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79
78화. 가죽 모으기 (4)
살랑살랑 자신을 향해 흔들어 대는 하얀 손을 보며 제리 비의 구겨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왜 안 그러겠는가.
가게가 장사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첫 손님을 받고 폐업하게 생겼는데.
‘제기랄, 왜 하필 첫 손님이 쟤야?!’
자신은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이번 퀘스트에서 딱 한 사람만 만나지 않기를.
그게 어려우면 되도록 마지막에 마주치기를.
딱 그것만을 바라고 바라며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를 드렸건만.
‘…역시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거였어.’
첫 손님으로 하필 기피 1순위 녀석과 떡하니 마주치다니.
‘유리 홀랜드.’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후배의 이름을 알게 된 건 50기 백보 의식에 참관하면서였다.
백보 의식의 마지막 생존자가 자신의 머리를 짱돌로 찍었던 그 미친 또라이라는 사실에.
나아가 그 녀석이 열다섯 걸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을 때, 제리는 기겁했다.
‘저게… 백룡패라고?’
제리는 처음 유리를 백룡패로 여겼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터무니없지! 저게 무슨 백룡패냐! 장담하건대 무조건 흑룡패다!’
그때 짱돌에 머리만 터진 게 다행이었던 거다.
사지는 멀쩡했으니까.
그걸 깨달으며 제리는 결심했다.
다시는 유리 홀랜드란 놈과 엮이지 않기로.
‘세상에서 기피해야 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또라이라면.’
그보다 더 기피해야 할 존재는 실력 있는 또라이였다.
하물며 유리 홀랜드는 역대급으로 실력 있는 또라이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엮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했건만, 제리가 유리를 피해 다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아주 결정적인 이유.
[별거 아냐. 나중에 내 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지난번 용패갈이에서 유리에게 정보를 얻는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부탁.
그게 문제였다.
‘이 또라이가 무슨 부탁을 해 올 줄 알고?’
제리가 그 부탁을 어떻게 넘기나 하고 고민하는 사이 유리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뭐야, 나 안 반가워?”
그 물음이 있기 무섭게 굳어 있던 제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멋진 후배 유리 홀랜드 님 아니십니까? 반갑지요, 반갑고말고요!”
그리 너스레를 떨며 제리는 기절한 토끼남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가죽 조각 한 장이 들려 나왔다.
새하얗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정사각형 가죽.
제리가 그 흰 가죽을 유리의 왼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우리 후배님 노고가 많으시네. 먼저, 이거 받으시고.”
그러고는 이번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도 가죽을 꺼냈다.
토끼의 것과 같은 모양이지만 색만 노란색인 가죽.
제리는 그걸 유리의 오른손에 쥐여 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자자, 이것도 넣어 두시고. 우리 후배님이라면 이게 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하얀 건 토끼 가죽, 노란 건 사슴 가죽. 이렇게 합치면 6천 포인트!”
“이야, 역시 우리 쩨리 선배가 눈치 하나는 참 기똥차단 말이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우리 쩨리 선배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그래?”
사슴의 자발적인 상납에 유리의 얼굴이 대번에 편안해졌다.
마치 귀찮음을 덜었다는 듯한 그 표정에 제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자발적 상납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제리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러게 말이야, 하여간 눈치 없는 것들! 아차차! 내가 여기서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는지 설명을 안 해 줬구나? 토끼랑 사슴 역할을 하는 게 우리 퀘스트거든.”
“호오?”
“토끼는 실력에 상관없이 아무나 참여 가능, 다만 공격을 못 함! 사슴은 오로지 비공인 1급의 실력자만 참여할 수 있으며 선공을 못 하는 대신 얼마든지 반격은 할 수 있어. 다른 동물들의 규칙이 어떤지는 나도 잘 몰라. 이거 올해 생긴 퀘스트라.”
“그래? 다른 건? 또 없어?”
“당연히 있지!”
제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 성격상 분명 아는 걸 다 불 때까지 괴롭힐 거다.’
그러니 그냥 순순히 부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로우리라.
그건 이미 유리를 한 번 겪어 본 제리였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또한, 이는 유리가 ‘부탁’을 떠올리지 못하게 신경을 분산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리는 유리가 묻지도 않은 정보를 필사적으로 풀어냈다.
“토끼가 깡춍, 사슴이 음메라고 우는 건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라고 위에서 시…….”
“그딴 쓸데없는 건 빼고.”
“…켜서 하는 거라는 쓸모없는 정보는 치우고! 토끼는 가죽 50장, 사슴한테는 가죽 20장이 지급돼. 그리고 지금처럼 제압당해서 가죽을 빼앗기면 사망 처리, 이후 천당에 가서 가죽을 재보급받고 숲으로 다시 투입되는 거지.”
“오? 재밌네.”
“아! 그리고 가죽 모으기 퀘스트가 끝나는 날 동물 역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남긴 가죽 수만큼 정산받아. 가죽별로 책정된 금액은 사냥꾼, 즉 50기에게 고지된 것과 같고.”
“아하, 똑같은 가격의 가죽을 놓고 동물은 최대한 많이 지키는 게 목적, 사냥꾼들은 최대한 많이 잡아 족치는 게 목적이네?”
“그런 거지!”
유리가 이해한 듯 보이자 제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스리슬쩍 발을 빼는 게 아닌가.
“그럼 이 가련한 사슴 영혼은 부활을 위해 천당으로 가 봐야 해서, 이만…….”
제리는 유리가 부르기 전에 잽싸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잠깐.”
끼익-.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제리의 몸이 우뚝 멈추어 섰다.
“왜, 왜?”
그가 어색하게 경직된 얼굴로 돌아서니 그곳에는 조소 짓는 유리가 있었으니.
히죽거리는 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리가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이야, 우리 쩨리 선배가 이렇게 봉사 정신이 투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그럼 앞으로 내가 할 부탁도 이렇게 친절하게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
…최악이다.
저 망할 새끼는 다 알고도 그냥 자신이 하는 것을 지켜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제리였다.
“다, 당연하지! 무슨 부탁인데?”
“내 부탁이 뭐냐면…….”
“뭐, 뭐냐면?”
“뭐가 좋을까?”
“……?”
“아! 그거다!”
“뭐, 뭔데?”
“지금 말할까?”
“…….”
“말까?”
…이 새끼가 진짜.
제리의 볼이 파들거리는 걸 본 유리는 눈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할까?’
더 괴롭혔다가는 울지도 모르겠네.
그리 생각한 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다, 그냥 나중에 더 좋은 거 생각나면 그때 부탁해야겠다.”
그 말에 제리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럼… 나 정말로 간다?”
“응.”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 나갔다.
아니, 튀어 나갔을 것이다.
유리가 또다시 부르지만 않았다면.
“쩨리 선배.”
“아… 또 왜?”
진짜 울 거 같은 제리의 표정.
이에 유리가 피식거리며 기절한 토끼남을 가리켰다.
“저건 안 챙겨 가?”
“…….”
원래는 챙기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제리.
“채… 챙겨 가야지.”
그는 유리가 또 말을 걸까 싶어 재빨리 동기를 둘러업고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제리의 등을 향해 유리는 열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또 보자고!”
그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제리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빨린 듯 퀭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제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유리는 제 손 안에 들린 토끼와 사슴 가죽을 내려다보았다.
“흠… 이게 6천 포인트라.”
이 숲에 풀린 동물들이 모두 몇 마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토끼 한 마리당 50장의 가죽, 사슴 한 마리당 20장이면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포인트였다.
욕심내지 않고 토끼와 사슴만 잡아도 충분히 많은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 터.
이에 유리의 두 눈에 탐욕의 빛이 일렁였다.
“이거 완전… 노다지잖아?”
숲에 포인트가 나 잡아갑쇼 하고 걸어 다니는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광란의 사냥 시간이다.
츠팟!
1분 1초가 아까웠던 유리가 잽싸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근육질 사슴남에게 공격당한 50기가 눈깔을 뒤집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케륵!”
풀썩-.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5명의 50기가 널브러져 있었으니.
시작은 열댓 명이었으나 처음에 덤벼든 이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머지는 뿔뿔이 도망쳐 버린 거였다.
그나마 남아서 덤벼든 게 4명.
물론 그들도 결국에는 처음 기절한 동기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킁!”
사슴남은 기절한 이들을 보고 콧김을 뿜어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확실히 정식 기수가 된 놈들이라 그런지 용패갈이 때의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네.’
고작 4명을 상대했음에도 땀을 흘릴 정도라니.
일정 인원이 넘어가면 자신도 몸을 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슴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널브러진 50기가 있는 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도착했다.
스륵-.
검은 옷, 검은 모자, 검은 복면을 한 이들.
그중 한 명이 기절한 50기를 슥 훑어보며 말했다.
“모두 지옥으로 보내라.”
명령한 이가 가장 상급자였는지, 나머지 흑의인들이 기절한 50기들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러고는 곧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갔다.
* * *
굵은 나무 둥치.
그 뒤편에 몸을 숨긴 토끼 귀 소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극도로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
그러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먹고살기 힘들다.”
이번 가죽 모으기 퀘스트는 기존 기수들에게도 꽤 포인트가 쏠쏠한 퀘스트였다.
숲속에서 잘만 도망쳐 다닌다면 아무리 토끼 역할이라고 해도 최대 4만 포인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때문에 가장 실력이 떨어지고, 다른 동물 역을 맡지 못하는 이들이 토끼 역을 자처했다.
‘첫날부터 조금 힘드네.’
아무래도 이번 50기는 한 번에 무려 300명이나 들어와서 그런지 피해 다니기가 조금 버거웠다.
‘뭐, 그래도 조금 있으면 나아지겠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마 숲을 활보하는 50기의 숫자가 꽤 많이 줄어들리라.
그때가 되면 여유가 좀 생길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소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아닌 이상, 계속해서 움직여야지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그렇게 토끼녀가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푸스럭-.
탁-.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누……?!”
토끼녀가 놀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검은 그림자가 더 빨랐다.
퍽-.
뒤통수에 이는 강렬하고 아찔한 충격에 토끼녀의 시야가 검게 물들어 갔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황금빛 안광이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의 눈빛 같은.
풀썩-.
그렇게 토끼녀가 쓰러지고.
주섬주섬-.
토끼녀의 품에서 가죽을 꺼낸 유리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한쪽 주머니는 꽤 두툼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 * *
유리는 종횡무진 숲을 누볐다.
그는 토끼와 사슴이 눈에 띄는 족족 뒤통수를 후려 까며 가죽을 챙겼다.
그렇게 그가 챙긴 가죽은 토끼 22장, 사슴 6장.
그 정도를 챙기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6시간 정도였다.
이는 숲속을 활보하고 있는 50기 중 단연코 독보적인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
이 불타오르는 탐욕은 숲의 토끼와 사슴의 씨가 말라야지만 멈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유리는 눈깔을 번뜩이며 빠르게 숲을 돌아다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여기, 구역이 나뉘어 있는 거 같은데?’
일정 경계를 두고 가장 외곽에 토끼가, 그 바로 안쪽에 사슴의 구역이 있는 듯싶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금 더 상위 포인트의 짐승들이 등장할 거다.’
지금에야 토끼와 사슴의 개체 수에 여유가 있어서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그러나 토끼와 사슴이 부활하는 속도보다 죽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면, 다른 기수들도 안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자신이 잡는 속도보다 토끼와 사슴이 부활하는 속도가 느린 것도 문제였다.
처음에는 자주 보이던 토끼와 사슴이 차차 시간이 흐를수록 찾기 힘들어졌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6시간 동안 이것보단 더 모았을 텐데.’
따라서 유리는 슬슬 사냥 구역을 안쪽으로 확대할 생각이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이 안쪽은 늑대의 영역이겠네.’
유리의 발길이 늑대 소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