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74
73화. 실마리 (2)
꿈속 세상.
푹- 푹- 푹-.
끝없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고통의 굴레 속에 테레시아는 자아를 잃어 갔다.
푹-.
‘다시…….’
푹-.
‘다시.’
푹- 푹-.
‘다시, 다시.’
푹- 푹- 푹- 푹-!
‘다시, 다시, 다시, 다시…….’
그녀는 그저 벽을 향해 창을 내지르는 인형에 불과했다.
서서히 너덜너덜해져 가며, 언제 완전히 망가질지 모를 그런 인형.
그걸 알고 있음에도 테레시아는 찌르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푹-.
언제나처럼 벽에 창을 찔러 넣었을 때.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던 이변이 일어났다.
저적-.
크게 균열이 간 벽.
이에 테레시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째서?’
새로운 벽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아직도 한참이나 창을 찔러 넣어야 했다.
한데 난데없이 벽에 균열이 가다니?
쩌적-.
서서히 균열을 넓혀 가던 벽은 이내 와르르 무너졌다.
그와 함께 벽 너머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불쑥 나타났다.
‘저건……?’
테레시아는 직감했다.
벽을 무너뜨린 게 바로 저 거대한 손임을.
그렇게 벽을 무너뜨리고 나타난 거대한 손은 테레시아라는 인형을 향해 다가왔고, 거침없이 그녀를 집어 들었다.
흡사, 동화 속 거인에게 붙잡힌 공주가 되어 버린 테레시아.
어찌 보면 매우 위험천만한 장면일 수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테레시아는 거인의 손으로부터 알 수 없는 포근함을 느꼈다.
거대한 손이 주는 따스한 온기와.
[흐흐흥~.]작은 콧노래 소리.
그리고.
‘…고소한 냄새?’
이를 인지한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벌떡-.
욱씬-.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킨 테레시아.
전신에 이는 근육통이 그녀가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깨어난 그녀가 영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눈을 끔벅였다.
‘아?’
누가 봐도 자신의 거처.
한데 자신이 피운 적도 없는 모닥불에, 그것도 모자라 불 위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솥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은 무단 침입범.
“흐흐흥~ 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솥 안의 내용물을 휘휘 젓던 유리는 테레시아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깼어?”
그는 작은 나무 그릇에 돌솥의 내용물을 적당히 옮겨 담아 테레시아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자, 받아.”
“…….”
테레시아는 유리가 건네 주는 것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깎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나무 그릇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이 넉넉하게 담겨 있었다.
따스하게 올라오는 김이 테레시아의 코끝에 닿는 순간 고소한 내음이 확 치밀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꿈에서 맡은 냄새가 이것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유리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퀭한 시선에 유리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자, 잘 먹어야 얼른 회복하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걱정 마. 이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 그냥 아주아주 순수한 나의 호의야, 호의!”
“……?”
머리 위로 연신 물음표를 띄워 올리는 테레시아를 보고 유리는 세상 착하고 순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암, 사심 따위는 없지.’
유리는 정말 사심 따위는 없었다.
“난 그저 우리 텟샤 선배가 잘 먹고 기운 차려서 얼른 얼른 수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러는 거야.”
“……?”
후딱 나아야지 얼른 수련도 시작하고, 하루빨리 대련도 할 거 아냐?
“정말 그것뿐이야.”
“……?”
유리는 정말로 사심 따윈 없었다.
“정말로 그것뿐이라니까?”
…아마도?
* * *
요한이 다녀간 이후, 유리는 테레시아에게 자신의 호의를 아낌없이 보여 줬다.
“에헤이, 이게 뭐야? 사람은 잠자리가 중요한 법이라고! 그래야 수련의 피로가 풀리지! 자자, 이거 써!”
자신이 직접 만든 나무 침대를 선물한다거나.
“고작 이런 걸 먹고 창 휘두를 힘이라도 나겠어? 자자, 그거 나 주고 이거 씹어!”
테레시아가 건량을 먹고 있으면 어느새 쪼르르 다가와, 그녀의 손에 들린 건량을 빼앗고 대신 꼬챙이에 꿰인 고기를 들려 준다거나.
“와, 이런 곳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대? 자고로 주거 환경 역시 몸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 자자, 이건 내 거처 꾸미다 남은 것들인데…….”
휑한 테레시아의 거처에 뚝딱뚝딱 이것저것을 만들어 주는 등.
유리는 알뜰살뜰 열심히 테레시아를 챙겼다.
다만 문제는… 챙겨도 너무 열심히 챙겼다는 거다.
“하아…….”
대련장으로 따라 들어온 유리를 보고 테레시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걷던 그녀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유리.
이에 테레시아의 고운 아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몰라서 물어?”
“내가 뭘, 어쨌는데?”
“왜… 어째서, 잘해 주는 건데?”
이에 유리의 표정이 뚱해졌다.
“나 참, 잘해 줘도 지랄이네.”
“…뭐?”
“호의를 받는 게 싫으면 그때그때 거절하든가.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 놓고서, 이제 와서 왜 잘해 주냐고 따지는 건 무슨 경우실까?”
“…….”
그 신랄한 비난에 테레시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도 유리가 잘해 주는 게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어찌 싫을까.
요람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침대다운 침대에서 잠을 잤고.
건량이 아닌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으며.
휑하던 거처에서 이젠 제법 사람이 사는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 유리로 인해 생긴 변화.
그것도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럼에도 테레시아가 이리 말하는 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네가 뭐 때문에 나한테 잘해 주는 건진 이미 알고 있었어.”
그 말에 유리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 무슨 소리야! 원하는 게 있다니! 그냥 내 순수한 호의라니까! 호의!”
“네가 나한테 잘해 주는 건… 대련 횟수를 늘리고 싶어서잖아.”
“……?!”
유리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가 났나?
난 그냥 잘해 준 거뿐인데?
대체 어떤 부분에서 눈치를 챈 거지?
그럴 부분이 없었을 텐데?!
오만 가지 생각이 유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급격하게 말이 없어진 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유리의 동공에 테레시아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하아… 나한테 잘해 주지 마.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부담스러워.”
“그…….”
“포인트를 벌고 싶은 네 마음은 잘 알겠어.”
“……?”
“포인트 때문에 대련 횟수를 늘리고 싶은 거잖아? 하지만 아무리 나한테 잘해 줘 봤자, 현재 내 여력상 대련 횟수를 늘리긴 힘들어.”
“……?”
“나도 마음 같아서는 대련 횟수를 늘리고 싶지. 하지만 막무가내로 대련을 늘리면 내 지출이 너무 커져.”
“…….”
유리는 멍하니 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 목적이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거네?’
원래 유리의 목적은 대련 그 자체에 있었다.
대련을 늘려 되도록 많은 취성을 받아 내는 것.
하지만 테레시아는 유리의 목적이 포인트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련 횟수를 늘려 포인트를 많이 벌고자 자신에게 잘해 준다고 여기고 있던 거다.
그로 인해 부담감을 느낀 거고.
모든 걸 파악한 유리가 돌연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
“내가 무슨 포인트만 밝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유리가 당당하게 가슴을 쭈욱- 내밀었다.
“나 현물도 받아!”
“……?”
“아니면 정보도 받음!”
“…….”
잠시 사고가 굳어 버린 테레시아.
그녀는 한참 만에 유리의 말뜻을 이해하고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포인트‘만’ 밝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밝힌다는 거였구나.”
“당연하지, 편식하면 몸에 안 좋아.”
내가 포인트를 벌고자 대련을 늘리기 위해 잘해 준다고?
테레시아가 그렇게 오해했다고?
‘세상에, 이리도 고마울 데가!’
유리의 눈깔이 희번득거렸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솔직하게 톡 까놓고 말할게. 앞으로 1만 포인트, 혹은 그에 준하는 현물이나 정보라면 언제든지 대련해 줄게.”
“흠…….”
테레시아는 고민했다.
유리의 제안이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이다.
‘1만 포인트 상당의 현물보다는… 정보가 낫겠네.’
당장 그녀가 가진 현물이 없기에 정보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이에 테레시아가 넌지시 물었다.
“…정보의 가치는 어떻게 매길 건데? 내가 알려 주는 정보가 1만 포인트짜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 거지?”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 나한테 도움이 된다 싶은 정보라면, 1만 포인트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값을 쳐 줄 수도 있어. 매우, 아주아주 양심적으로 가격을 책정할 테니까 걱정 마.”
유리의 답을 들은 테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녀 역시 유리와 자주 대련하기를 바라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좋아. 그렇게 해.”
그녀의 확답에 유리의 미소도 짙어졌다.
‘좋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좋았다.
상대방이 알아서 판을 깔아 준 것도 모자라, 제 패를 까고 판돈까지 두둑이 얹은 격이지 않은가.
1만 포인트, 현물, 정보.
애초에 목적인 대련 횟수를 늘리는 데 성공했으니 그 어떤 걸 받아도 자신이 손해는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 이득만이 있을 뿐.
‘거기다 대충 쓸 만한 정보에 1만 포인트를 책정해서 적당히 대련 횟수를 늘리기도 쉽고 말야.’
유리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자자, 그러면…….”
그가 눈을 빛내며 양손을 비볐다.
“오늘도 어찌… 대련 한판 하시렵니까?”
“할래.”
“요금은 뭐로 지불 하실 거죠? 포인트? 현물? 정보?”
“…정보로 할게.”
“정보 좋죠!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유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 * *
과거에는 테레시아의 전용 수련장.
그리고 지금에는 대련장으로 쓰이는 동굴.
그 안에서 금속성과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챙-!
쾅-!
유리와 테레시아.
새로운 대련 계약을 맺고 난 뒤로 그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대련을 이어 왔다.
칼과 창의 대결.
나아가 속도와 속도의 경쟁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련에서 아직은 그 누구도 완벽한 승기를 잡은 적이 없었다.
그저 모두 100합을 넘겨 자연스럽게 대련이 끝났을 뿐.
그리고 오늘의 이번 대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가 완벽하게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달라진 점은 있었다.
바로 공방의 비율이었다.
첫 대련에서 공격의 비율은 거의 50 대 50 정도.
하지만 다음 대련에서 바로 그 비율이 유리 쪽으로 넘어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유리가 55, 테레시아가 45였다.
유리의 공격 비율이 늘어나고 테레시아는 자연스럽게 방어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불과 며칠 만에.
이 사실을 깨달은 테레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달라.’
성장의 폭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신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 눈앞의 녀석은 몇 걸음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테레시아는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공방의 비율이 완전히 깨짐은 물론이요, 자신이 확연하게 밀리는 날이 올 거라고.
그날은 생각보다 더 금방 올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챙-.
‘여기서는 왼쪽.’
캉-!
‘다음에는 밑으로 파고들 테고.’
쾅-!
‘이 공격에는 늘 이런 식으로 대응한단 말이지.’
공방 비율은 이미 진즉에 무너진 상태라는 걸.
오로지 테레시아만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