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64
63화. 백보 의식 (5)
앞서가는 유리를 따라 첫발을 내디딘 순간.
많은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드득-.
‘이 무슨?!’
고작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이토록 달라지다니!
안간힘을 쓰며 첫발을 뗀 이는 총 32명.
하지만 그중 땅에 발을 붙이는 데 성공한 사람은 22명뿐이었다.
푸석-.
고작 첫발도 떼지 못하고 열 명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거다.
한편, 겨우 첫발을 내디디는 데 성공한 22명이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쿵-.
다시금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22쌍의 눈이 정면을 향하니 그곳에는 방금 막 걸음을 내디딘 유리가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이들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더… 멀어졌다?’
분명 자신들도 걸음을 내디뎠건만, 어째서 저 녀석과의 거리는 더 벌어진 거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했다.
실로 너무도 간단한 이치.
‘두 걸음을… 내디뎠다고?’
자신들이 고작 첫걸음을 내디디며 허우적거리는 사이,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녀석은 두 걸음을 걸어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군터를 이를 악물며 발을 떼었다.
이에 다른 이들도 덩달아 발을 떼었고.
으득-.
쿵-.
그렇게 두 번째 걸음.
거기서 다시 열 명이 떨어져 나가며 남은 이들은 12명이 되었다.
이어진 세 번째 걸음.
우두둑-.
풀썩-.
처음에 비해 몇 배로 늘어난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다시금 나가떨어지니.
남은 이들은 이제 고작 7명.
그리고.
저벅- 쿵-.
네 번째 걸음에서 둘이 쓰러졌고.
저벅-.
다섯 번째 걸음 이후에는 단 셋만이 남아 있었다.
아린 헬가.
보비크르탄카푸르타비.
그리고 군터 아이언스.
유리를 좇아 가장 먼저 걸음을 옮겼던 세 사람.
그들만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반쯤 상체를 숙인 채 무릎을 짚고 있는 아린.
창백하게 질려 있는 뽀삐.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 대는 군터.
셋의 육신은 하나같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풀썩-.
6번째 걸음을 채 내디디기 전, 아린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벅- 쿵!
이후 발을 내디디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지만,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뽀삐가 정신을 잃고 옆으로 넘어갔으며.
마지막으로 군터.
쿵-.
온전히 6보를 내디디는 데 성공한 그는 접히려는 상체를 겨우 바로 세웠다.
부들부들-.
깊고 깊은 심해에 들어온 듯.
숨조차 쉬기 힘든 압박이 계속 됐다.
군터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먼저 나아가고 있던 소년은 일곱 걸음을 내디딘 뒤, 쉽사리 여덟 번째 걸음을 내디디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따라… 잡았는데…….’
먼저 걸어간 저 녀석을 쫓아와 이제 한 걸음 차이까지 간격을 좁혔다.
이대로 자신이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면 마침내 검은 머리 소년의 옆에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계인가…….’
충만했던 마나는 바닥났으며, 단련한 육체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 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진즉 정신적 한계도 넘어선 듯싶었다.
그렇게 점점 좁아지는 시야 속.
그그극-.
검은 머리 소년이 8번째 걸음을 떼려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에 군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녀석?!’
검은 머리 소년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득- 꾸득- 으드득-.
녀석의 육신에서 나는 끔찍한 듯한 소리가.
거친 압력에 대항하는 그 힘겨운 소리가 군터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건 참으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대로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하지만 소년은 결국.
쿠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다음 발자국을 찍는 데 성공하였다.
“크흑!”
하지만 성공의 대가일까?
검은 머리 소년의 무릎이 꺾였다.
그 처참한 뒷모습을 보며 군터는 눈에 힘을 주었다.
‘여덟 걸음.’
6보를 걸어왔기에 저 8번째 걸음을 내디디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단 두 걸음 차이일지라도 아마 저 소년이 감내하고 있을 압력은 자신의 몇 배일 터.
그것만으로도 저 소년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아마 저 녀석도 이제는 한계일 터.
‘너와 나의 차이는 두 걸음이구나.’
군터는 그 차이를 인정했다.
그와 동시에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살짝 놓은 순간.
끄으으으으-.
바닥에 무릎 꿇었던 소년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서 마치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흐흐흐흐- 크하!
안간힘을 쓰며 괴성을 내지른 소년의 상체가 마침내 꼿꼿이 펴지고.
우득-.
그가 다시 발을 떼었다.
‘…뭐?!’
그 처절함에 군터가 일순간이나마 정신을 차렸고.
으아아악!
포효하는 유리의 뒷모습이 군터의 두 눈에 가득 담겼다.
‘너는…….’
그렇게 아득바득, 9번째 걸음을 내디디려는 한 도전자의 모습을 끝으로.
‘…포기하지 않는 거냐?’
풀썩-.
군터 아이언스의 시야가 암전됐다.
* * *
처음 유리가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객석의 사람들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가장 먼저 발을 뗀 이에 대한 약간의 심드렁한 감상만 있을 뿐.
하지만 그가 곧장 두 걸음째를 내딛고 다른 이들을 앞서가기 시작하자 드디어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두 걸음째까지 무난히 걷는 걸 보니 제법이네.’
‘나쁘지 않아.’
곧이어 유리를 쫓아 다른 50기들이 걸음을 딛는 장면에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50기들이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오?”
“어?”
홀로 두 걸음을 더 걸어간 유리를 보고 그제야 좌중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녀석들이 느린 건가?’
‘아니야, 이건… 저 녀석이 빠른 거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행동했고.
누구보다 빠르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4걸음을 뗀 유리를 보고 그제야 좌중은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빨라!’
‘4걸음째인데 여전히 힘이 남아 있어.’
객석에 앉은 이들 모두 이미 백보 의식을 거친 이들이었다.
때문에 저 검은 머리 녀석이 걷는 속도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빠른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이 걷는 건… 왜 저렇게 쉬워 보이냐? 난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조금 실력이 있다 치면 두 걸음까지는 어찌어찌 나아간다.
하지만 3걸음부터는 마나를 끌어올려도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
그로 인해 3보째부터는 기진맥진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저 검은 머리 녀석은 4걸음을 걸었음에도 여전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누군가 그랬지. 남이 하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그 사람이 그 일을 정말 잘하는 거라고.’
‘제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좌중은 ‘쓸 만한 녀석이 나타났구나’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유리가 다섯 걸음을 떼고, 이어 여섯 걸음을 내디뎠을 때.
꿀꺽-.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나 빨리 여섯 걸음을?!’
‘과연 저 녀석이 일곱 번째에 성공할까?’
여섯 걸음까지는 밖에서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종종 성공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 걸음.
거기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요람에서 흔히 여섯과 일곱으로 가짜와 진짜 천재가 나뉜다고 할 정도.
그 정도로 7보에 성공한 이는 손에 꼽았다.
때문에 좌중의 관심이 유리의 일곱 번째 걸음에 몰렸고.
쿠웅-.
유리가 기어코 일곱 번째 걸음을 내딛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 50기에 진짜배기가 들어왔네.”
“7보라니.”
그렇게 관객들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유리를 좇은 이들이 서서히 간격을 좁혀 왔다.
이후 3명이 여섯 걸음에 성공하자 관객은 또 한 번 탄식했다.
“이번 50기는 제법 수준이 높네.”
“7보가 하나에, 6보짜리가 셋이나?”
“한 명은 5보 반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한 편이긴 하지.”
6보짜리가 없는 기수도 수두룩했다.
그런 의미에서 6보 이상을 내디딘 이들이 4명인 50기는 상당히 뛰어난 기수라고 할 법했다.
거기다 한 녀석은 무려 7보를 걷지 않았는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어? 저 녀석?!”
누군가가 내뱉은 짤막한 경악성에 좌중이 시선이 다시금 경기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일곱 걸음을 밟고 한참이나 멈춰 서 있다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유리가 있었다.
“여, 여덟 걸음?!”
“왜 다들 설레발이야? 아직 성공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조금 진중하게 상황을 살펴보자 했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
쿵-.
나직한 소리와 함께 유리가 8번째 발자국을 찍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를 보고 많은 사람이 혀를 내둘렀다.
“하?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2년 만에 8보짜리가 또?”
여덟 번의 걸음.
그건 35년 전 메이 윈체스터가 세운 9보의 기록 이후 간헐적으로 나오는 기록이었다.
지금까지 8보의 기록을 세운 이는 총 4명.
가장 최근의 8보 기록은 48기에서 나왔었다.
이에 사람들은 향후 몇 년간은 8보의 기록이 나오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한데 그 예상을 뒤엎고 불과 2년 만에 다시 한번 그 기록을 달성한 자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8보라는 기록에 놀라 미처 유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아직.”
테레시아가 그리 중얼거렸다.
“아직이야.”
그리고 마치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듯 유리의 상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괴음.
크흐흐흐흐흐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유리의 상체가 들썩들썩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고.
“저, 저거?!”
“미친!”
곧 유리가 상체를 완전히 세우자 사위가 죽은 듯 조용해졌다.
46기를 비롯해 49기.
나아가 흑검병들까지.
수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숨을 죽이고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크하!
수백 명의 쓰러진 사람들을 뒤로하고.
아등바등 홀로 일어서려는 한 인간이 있었다.
으아아악-!
모든 걸 토해 내듯 포효를 내지르며, 드디어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 데 성공한 유리.
곧 그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사실 그건 걷는다기보단 몸을 질질 끌고 나간다는 수준이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전신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그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드득-.
쿵-.
그가 9번째 걸음을 디디는 데 성공했다.
“아홉… 걸음.”
“세상에…….”
무려 35년 만에 아홉 걸음을 내디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 놀라운 사실에 모두가 멍하니 있을 때.
누군가 홀린 듯 말했다.
“그런데 저 녀석… 아직… 아직 움직이고 있는데?”
“……?!”
그의 말처럼 9보를 걸은 유리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었다.
* * *
아프다.
전신이 으스러진 것만 같다.
‘쉬고 싶다.’
여덟 걸음을 딛고 고꾸라졌을 때, 그대로 잠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유리는 다시 일어나 걸었다.
‘고작… 고작 여덟 걸음에 주저앉을 수는 없지.’
검주는 아직도 저 멀리 있었고.
먼저 나아가고 있는 요한은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금방 따라잡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딸랑 여덟 걸음에 주저앉아 버리는 건 유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리는 아득바득 상체를 세웠고.
쾅-.
아홉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그건 분명 극한의 상황에서 얻은 결실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모자람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끝이야? 이것밖에 안 돼?’
유리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살펴보았다.
최대한 아껴 쓴다고 했건만 마나 핵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체력마저 간당간당한 수준.
하지만 어째서인지, 정신만은 또렷했다.
‘충분해. 더 갈 수 있어.’
그런 확신이 들었기에 유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쿠우우웅-.
이전과는 다른 소리를 내며 10번째 발자국이 찍혔다.
그리고 유리의 육체가 다시금 쓰러졌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유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열…….”
100보 중 고작 10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35년 만에 세워진 최고 기록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유리는 기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턱을 괸 검주가 지루하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꼴랑 이 정도로는… 관심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거냐?’
하긴 그럴 법도 했다.
겨우 90보 밖에서 나자빠진 녀석에게.
검조차 휘두를 필요도 없는 쓰레기가 그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걸 알기에 더더욱, 유리는 검주의 저 지루하다는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내 역량은… 여기까지인가?’
그는 이제 한계였다.
더는 일어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력에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여길 정도.
‘그래… 인정하자. 지금의 나는 고작 열 걸음짜리다.’
스스로를 시험해 본바, 오로지 자신이 쌓아 올린 역량만으로는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이 쌓은 역량 이외의 조금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아마 이거라면 저 따분해 보이는 검주를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유리가 그리 결심한 순간.
우뚝-.
저 멀리 검주를 향해 가고 있던 요한의 환영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가 서서히 뒤돌아 유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마치 언제까지 나자빠져 있을 거냐는 듯.
이에 유리도 웃었다.
‘알았다고, 금방 간다니까!’
그리 속으로 외친 유리는 아끼고 아껴 왔던 한 줌의 마나를 전신으로 퍼뜨렸다.
저 멀리 앞선 요한.
그가 직접 구르고 굴러 닦아 놓은 지름길로.
그가 괴물을 상대하고자 만들어 낸 마나 로드로.
한 줌의 마나가 빠르게 달려 나갔다.
레드너가(家) 비전 마체술.
마류(魔流).
그렇게.
휘오오오-.
유리를 중심으로 마의 흐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