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72
71화. 자극 (4)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공간.
그 속에 자리한 건 우뚝 솟은 거대한 벽과 창을 쥔 소녀였다.
푹- 푹- 푹-.
테레시아는 벽을 향해 쉼 없이 창을 내질렀다.
눈앞의 벽은 이미 오랜 시간 그녀가 남긴 흔적으로 빼곡했다.
마치 거대한 벌집처럼 수천수만 개의 구멍으로 가득한 벽.
푹- 푹- 푹-.
벽을 향해 창을 내지르며 테레시아는 의아해했다.
‘난… 수련 중이었는데?’
푹- 푹- 푹-.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아… 꿈이구나.’
그건 자각몽이었다.
스스로 꿈이란 것을 인지하는 꿈.
하지만 그런 인지는 이내 흐려졌고, 아리송함이 뇌를 지배했다.
‘꿈인가? 아님, 현실인가?’
테레시아는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이게 꿈인지.
혹은 현실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건지.
모든 게 불투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생각을 포기했다.
‘…뭐든 상관없어.’
꿈인들, 현실인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자신은 언제나 창을 내질러 왔었는데.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두 세상의 경계가 무너질 정도로 테레시아는 창을 내지르는 데 집착했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푹- 푹- 푹-.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쉼 없이 창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푹-.
쩌적-!
벌집처럼 난자된 벽이 기어코 무너져 내렸다.
푸스럭-.
거대한 벽이 주먹만 한 돌덩이가 되어 주저앉는 모습에 썩은 생선 눈깔 같던 테레시아의 눈에 일순간 빛이 깃들었다.
‘아!’
그건 환희였다.
마침내 벽 하나를 허문 것에 대한 벅찬 감동.
이에 테레시아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폴폴 피어오르는 먼지를 지나.
지금까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어.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정확히 세 걸음을 떼었을 때.
사방에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다.
그와 함께 드러난 것은…….
‘아…….’
또 다른 벽이었다.
조금 전에 무너뜨린 벽이 아닌, 말끔한 벽.
그리고 더 높고, 더 두꺼운 벽.
하나의 벽을 허무니, 또 다른 벽이 테레시아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언제나처럼.
‘…….’
환희로 가득했던 테레시아의 눈은 이내 다시 썩은 생선의 눈깔처럼 변해 버렸다.
그녀는 창을 말아 쥐었다.
‘다시…….’
터벅터벅-.
말없이 벽 앞으로 걸어간 테레시아는 다시금 창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푹- 푹- 푹-.
* * *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기형아?”
“그것 말고도 불리는 별명은 많았다. 불구, 열등아 등등. 윈체스터 가문이 원체 유명한 가문이다 보니, 오랜만에 터진 논란거리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입방아를 찧어 댄 게지.”
“잠깐만, 그 불구가 그 어딘가 몸이 불편한… 그런 사람 말하는 거지?”
“그래, 그 불구.”
“그렇다고 하기에는 테레시아 윈체스터는 너무 멀쩡하던데?”
비록 오랫동안 보아 온 것은 아니지만, 테레시아가 무언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지 않았던가.
도무지 기형아와 불구 등으로 불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유리의 질문에 요한은 즉각 답했다.
“역시 이미 온몸 구석구석을 전부…….”
“…영감, 한마디만 더 해 봐.”
아르르르-.
“내가 아주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개같이 물고 늘어질 테니까.”
“험험, 여, 여튼! 윈체스터 가문의 그 아이를 부르던 별명이 기형아였던 건 맞다.”
“그 사람 멀쩡하다니까?”
“쯧, 겉모습이야 멀쩡하겠지.”
“그럼……?”
“그 아인 무가에서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였다.”
“…그게 뭔 말이야?”
“너는 한 가문에 명성이 어찌 깃드는지 알고 있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세력이 강해서? 돈이 많아서? 훌륭한 마체술이 있어서? 물론, 그것들의 영향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명가를 명가라 불리게 만드는 건… 핏줄이다.”
유리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요한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혈통을 타고 대대손손 전해지는 재능이 명가를 만든다는 소리인 거지.”
“아…….”
세력을 일구는 일.
돈을 모으는 일.
마체술을 익히는 일.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재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武)로 명문의 반열에 오른 가문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마체술을 익히는 재능이 탁월할 터.
그건 너무도 당연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이…….
테레시아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경지가 나아감에 있어 필연적으로 벽을 마주하게 된다. 경지가 얕든, 높든 벽을 넘거나 부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소위 천재라 불리는 것들은 그 벽이 남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천재들이 마주하는 벽은 단순히 낮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얇아 부수기도 쉬운 것은 물론이요, 남들은 10걸음을 걸어 벽을 마주친다면 천재들은 100걸음, 1,000걸음을 걸어 벽을 마주한다.
그렇게 막힘이 없으니 성장이 빠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테레시아는 사정이 달랐다.
“테레시아 그 아이는… 선천적으로 자주 벽에 막히는 체질이라고 하더구나.”
“그런 게 가능해?”
“천재가 있다면 둔재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이치인 게지. 그럼 당연히 남들보다 벽에 자주 부딪히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겠냐?”
“…그렇긴 하겠네.”
“뭐, 테레시아 그 아이가 둔재라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자질만 놓고 본다면 분명 뛰어나다고 하더구나. 다만, 지닌바 재능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벽을 자주 맞이한다는 게 문제였지.”
단순히 벽만 많이 마주하는 게 아니었다.
테레시아의 벽은 남들보다 높고 두꺼웠다.
부수고, 넘고자 한다면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야 하는.
“마체술을 익히는 재능이 중시되는 무가에서 그 아이의 그런 기이한 체질은… 천형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불구이자 기형아라고 불린 게야.”
말이 없어진 유리를 보며 요한은 느릿느릿 말을 이어 붙였다.
“생각해 봐라. 똑같이 시작했어도, 똑같은 경지까지 나아간다고 해도 너는 한걸음에, 한 번의 벽조차 마주하지 않고 나아간다.”
“…….”
“하지만 테레시아 그 아이는 네가 한 걸음 만에 간 거리를 따라잡는 데… 10번, 100번, 혹은 그 이상의 벽을 마주하게 되는 거다.”
이에 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 유리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이를 눈치챈 요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을 줬다.
“벽 하나에 막혀 수년, 혹은 수십 년씩 좌절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게 이 바닥 사람들이다. 좌절이 깊어져 미쳐 버리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지. 그런 벽을 남들보다 몇 곱절이나 많이 마주한다는 건… 너나 나 같은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일 게다.”
“…….”
“아마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이의 천형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아이가 태어난 가문은 윈체스터다. 굴지의 명문 무가, 윈체스터.”
만약 테레시아가 무가의 자식으로서 살아가기를 포기했다면, 그녀의 삶은 조금은 편해졌을지 몰랐다.
하지만 유리가 본 테레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포기를 했다면 요람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기절하여서도 창을 내지를 정도로, 그렇게나 광적으로 수련에 매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짧게 탄식을 내뱉은 유리.
그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그랬구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기절한 테레시아를 보면 생겨난 답답함과 짜증.
그 불쾌한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건 바로…….
‘혐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테레시아는, 그 사람은…….’
그녀의 실력은 현재의 자신과 비교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테레시아가 천형을 달고 오로지 노력으로 이룩한 결과였다.
그녀는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황룡패에서 살아남았고.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49기의 수석이란 성과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그녀는 쉬지 않았다.
테레시아는 대련이 끝났음에도 곧장 수련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심지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수련에 매진했다.
한데, 자신은 어떠했나.
‘그 정도로 치열하게 수련을 해 본 게 언제였지?’
시작의 숲에 들어간 뒤로 수련다운 수련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수련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잠을 자는 시간을 줄이면 아무리 바빴더라도 수련을 이어 나갈 수 있었을 거다.
시작의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유리 역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불과 오늘 아침.
[한 번쯤은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숲길을 거닐며 그리 생각했었다.
이에 유리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겠냐고? 나 까짓 게? 내가 뭘 했다고?’
백보 의식에서 열다섯 걸음을 내디뎌서?
검주를 권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어서?
‘그건… 내가 이룬 게 아니잖아?’
자신의 한계는 고작 열 걸음이었다.
그것만으로 검주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 열다섯 걸음까지 내디디게 만든 건.
검주를 권좌에서 내려 자신의 앞으로 오게 만든 건.
그 모든 건 자신이 아닌 요한이 만들어 낸 마류 덕분이었다.
‘그런데 난, 그 모든 걸 나 혼자 이룬 것처럼 자만하고 있었구나.’
그러한 사실을 기절한 테레시아를 보고 깨달았기에.
가슴은 깨달았어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게 늦었기에, 그 괴리감에 답답함과 짜증이 치솟았던 거다.
‘테레시아 선배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무가에서 태어나 그러한 천형을 달고 있는 테레시아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리고 그런 그녀가 황룡패로 요람에 들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을지.
‘제리가 그랬었지, 테레시아 선배가 두각을 드러낸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그전까지는 그녀 역시 여타 다른 황룡패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거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 온 그녀의 피땀 어린 노력이 최근 들어서야 빛을 발한 거겠지.
‘…테레시아 윈체스터.’
유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노력’이 부럽다고 느껴진 건.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부끄럽다고 느껴진 게.
또한, 한편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련을 시작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요한은 말이 없어진 유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흠?’
다채롭게 변하는 유리의 눈빛이 요한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테레시아라는 아이와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보군.’
아무래도 테레시아라는 아이의 무언가가 유리 녀석을 자극한 모양이다.
다채롭게 변하는 저 눈빛 중 하나가 바로 호승심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이 요한은 썩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유리 녀석에게 경쟁자란 존재는… 쉬이 나타나지 않을 거다.’
자신이 그러했듯 이 녀석 역시 또래와의 경쟁에서 독보적으로 치고 달려 나갈 것이다.
이후 유리는 다른 아이들에게 따라잡을 목표가 될 것이나, 정작 자신은 늘 선두에서 외로이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갈 터.
그렇기에 유리가 또래를 통해 무언가 자극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상당히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그 귀중한 경험이 더욱 귀히 쓰이게 해 줘야겠지.’
요한은 속으로 빙그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