈 폭풍이 몰아치며 하늘을 가려 버렸다.
때문에 별자리로 방향을 가늠하던 유리는 감에 의존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중간에 다시 날이 개어 방향을 수정하였을 땐 이미 상당히 방향이 틀어진 뒤였다.
그 결과 유리는 원래 예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고 말았다.
‘여긴 어디쯤이려나?’
검주에 의해 탄생한 인공섬, 용의 요람.
제리의 설명에 의하면 본토는 그 모양새부터 남달랐다.
거대한 타원 형태의 땅을 물줄기가 X자로 가로질러, 정확히 4등분 하는 구조.
용의 요람은 어지간한 영지보다 큰 동서남북 4개의 섬과 물줄기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 중앙 섬, 그렇게 총 5개의 섬으로 이뤄진 곳이라 했다.
그중 요람의 기수들이 머무는 곳은 북쪽의 섬, 일명 북도(北島)라 불리는 곳이었다.
원래 유리는 그 북도의 최북단에 도착해 남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리가 도착한 곳은…….
“쯧, 서쪽이네.”
대충 하늘을 보고 가늠해 본바,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북도의 서쪽 해안가였다.
‘서쪽이면 3년 차의 영역인데…….’
요람의 기수들이 살아가는 북도는 다시 중앙의 원형 경기장을 기점으로 4개의 영역으로 나뉜다고 했다.
1, 2년 차가 살아가는 북쪽 구역.
3년 차의 거주지가 있는 서쪽 구역.
4년 차의 거주지가 있는 동쪽 구역.
마지막으로 5년 차가 거주하는 남쪽 구역.
그걸 떠올린 유리는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졌네.’
지금 이 시각, 1년 차와 2년 차가 모조리 시작의 숲에 있기에 북쪽 구역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시 말해 본토 땅을 처음 와 본 유리가 활보하기 매우 편한 조건이란 뜻이었다.
반면, 3년 차와 4년 차의 영역인 서쪽과 동쪽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숨어 다녀야 하는 구역이었다.
그만큼 이동 시간이 느려질 터.
‘다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간 뒤, 남하할까?’
그것도 한 방법이었으나 시간상으로는 비슷비슷할 거라 생각되었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유리는 이곳 서쪽에서 중앙으로 향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나마 4년 차가 있는 동쪽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2년 차 수석이라는 테레시아의 실력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또한, 고작 은룡패에 불과한 제리의 실력도 그렇게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이 다시 1년을 버티고 성장하여 살아남은 게 바로 3년 차였다.
그들의 실력이 어떠할지는 미지수.
‘제리도 될 수 있으면 선배들의 영역은 안 들어가는 게 좋다고 했지.’
들어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면서.
그 말을 다시금 상기시킨 유리는 바짝 긴장하며 옆에 놓인 포인트 상자를 들쳐 멨다.
‘일단, 움직이자.’
1월 1일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20시간.
시간적 여유는 많았지만, 아무래도 낮보다는 새벽인 지금이 들키지 않고 움직이기 편했다.
‘지금부터 최대한 이동한 다음, 날이 밝기 전에 쉴 곳을 찾아봐야겠어.’
그런 계획을 세운 유리는 곧장 목적지인 중앙 구역이 있는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숲 깊숙이 들어선 유리.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유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누군가 온다!’
그는 곧장 가장 굵은 나무를 타고 올라 숨을 죽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건 1남 1녀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타난 두 사람이 정확히 유리가 올라선 나무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아……!”
돌연 여자의 손목을 잡아끈 남자가 그녀를 나무 쪽으로 밀쳤다.
턱-.
한 손을 나무에 기댄 남자는 다른 손으로 여자의 턱을 들어, 저돌적으로 입술을 들이댔다.
처음에는 살짝 놀란 듯싶던 여자도 이내 남자의 목을 팔로 감싸 안으며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본의 아니게 1등석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된 유리.
꼴깍-.
그의 목젖이 묘하게 꿀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