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58
57화. 유유상종 (2)
아르르르-.
“내가 특혜를 받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미친개의 환영 속에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갑판에 널리 퍼져 나갔다.
유리는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 니들이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 누구도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유리도 딱히 어떤 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홀로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여긴 요람이야. 세상 어떤 은행보다 재화가 넘쳐 나며, 그 어떤 세력보다 강성한 힘을 자랑하는 곳. 뇌물 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으며,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하는 집단. 그게 바로 용의 요람이다.”
“…….”
“그런데 그런 용의 요람이 일개 기수에게 특혜를 베푼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놈들은 가서 지능 검사라도 받아 봐라. 머저리 새끼들아.”
유리의 막말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몇몇은 발끈하여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어. 그럴 수 있다 치자고. 용의 요람도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니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날까. 그런데…….”
그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왕 시작한 거.
유리는 확실하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떤 놈인지를.
유리가 살기를 일으켰다.
“그런데 말야. 만약 일개 기수가 특혜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 특혜를 준 요람에 따져야지 않겠냐? 왜 엄한 사람 가지고 지랄들이세요?”
“…….”
“그리고 특혜받은 게 부럽고, 아니꼬우면 니들도 뇌물수수를 하든, 인맥을 활용하든… 그것도 안 되면 흑검병 똥꼬라도 빨아 주든! 어떻게 해서든 특혜를 받으려고 노력했어야지!”
주변을 훑어보는 유리의 눈에 한심함이 가득 들어찼다.
“에라이, 등신들아. 나였으면 특혜를 받은 놈한테 지랄할 게 아니라 어떻게 특혜를 받았는지 비결이라도 물어봤겠다. 쯧.”
나지막하게 깔린 유리의 목소리에 적막이 따라왔다.
“…….”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주근깨 소년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리의 냉소 섞인 말에 즉시 반박하고 나선 이는 없었다.
그들도 어느 정도 동감하고 있던 것이다.
유리의 이야기가 전부 옳지는 않아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누가 봐도 먼저 시비를 건 건 주근깨 소년이었고.
조금은 과격했을지라도 유리의 행동이 요람의 기수란 명칭에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이도 존재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조금 전 네 행동은 과했다.”
묵직한 말소리가 들리며 좌중의 시선이 뒤쪽으로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
거기에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군터 아이언스였다.
바른 자세로 선 군터가 지그시 유리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유리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과해? 뭐가?”
“나 역시 너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요람이며, 그런 요람이 일개 기수에게 특혜 따위를 베풀지는 않았겠지. 요람은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니까.”
“그런데?”
“하지만 조금 전 넌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손을 썼다. 지금처럼 말로써 그 소년에게 알려 줄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점잖은 그 말에 유리의 눈에 더 짙은 한심함이 생겨났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있겠는가.
“얼씨구? 너님 무슨 똑똑한 등신이세요?”
“…말이 심하군.”
“아니면 무슨 선생 체질이세요? 말로 알려 주긴 뭘 말로 알려 줘?”
점점 눈매가 매서워지는 군터를 보고 유리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거야 원, 우리가 같은 50기 동기라고 하니까 무슨 진짜 친구라도 된 줄 알아? 왜, 아주 손잡고 사이좋게 쎄쎄쎄라도 하시지.”
“…….”
“정신 차리세요, 다시 한번 말하는데 여긴 요람이에요. 그리고 동기란 말로 포장된 저것들은 네 경쟁자고요.”
유리의 검지가 군터의 주변에 널린 합격자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방금 내가 한 놈 밖으로 내다 버린 덕분에 우리의 경쟁자가 한 명 줄었네? 이야, 난 내가 이 정도 해 줬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야.”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
그의 이야기에 군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우리는 경쟁 관계다. 나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할 생각도 없고. 그러나……!”
군터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우리가 펼쳐야 할 건 선의의 경쟁이다. 그 과정에서 분쟁이 있을지라도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언젠가는… 우리가 동료로서 서로 힘을 보태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
그의 답변에 유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동료?’
서로 힘을 보태?
그건 언제나 홀로 생존하고 홀로 싸워 이겨 온 유리에게 낯선 단어였다.
때문에 그는 군터의 이야기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비록 유리의 눈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가려진 상태였지만, 유리와 군터는 서로를 응시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무거운 기류가 흐를 때.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
손뼉을 치며 등장한 이는 애꾸눈 사내였다.
이미 진즉, 갑판에서 벌어진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던 애꾸눈 사내.
느지막하게 나타난 그는 유리와 군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열띤 토론 잘 들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과연 그가 유리와 군터, 상반된 가치관 중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요람이 어떻고, 동기가 어떻고. 꽤 재밌는 이야기를 하더군. 뭐, 좋아. 좋은데 말이다.”
애꾸눈 사내가 좌중을 슥 훑었다.
“그딴 건 일단 정식 기수가 되고 나서 떠들어라. 아직 정식 기수도 아닌 것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내 기가 차서 안 끼어들 수가 없더군.”
그 이야기에 한 소녀가 화들짝 놀라 끼어들었다.
“예? 저희 이미 정식 기수가 된 거 아니었나요? 시작의 숲에서 1월 1일까지 버티면 정식 기수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애꾸눈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예?”
“난 한 달 동안 살아남으면 예비란 딱지를 뗀 50기가 되어 요람의 땅을 밟게 될 거라고 했지.”
“그, 그게 그 소리…….”
“네까짓 게 뭔데 그걸 판단하는 거냐?”
그 말과 함께 애꾸눈 사내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냉랭한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네놈들이 뭔데 내 말뜻을 함부로 재단하냐고.”
무어라 반박하려던 이들의 입이 급히 다물어졌다.
이에 애꾸눈 사내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너희가 정식 기수가 되는 건, 입도식 행사가 끝나고 나서다. 그 전까지는… 그래, 반쪽짜리 정도라고 해 두지.”
“그, 그런…….”
놀란 좌중을 무시하고 애꾸눈 사내가 수하에게 말했다.
“아까 배에서 떨어진 놈 어떻게 됐지?”
“멀쩡합니다.”
“이번 시작의 숲에서 나온 50기가 총 301명이었나?”
“그렇습니다.”
“잘됐군. 안 그래도 딱 한 명 많은 게 거슬렸는데. 이번 일로 정확하게 300명이 맞춰졌군. 그놈은 건져서 집으로 되돌려 보내라. 명목은… 괘씸죄다. 어디서 감히 흑검병단의 일 처리에 의문을 품어? 같잖은 새끼가.”
특혜 논란을 처음 거론했던 이가 너무도 허망하게 추방되는 것을 본 이들.
그중 특혜 논란에 동조의 빛을 띠었던 이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사이 애꾸눈의 시선이 유리에게 닿았다.
“네놈.”
그는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 녀석이군.’
고작 예비 기수에 불과한 놈이 소란만 생겼다 하면 그 중심에 있었다.
‘벌써 이럴진대… 앞으로 얼마나 더 말썽을 피울런지.’
앞으로 그의 보직이 바뀌기까지 남은 시간은 2년.
애꾸눈 사내는 어서 빨리 2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식 기수가 되면 네놈들이 뭔 짓거리를 해도 간섭하지 않겠지만, 그 전까지 너흰 내가 관리해야 할 물건들이다. 네놈이 물에 처박은 그 병신 머저리마저도.”
애꾸눈 사내가 유리를 검지로 가리켰다.
“넌 허락 없이 내 관리품에 흠집을 냈으니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이에 애꾸눈이 가볍게 고갯짓하자 수하가 유리의 잡동사니를 주워 들었다.
바로 얼마 전 애꾸눈 사내가 넘겨주었던 포인트 주머니와 두 쪽 난 온갖 잡동사니들을 말이다.
그걸 회수한 애꾸눈 사내가 웃어 보였다.
“대가로 이걸 받아 가지. 자, 그럼 해산! 다들 엄한 데 기운 빼지 말고 잠이라도 처자라!”
그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그대로 사라지는 애꾸눈 사내였다.
이에 유리는 확신했다.
‘저거, 일부러 뺏어 간 거다.’
괘씸죄니, 뭐니 하는 걸 보면 분명 그도 주근깨 소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특히 유리의 행동은 흑검병들을 대신해 헛소리를 늘어놓은 녀석을 응징한 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조금 전의 사건 정도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을 터.
실제, 막 나가는 것처럼 보였어도 유리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 그런 예상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거기다 괜히 사족을 붙여서 줬던 걸 뺏어 간다고?’
유리는 어딘가 모르게 흥겨워하는 애꾸눈 사내의 뒷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진짜 뒤끝 장난 아니네.”
공짜 포인트가 생겨서 신났던 게 불과 몇 분 전이건만.
멀쩡히 눈 뜨고 제 물건들을 강탈당해 빈털터리가 된 유리.
“…다시 안 돌려 주겠지?”
훌쩍-.
그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갑판의 한쪽 구석에 찌그러졌다.
훌쩍훌쩍-.
서러움에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연신 훌쩍이는 유리.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처량하게 쭈그러진 유리를 좇는 두 쌍의 눈이 맑게 빛났다.
* * *
한바탕 소란이 있은 뒤로는 쥐 죽은 듯 조용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특히 ‘거대한 똥이 되겠다!’라는 유리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 것인지, 그의 주변은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휑했다.
덕분에 유리는 목적대로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동안은 말이다.
평온했던 시간은 금세 물러갔고, 유리는 깨달았다.
“하, 돌겠네…….”
세상에는 똥을 피하지 않고 굳이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매우 정신 나간 놈도 있다는 사실을.
“하아아아…….”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 무렵.
널찍한 그늘에서 유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런 의문과 함께 유리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에게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구릿빛의 피부와 반들반들 빛나는 대머리.
2m 30㎝는 충분히 넘을 것 같은 실로 어마어마한 덩치.
양팔 부분은 어디 가고 너덜너덜한 민소매가 되어 버린 흑색 상의와 이게 사람 몸인지 돌덩이인지 모를 우락부락한 팔뚝.
그리고 가장 인상 깊은 특징은 이마에서 시작해 미간을 가로질러, 코끝까지 내려온 T 형태의 붉은 문신이었다.
흡사 말로만 듣던 야만 전사 같은 외모의 이 녀석이 나타난 건, 유리가 깽판을 치고 나서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자타공인 미친놈 1호가 되어 버린 유리.
그로 인해 자신이 원했던 대로 모두가 기피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따라 유리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는 이 상황이, 이 평온이 조금 더 길게 이어지길 바랐다.
바로 그때 이 녀석이 다가온 거다.
[나 배고프다.]…라는 말을 지껄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