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77
76화. 가죽 모으기 (2)
1월 20일 오전.
원형 경기장 내 상점을 빠져나오는 유리의 어깨에 작은 배낭이 걸려 있었다.
그의 표정은 딱히 좋지 못했다.
‘하… 이런 불필요한 지출이라니. 속이 쓰리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무려 1만 포인트가 넘게 사용되고 말았다.
정식 기수가 된 이래 가장 많은 지출이었다.
그리고 유리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단순히 불필요한 지출을 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째 반응이 영 찝찝하단 말이지.’
전날 유리는 테레시아에게 이번 통합 퀘스트에 관한 정보를 얻어 보려 했었다.
하지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1년 차 첫 번째 통합 퀘스트가 가죽 모으기라는 거.]테레시아는 그것만을 말하고 더는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머뭇머뭇.
이상할 정도로 정보의 누출을 꺼리는 듯한 그 태도.
이에 유리가 고작 이 정도로는 1만 포인트가 안 된다고 하자 그제야…….
[네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건 알지만, 그래도 건량을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열흘 치 정도.]…라는 추가 정보를 내뱉었다.
그에 따라 유리는 무려 1만 포인트와 약간의 포인트를 더 써서 건량 열흘 치와 배낭을 산 거였다.
그 뒤로도 유리는 더 정보를 얻어 내려 했으나 테레시아는 그대로 자신의 거처로 도망쳐 버렸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덕분에 유리는 이상할 정도로 찝찝했다.
‘가죽 모으기라…….’
그 이름대로라면 대충 어떤 동물을 사냥해서 가죽을 모으는 퀘스트일 거라고 짐작이 갔다.
거기에 자급자족할 수 있어도 건량 열흘 치를 준비하라는 테레시아의 추가 정보.
이로 미루어 보아 몇 가지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퀘스트가 열흘 동안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자신이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할 정도로 빠듯하게 일정이 흐를 것이다.
그렇기에 테레시아는 열흘 치 건량을 사라고 말했겠지.
‘어쩌면 시작의 숲처럼 어디에다 가둬 놓을지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게 가장 중요했다.
‘만약 이번 퀘스트가 열흘짜리 일정이라면… 퀘스트가 끝나자마자 바로 월말 평가다.’
그 소리는 다시 말해 이번 퀘스트가 1월 월말 평가를 좌지우지한다는 소리였다.
오늘 시작해서 열흘 동안 빠듯하게 일정을 돌리면 이제 이것 말고는 다른 퀘스트를 통해 포인트를 벌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유리는 원형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분명 자신이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었다.
‘뭐, 뭐야?’
집합 시간이 가까워지니 나타난 50기 기수들.
하지만 꼴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에 어울리는 적합한 표현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냐?’
패잔병 무리?
피난민?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아! 역병 든 거지 소굴이구나.”
유리가 그리 말할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했다.
여기저기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람들.
볼이 움푹 들어간 퀭한 얼굴.
기름으로 떡진 머리와 꼬질꼬질한 옷차림.
‘요람이 왜 이렇게 검은색 옷을 좋아하나 했더니… 다 이런 깊은 뜻이 있었네.’
나중에 가면 어차피 검게 변할 거 애초부터 그냥 검은 옷을 주자.
그게 요람의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유리는 천천히 역병 든 거지 소굴 사이를 거닐었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기에 꼴이 다 이 모양들이냐?’
유리는 귀를 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 난… 글렀어… 난 이미 진즉에 인간의 존엄성을 버렸어… 그, 그깟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벌레를… 벌레를 잡아먹…….”
“추워, 누가 불 좀, 귀가 잘려 나갈 거 같아…….”
“졸려…….”
“안 돼! 자지 마! 여기서 자면 골로 가는 거야!”
“쥐… 한 마리를 잘못 잡아먹었다가 사흘 동안 구토와 설사를 했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처참한 이야기와 신음들.
더는 듣기 거북해 귀를 닫으려는 찰나.
“젠장! 하루 치 식량이 1,000포인트라니! 고작 하급 퀘스트 하나 깨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 이건 먹고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 너도 그거 해 봤구나?”
“그럼 해야지. 먹고살려면.”
“성공했어?”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아서 성공은 했어.”
여기저기서 퀘스트를 통해 포인트를 벌었다는 이야기가 이따금 들려왔다.
‘벌써 퀘스트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네.’
지난 며칠간, 유리에게는 무엇보다 은신처 구축이 우선순위였기에 거기에 매진했었다.
그로 인해 퀘스트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는데.
‘은신처는 이제 어느 정도 해결됐으니 본격적으로 포인트를 벌어 보자고.’
그리고 그 시작은 이번 통합 퀘스트가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여 유리는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8시 50분.
흑검병들이 나타나기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때 그의 어깨를 두들기는 커다란 검지가 있었다.
톡톡-.
이미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거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유리.
그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그런데 이게 웬걸?
유리의 인사에 뽀삐가 시선을 휙 돌려 버리는 게 아닌가.
“……?”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유리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뭐야? 왜 지가 건드리고 못 본 척하는 건데?’
그리고 저건 또 뭐야?
마치 ‘나 심통 났어요’라는 듯한 저 면상은?
유리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 할 때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걔, 삐졌어.”
“삐져?”
익숙한 목소리에 유리가 돌아갔다.
곧 아린이 뽀삐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섰다.
“응, 우리 뽀삐 너한테 삐졌어. 어떻게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을 안 마주치지? 너, 우리 피해 다녔지.”
“응.”
“…진짜, 우리 피해 다녔어?”
“응.”
“아, 아무튼 그래서 뽀삐 삐졌어! 그리고 방금 나도 삐졌어! 그치?”
아린이 뽀삐의 허리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뽀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눈빛이 게슴츠레 변한 유리.
“아, 그렇구나. 삐졌구나.”
그는 그냥 그러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
그 냉랭한 반응에 뽀삐와 아린이 당황하고 말았다.
아린과 뽀삐가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동정심 유발 작전은 실패인가 봐.”
“배고프다.”
“우리 생각보다 더 냉혈한이었어. 보통 이쯤 되면 불쌍해서 왜 찾아다녔는지 이유라도 물어볼 텐데.”
“배고프다…….”
…다 들린다, 이것들아.
유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저들이 왜 저렇게 자신을 찾아다니는지.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순간부터 제대로 엮일 거 같단 말이지.’
그래서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안 물어봤다.
“배고프다?”
“다른 방법? 내가 한번 연구해 볼게.”
지난 며칠간 붙어 다닌 게 유효했을까?
이제 뽀삐는 아린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렇게 친해진 둘이 숙덕거리는 사이 시계는 9시 정각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칼같이 나타난 흑검병들.
저벅저벅-.
10명의 흑검병.
그 선두에는 지난번 50기를 향해 신랄한 비난을 했던 안경남이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널브러져 있던 기수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턱-.
“모두 주목.”
나직한 목소리가 마나를 타고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이에 50기 전원이 자신을 바라보자 안경남이 살짝 고갯짓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흑검병들이 움직이며 50기에게 무언가를 나눠 주었다.
“그게 바로 앞으로 5년간 너희가 50기임을 나타낼 증거다. 잃어버리면 포인트로 사야 하니까 잘 간수해라.”
흑검병들이 나눠 준 물건, 그건 다름 아닌 견장이었다.
이를 받아 든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50기는 빨강이라.’
49기 노랑, 48기 초록, 47기 파랑, 46기 하양.
아마 45기가 빨강이었고, 그들이 수료하면서 그 색을 50기가 물려받았을 터.
그렇게 50기 전원에게 견장이 전부 돌아가니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장 다음으로 이어졌다.
“지금부터 이동한다,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버리고 간다. 잘 따라오도록.”
그러고는 빠르게 걸어가는 흑검병들.
난데없는 이동에 견장을 어깨에 달려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 그들을 쫓았다.
그렇게 조금 걸어간 뒤.
“속도를 높인다.”
흑검병들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이후 속도는 차츰차츰 더 높아져 결국 일반인이 전력 질주 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 상태로 쭉 1시간을 내달렸다.
헉헉-.
안 그래도 요람에 적응하느라 상당히 체력이 깎여 나가 있던 상태.
기초 체력이 약한 이들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결국 비 오듯 땀을 쏟아 낼 때쯤.
마침내 달리기가 멈췄다.
그렇게 흑검병들이 50기를 데리고 온 곳은 북쪽 구역 어딘가, 나무 울타리가 쳐진 곳이었다.
높이가 2m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 기둥을 박아 만든 울타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안경남이 외쳤다.
“동물의 숲에 온 걸 환영한다.”
이에 누군가가 ‘또 숲이야? 저번에는 시작의 숲이더니만, 이번엔 동물의 숲? 창의력 하고는’이라고 투덜거렸다.
안경남은 ‘입술을 삐죽거리는 검은 머리’를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지금부터 딱 한 번만 설명할 것이며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 말에 50기는 집중했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공간에 안경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1년 차 통합 퀘스트는 이 경계 안쪽에서 총 열흘간 치러진다. 퀘스트의 명칭은 가죽 모으기.”
안경남이 제 어깨 뒤, 나무 울타리를 가리켰다.
“퀘스트의 내용은 이름처럼 저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짐승을 잡아 가죽을 모아 오면 된다. 동물은 토끼, 사슴, 늑대, 곰, 호랑이, 총 다섯 종이 있으며, 당연하게도 가죽별로 지급되는 포인트가 다르다.”
안경남은 그 자리에서 가죽별 포인트를 읊어 주었다.
토끼 가죽 1장에 1,000포인트.
사슴 가죽 1장에 5,000포인트.
늑대 가죽 1장에 50,000포인트.
곰 가죽은 1장에 500,000포인트.
그리고 호랑이 가죽은 무려 5,000,000포인트.
그 이야기에 50기의 눈빛이 돌변했다.
‘토끼 가죽 한 장에 천 포인트라고?!’
‘호랑이 가죽이 500만? 호랑이 가죽 한 장이면… 건량이 무려 5천 일 치야!’
‘곰만 잡아도 충분하겠어!’
꼬박 하루가 걸리는 하급 퀘스트 한 번에 천 포인트를 벌었건만, 여기서는 토끼 한 마리만 잡으면 1천 포인트란다.
일반 퀘스트의 포인트가 얼마나 짠지 알고 있던 이들에게 이번 퀘스트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못해도 이번 퀘스트에서 10만… 아니, 20만 포인트는 벌어 간다!’
‘호랑이 한 마리만 잡자!’
50기들의 눈에 의욕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의욕에 기름을 붓는 소리가 이어졌으니.
“퀘스트가 끝나는 날, 가장 많은 가죽, 즉 합산한 포인트가 많은 세 명을 추려, 3등에게는 30%를, 2등에게는 50%를, 1등에게는 100%를 추가 지급할 예정이다.”
“……?!”
그건 다시 말해 1등을 하게 된다면 번 포인트의 두 배를 가져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번 퀘스트는 개별 퀘스트이나, 협력을 해도 무관하다. 단, 경계 밖을 벗어나는 순간 탈락으로 간주한다.”
그리 말하고는 시계를 확인하는 안경남.
“현 시각 1월 20일 10시 16분. 퀘스트 종료 시각은 1월 29일 10시 16분이다.”
그가 입구에서 비켜서며 말했다.
“시작해라.”
그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는 50기.
그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유리는 가장 뒤쪽에 서서 턱을 쓰다듬었다.
‘동물의 숲이라…….’
하여간 이 창의성 없는 것들.
이름 좀 잘 짓지, 뭐만 하면 무슨 무슨 숲이라고 하고 있냐.
사방팔방이 숲인데.
속으로 그리 꿍얼거리며 유리는 울타리를 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울타리의 나무 기둥은 조금 마른 사람이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거기에 대충 줄로 묶어 둔 상태 하며.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이걸로 호랑이는 고사하고 토끼가 빠져나가는 것도 못 막을 텐데?’
저 울타리는 외부의 침입, 혹은 내부로부터의 탈주를 막기 위한 용도가 아닌 단순히 경계를 긋는 용도가 확실했다.
그런데 흑검병들이 말하는 걸 보면 저 안에 짐승을 풀어 놓은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텟샤는 분명 식량을 준비하라고 했어. 그런데 짐승이 있으면 굳이 식량을 준비할 필요가 없을 텐데? 뭐지? 분명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직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건량이 필요 없더라도 잘 챙겨 뒀다가 나중에 먹으면 되는 거고.
만약 이 건량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딱 보아도 지금 식량을 준비해 온 사람은 자신뿐인 거 같았으니까.
그리 생각을 정리한 유리가 울타리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유리를 마지막으로 50기 전원이 동물의 숲으로 들어서자.
끼익- 쿵!
동물의 숲 입구가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