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52
51화. 특별 할인 판매점 (3)
‘오우야…….’
꼴깍꼴깍-.
고막을 때리는 침 삼키는 소리에 유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드, 들리진 않았겠지?’
다행히 이 소리는 자신에게만 들린 모양이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는 여전히 키스 삼매경이었다.
아니, 이제야 제대로 불이 붙은 건지 이전보다 더 격정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제 곧 열여섯이 될 사춘기 소년에게는 너무도 자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쪽쪽- 쪽-.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리에 유리는 애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듯 현기(賢氣)를 띠었다.
‘…용병 아저씨 말이 맞았구나.’
인생의 선배인 그가 그랬었다.
전쟁 통에도 아이는 생기는 법이라고.
‘그 난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애가 생기는 마당에, 피 끓는 청춘들이 모인 곳에서 연애 기류 한 번 안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젊고, 몸 좋고, 피 끓는 청춘.
심지어 가문까지 빵빵한 남녀를 한곳에 몰아넣었다.
막말로 너 죽고 나 살자며 칼질해 대다가도 ‘어멋! 이런 칼빵은 처음이야!’라며 눈이 맞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섭리라 할 수 있는 거겠지.’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깨달음을 얻은 유리의 눈에 현기가 짙어졌다.
쪽쪽쪽쪽-.
그 뒤로도 자극적인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이쯤 되면 입술이 너덜난 게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 때쯤 둘의 고개가 떨어졌다.
“하아…….”
“…….”
연인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저 낮은 숨소리와 그윽한 시선만이 오갈 뿐.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다 둘은 다시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그렇게 그들이 떠난 뒤.
풀썩-.
나무에서 내려온 유리는 두 연인이 떠나간 방향을 보며 므훗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은 구경했다.”
머쓱하게 검지로 코를 슥슥 문지른 그는 이내 므훗한 표정을 지워 내고 다시금 긴장을 끌어올렸다.
“가야지.”
동이 틀 때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때까지 최대한 움직여서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유리는 부지런히 다리를 놀렸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아간 방향에서 해가 떠올랐다.
* * *
12월 31일 17시 30분.
15시간 전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유리는 이제 해를 등지고 있었다.
잠시 몸을 돌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
마침내 태양이 온전히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내리깔리자 그가 기지개를 켰다.
“슬슬, 다시 움직여 볼까?”
유리는 동이 터 오르는 것을 보고 휴식을 취했다.
때문에 그는 아직 여전히 3년 차의 구역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
‘남은 시간은 6시간 정도인가?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어찌어찌 될 거 같네.’
제리의 설명에 의하면 1, 2년 차가 거주하는 북쪽 구역이 가장 넓다고 했다.
최북단에서 중앙 구역까지는 마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 할 정도.
다른 상위 기수들의 구역이 그것보다는 작다고 하니, 현재 유리의 속도라면 초행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맞을 듯싶었다.
‘물론 속단할 수 없으니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괜히 엄한 데 시간을 뺏겼다가는 지금까지 한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될 수 있으니 유리는 신중해졌다.
그는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숲속을 달려 나갔다.
바위와 개울을 뛰어넘고.
때론 넝쿨에 매달려 절벽과 나무를 기어오르며.
말과 마차는 가지 못할 길도 유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그 속도마저 어지간한 사람이 평지를 달리는 것보다 몇 배는 빨랐다.
그렇게 정동향, 최단 거리를 빠르게 주파하던 유리.
그의 움직임이 일순간 우뚝 멈췄다.
‘사람이다.’
주변을 빠르게 훑은 그는 인근의 거대한 나무로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쭈그려 앉은 유리는 그대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두 사람.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한 쌍의 남녀였다.
‘…응?’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탁-.
남자가 강하게 여자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를 나무로 밀쳤다.
그런데 하필, 또!
남자가 여자를 밀친 나무는 바로 유리가 올라탄 그 나무였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상황을 지켜보는 유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한쪽 팔을 나무에 기댄 남자가 여자의 턱을 들어 저돌적으로 입술을 들이대고.
‘어라?’
처음에 살짝 놀란 듯싶던 여자는 적극적으로 키스를 받아들이며 남자의 목에 두 팔을 휘감는 과정까지.
‘어라라?’
그 모든 과정을 감상하고 있던 유리의 얼굴 근육이 멍하니 풀렸다.
‘뭐냐, 이거… 데자뷔야?’
남녀의 등장에서 입맞춤까지의 상황.
이거 얼마 전에 본 거 같은데?
그리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던 유리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가만, 저 남자……?’
유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눈썰미는 정상이었다.
‘저 피멍 든 것 같은 보라색 대가리!’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금 열심히 키스해 대는 남자는 분명 몇 시간 전에 본 바로 그 자식이었다.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초록색의 견장과 살짝 곱슬기 있는 보라색의 머리카락은 분명 그놈이 확실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여자가 다르잖아?’
그가 입맞춤을 나누는 상대가 달라졌다는 것.
유리가 몇 시간 전에 본 여자는 분명 갈색 머리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밑에서 피멍 대가리와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누는 이는 옅은 금발이었다.
‘여자가 그사이 염색이라도 한 건가?’
물론 그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유리였다.
갈색 머리와 금발의 여인.
그들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둘의 견장도 달라.’
갈색 머리의 여자는 초록색의 견장.
그리고 금발 여인은 파란색 견장이었다.
‘초록색은 3년 차인 48기, 파란색은 4년 차인 47기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양다리!’
남자가 두 명의 여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제 동기와 1년 위 선배를 동시에 말이다.
쪽쪽쪽쪽-.
유리는 자신의 발밑에서 들려오는 열정적인 소리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뒤.
“하아…….”
“…….”
그윽한 시선을 주고받은 남녀가 다시금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가고.
탓-.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내려선 유리는 피멍 대가리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쯧… 난봉꾼 새끼.”
짧게 혀를 찬 유리는 다시금 움직였다.
남이 양다리를 걸치든 말든.
지금 유리에게 중요한 건 자정까지 중앙 구역에 도착하는 거였다.
그렇게 유리는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 * *
타닥타닥-.
짙은 어둠 속을 내달리던 유리의 다리가 서서히 멈췄다.
몇 시간이나 이어진 격한 움직임에 그의 숨이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후욱- 후욱-.
차분히 숨을 가라앉힌 유리는 정면을 응시했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과 빽빽한 숲길.
그리고 그 너머, 작게 보이는 새하얀 빛.
이에 유리의 낯빛이 밝아졌다.
‘늦지 않게 도착했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유리의 생체 시계가 말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다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 지겹게 달려온 숲을 벗어난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제리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중앙 구역에 있다는 원형 경기장을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지.
그 질문에 제리는 낄낄거렸다.
[어떻게 찾냐고?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 근처에서 그걸 못 보고 지나친다면 장님이나 다름없거든. 아마 보자마자 느낄걸? 아, 이래서 다들 용의 요람, 용의 요람 하는구나 라고.]그 말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저걸 못 보면 눈뜬장님이지.’
유리 역시 원형 경기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검투사들이 혈투를 벌이는 피의 경기장.
그가 잠시나마 일했던 원형 경기장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규모라 수천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크기였다.
하지만 눈앞의 ‘원형 경기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품이 분명한 새하얀 석조 재질의 외벽.
그 높이가 족히 50m는 넘어 보였다.
거기에 건물의 전체 크기는 한눈에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이건 수천이 아닌 수만, 혹은 그 이상을 수용할 정도이지 않은가.
그건 유리가 난생처음 마주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리를 놀라게 만든 게 있었으니.
‘저거… 전부 발광석이야?’
그 비싸다는 발광석이 원형 경기장 외벽에 수 미터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발광석이란 발광석은 전부 때려 박은 게 아닐까 싶은 양.
그로 인해 원형 경기장 주변은 마치 달빛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빛으로 가득했다.
‘허… 이래서 다들 용의 요람, 용의 요람 하는 거였구나.’
솔직히 용의 요람 자체가 황금으로 만들어 낸 인공섬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뭐 하겠는가.
인공섬을 만드는 데 황금을 물처럼 썼다는 걸 들었어도 그게 어느 정도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아 딱히 실감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눈앞의 건축물은 달랐다.
저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데 대체 얼마만큼의 고급 석재가 들어갔을지.
또한 빼곡히 박혀 있는 발광석이 모두 몇 개일지.
그게 대충 가늠이 되니 그제야 요람의 재력이 어느 정도일지 실감이 났다.
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원형 경기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
유리는 주변에서 몰려드는 인기척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수백 미터 너머, 원형 경기자 발광석의 빛 아래로 몇몇 사람이 나타났다.
이를 본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전부 초록색 견장… 48기들이다.’
그들은 잠시 원형 경기장 근처를 배회하다 이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곧, 자정이 된다.’
아마 지금 나타난 이들 역시 특할판을 이용하기 위해 모인 것일 터.
이에 유리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아까 그 48기들이 들어간 통로 위로 시계탑이 있었다. 그게 서쪽 시계탑이라면… 내가 갈 곳은 이쪽이겠네.’
유리의 뇌리로 제리의 목소리가 흘렀다.
[1, 2년 차의 상점은 북쪽 출입구를 통해야지만 이용할 수 있어. 동서남북 방위마다 시계탑이 있고, 그 밑에 떡하니 출입구가 있으니까 알아보기 쉬울 거야.] [응? 혹시 다른 방향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냐고? 나야 모르지. 그딴 미친 발상 자체를 안 하니까. 시발, 괜히 동쪽이나 서쪽 입구로 잘못 갔다가 48기나 49기한테 걸려 봐… 뭔 짓을 당할지 누가 알아? 애초에 그쪽은 얼씬도 않는 게 좋아.] […시계탑이 어떻게 생겼냐고? 아, 그만 좀 물어봐라! 그딴 사소한 건 그냥 네가 나중에 직접 겪어 보면 알게 되는… 흐갹! 알, 알려 줄게! 알려 줄 테니까 그 빌어먹을 개미집 좀 저리 치워!]제리의 설명대로라면 1, 2년 차를 위한 상점은 북쪽 시계탑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북쪽… 북쪽 시계탑.’
유리는 속으로 연신 북쪽 되뇌며 원형 경기장의 외벽을 따라 북상했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여기다.”
삐죽 솟은 시계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쪽에서부터 쭉 올라와 가장 처음 마주한 시계탑.
분명 북쪽 시계탑이었다.
슬슬 사람들이 모여들던 서쪽 시계탑과 달리 이용할 사람이 없는 북쪽 시계탑의 출입구는 휑했다.
주변에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탑을 보았다.
22시 56분.
‘아슬아슬했네.’
나름 부지런하게 움직인다고 했는데도 고작 1시간을 남기고 도착하고 말았다.
까딱 사고라도 터졌다간 제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했을 상황.
유리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살짝 안도하며 곧장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양 갈래 길이 나왔고.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1년 차 상점이라면 아마 거기서 좌측 길로 들어가면 될 거야. 지금 2년 차가 우측 길에 있는 상점을 쓰니까.]제리의 조언을 떠올린 유리는 지체 없이 좌측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막 좌측 길을 빠져나오며 이제 정말 다 왔다는 생각에 살짝 긴장이 풀린 찰나.
유리의 신형이 우뚝 멈추어 섰다.
동시에 흘러나온 떨리는 목소리.
“…옘병.”
그리고 목소리만큼이나 유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쩨리 선배……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유리의 고개가 천천히 밑에서 위로 움직였다.
0°.
30°.
45°.
60°.
90°.
시야각이 점점 위를 향하며 유리의 고개도 덩달아 뒤로 젖혀졌지만, 뱅글뱅글 위로 향한 나선형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허리를 뒤로 꺾고서야 간신히 천장을 보는 데 성공한 유리.
천장을 찍은 유리의 시선이 이번에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계단 중간중간 뚫린 검은 입구가 시야에 잡혀 들었다.
그건 누가 봐도 각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입구였다.
유리는 빠르게 그 개수를 세어 봤다.
‘대충 봐도 10개는 넘어 보이는데?’
그건 다시 말해 이 원형 경기장은 최소 10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며.
또한…….
“내가 가야 할 상점은 저곳 어딘가에 있다는 거겠지. 하하… 하하하핫.”
유리는 해탈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이내 한숨으로 바뀌었다.
“하아아아… 젠장.”
한숨을 흐트러뜨린 유리는 살짝 느슨해졌던 포인트 상자의 줄을 바짝 조여 맸다.
그리고.
으득-.
“그래, 해 보자고!”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움직이면 된다.
더는 불평할 시간 따윈 없다.
그럴 시간에 한 층이라도 더 뒤지는 게 상책이다!
“아자!”
짧게 기합을 내지른 유리는 곧장 가장 가까운 1층 입구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1시간.
돌아야 할 층은 최소 10개.
유리의 고군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