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70
69화. 자극 (2)
흑검병들의 등장에 50기의 대화 소리가 사라졌다.
‘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백보 의식 이후, 기절에서 깨어난 50기들에게 전달된 건 정기 집합일이 월요일이며 9시까지 모이라는 소리였다.
정기 집합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따윈 없었다.
그저 이름 그대로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이겠거니 싶었을 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50기 전부를 모으는 자리이니 무슨 공지가 있을 것이고.
그게 아마 향후 자신들이 어찌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성을 잡아 줄 거라는 기대감이 든 것이다.
때문에 기수들은 숨죽이고 흑검병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저벅저벅-.
마침내 기수들 앞에 선 흑검병.
그 선두에는 안경을 쓴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흑검병이라기보다는 사무관에 어울리는 듯싶은 얼굴.
차갑고 냉철한 보였기에 무언가 상당히 보수적일 거란 생각이 드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들어맞았다.
척-.
기수들 앞에 서서, 곧장 열중쉬어 자세를 잡은 안경의 흑검병.
그가 딱딱한 어투로 목소리로 외쳤다.
“공지하겠다. 1월 20일 토요일, 9시. 50기 통합 퀘스트가 있을 예정이다. 지각 및 결석에 따른 불이익은 본인이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상, 공지를 마친다. 해산!”
그 말을 남기고 바로 몸을 돌려 버리는 안경의 흑검병.
누가 봐도 바로 떠나려는 모습이었다.
이에 기수들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끝?”
“이게 끝이라고?”
오늘의 집합을 위해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이나 기다린 이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저 말로 끝이라니.
당황과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에 몇몇이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퀘스트가 뭔가요?”
“맞습니다! 퀘스트가 뭔지는 설명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1월 20일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때까지 저희는 뭘 하나요?”
한 명이 질문의 물꼬를 트니 여기저기서 다른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에 잠시 발길을 멈춘 안경의 흑검병.
스륵-.
뒤돌아선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
“퀘스트가 무엇인지 궁금하면 직접 알아볼 것이고, 1월 20일까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알아서 시간을 때워라. 요람의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 이상 우리는 너희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적이 감돌았다.
그건 이제 막 기수가 된 이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때문에 그중 누군가가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럼… 그럼 저희는 요람에 왜 온 겁니까? 아무것도 알려 주지도, 해 주지도 않을 거면! …저희는 어째서 요람에 온 겁니까! 도대체 이곳에서 무얼 배워 가야 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무엇 때문에 시작의 숲을 거쳐 기수가 된 건데… 이건 좀 너무한 처사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안경남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오라고 했나?”
“네?”
“누가 너희보고 요람에 안 들어가면 죽인다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냔 말이다.”
“그, 그건…….”
“용의 요람에 들어온 건 너희의 선택이다. 그리고 요람에 들어온 이상 요람의 방식을 따라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앞에서 나불대지 말고 요람을 떠나. 아무도 너희를 붙잡지 않을 테니까.”
“…….”
“그리고 요람이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그 말도 웃기는군. 이번만큼은 내가 너희의 그 멍청한 생각을 정정해 주지.”
안경남의 냉소가 더 짙어졌다.
“요람이 너희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게 아니다. 단지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는 것뿐.”
“예?”
“요람이 베푸는 것을 손에 넣고 싶거든, 자격을 갖춰라. 그렇지 않다면 이 요람에서 그 어떤 것도 얻어 갈 수 없을 거다.”
싸늘한 논리로 기수들을 침묵시킨 흑검병은 내정하게 뒤돌아 사라졌다.
채 5분이 되기도 전에 끝나 버린 50기의 첫 번째 정기 집합.
그로 인해 아직 요람에 적응하지 못한 50기들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편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린과 뽀삐.
“참 너무한다. 그 정도는 좀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지 않아? 안 그래?”
“배고프다!”
흑검병의 냉랭함에 불만이 쌓인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고개가 한쪽을 돌아갔다.
그건 누군가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었지만.
“…어?”
“…배고프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에 동의해 줄 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에 아린은 감탄했다.
“와, 얘는 대체 언제 사라진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 뒤에 있었는데?”
“……?!”
어느새 자취를 감춘 유리.
그 사실에 뽀삐의 동공이 흔들렸고.
턱-.
그의 어깨로 작은 손이 올라왔다.
뽀삐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니 그곳에는 활짝 웃는 아린이 있었다.
“찾는 거 도와줄까?”
“배, 배고프다…….”
뽀삐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 * *
유리는 흑검병이 공지를 끝내자마자 살금살금 뒤로 물러났고.
여기저기서 다른 기수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아린과 뽀삐로부터 도망쳤다.
그가 그런 이유는 간단했다.
‘그 녀석들한테 내 은신처를 알려 줄 수는 없지.”
비록 안면을 텄다고는 하나 어째서 그들이 자신의 곁에 알짱거리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고작 얼굴 몇 번 보고, 말 몇 번 나눠 본 게 전부이니, 그들의 목적을 알 리 없었다.
최소 자신이 완벽하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아니고는 절대 자신의 은신처를 알릴 생각이 없는 유리였다.
물론 지금껏 살아오면서 유리가 신뢰했던 사람은 손에 꼽았지만.
아린과 뽀삐라는 혹덩이를 떼어 낸 유리는 상쾌한 얼굴로 숲을 달려 나갔다.
‘할 일이 많지만, 우선은 은신처 구축부터 시작하자.’
요람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첫 퀘스트는 20일.
이제 12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안에 은신처를 비롯해 식량 및 갖가지 물품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좀 빠듯할 터.
‘한동안은 꽤 바쁘겠네.’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균열에 도착해 있었다.
유리는 쏜살같이 균열로 숨어들었다.
탓탓-.
몇 번 왔다 갔다 해 봐서인지 유리의 몸놀림은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한데 그의 발걸음은 거처가 아니라 곧장 대련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지금이다!’
오늘 새벽에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함.
바로 발광석 훔치기를 말이다.
대련장으로 향하며 슬쩍 테레시아의 거처를 흘끗거린 유리.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살금살금 대련장 입구에 내려섰다.
그러다 대련장에서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쉑-.
“설마……?”
조마조마한 눈으로 대련장에 들어선 유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곳에는 여전히, 새벽에 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창을 내지르고 있는 테레시아가 있었다.
유리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위치.
똑같은 자세.
다만 테레시아가 서 있는 자리.
그녀가 흘린 땀으로 생겨난 검은 자국이 새벽에 유리가 보았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쉑-.
자신이 왔음에도 여전히 수련에 열중인 그녀를 보고 유리는 혀를 내둘렀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저러고 있었던 건가?’
그 긴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수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유리는 천천히 테레시아에게 다가갔다.
“이봐, 텟샤 선배.”
그리고 테레시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유리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
가까워지니 자세히 보이는 테레시아의 상태.
그녀는 전날 보았던 거에 비해 매우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리를 놀라게 한 건 그녀의 동공이 풀려 있다는 거였다.
마치 죽은 생선의 눈깔처럼.
“설마……?”
유리가 바로 뒤에 접근했음에도 여전히 창을 내지르는 테레시아.
이에 유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풀썩-.
그전까지 열심히 창을 내지르던 테레시아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다급히 그녀를 받아 든 유리는 눈을 감은 테레시아를 보고 자신의 가정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수련을 계속했던 거야?”
도대체 어떤 집념이면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창을 내지른단 말인가.
단순한 개인 훈련인데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리고 얼마나 몸을 혹사했으면 고작 어깨를 짚었다고 이리 쉽게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거지?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유리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어제부터?”
자신과의 대련을 마치고 개인 훈련에 들어갔던 테레시아.
설마 그때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창을 내질렀던 건가?
“…….”
기절한 테레시아의 엉망진창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
어째서인지 그의 가슴속에 묘한 답답함과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어째서?’
유리는 그 답답함과 짜증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왜 이런 감정에 휩싸인 건지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기절한 테레시아를 보고 있자니 그 답답함과 짜증이 더욱 깊어 지는 것만을 느낄 뿐.
“후우…….”
긴 숨을 토해 내어 알 수 없는 감정을 애써 털어 낸 유리는 테레시아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죽은 건 아니겠지?’
숨은 쉬는 걸 보니 다행히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땀에 절어, 엉망진창인 상태로 깊이 잠든 테레시아.
아무래도 이런 그녀를 이대로 놓고 갈 수는 없었기에 유리는 그녀를 둘러업었다.
테레시아를 거처로 옮겨 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살짝 천장을 흘깃거리는 유리의 두 눈.
그로부터 잠시 뒤.
대련장을 나서는 유리의 등에 테레시아가 업혀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손에는 빛을 뿌리는 발광석 하나가 고이 들려 있었다.
탓-!
그렇게 테레시아를 엎고 거처에 도착하자 발광석의 빛에 그녀의 거처가 훤히 드러났다.
모포 몇 개를 겹쳐 깐, 단출한 잠자리.
그 외에는 그릇 몇 개가 전부인 테레시아의 거처.
대체 그간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황량한 공간이었다.
“…….”
테레시아를 모포 위에 눕힌 유리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짜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유리는 발길을 돌려 테레시아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온 순간,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유리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침입자!’
분명 자신의 것 이외의 발자국이 동굴 바닥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데 그 발자국이 조금 특이했다.
‘발자국이… 하나?’
동굴 바닥에 찍힌 발자국은 왼쪽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마치 지팡이를 짚은 듯한 작은 자국만이 있을 뿐.
‘…이거 설마?’
놀란 유리가 발광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함께 동굴이 서서히 빛으로 물들어 갔고, 그 빛 속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낡은 나무 의족이었다.
저걱-.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늙수그레한 목소리.
“에잉, 어딜 그렇게 싸돌아 댕기는 게야! 한참을 기다렸잖으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껄렁껄렁한 목소리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불만이면 앞으로 약속을 잡고 오시든가.”
“거, 애새끼. 저 빌어먹을 싹퉁 머리는 어째 나아지질 않는 건지. 쯧쯧.”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빛 속으로 요한 레드너가 완전히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