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86
85화. 지옥 (5)
가볍게 몸을 움직여본 유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와… 이게 무슨?”
단순히 주무르기만 했는데 통증이 가라앉다니?
아니, 이 정도면 조금 전에 비해 거의 다 나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리는 놀란 눈으로 뽀삐를 바라보았다.
뽀삐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이에 유리는 뽀삐가 자신에게 해 준 게 단순한 지압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에 뽀삐가 순박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 순간 끼어든 목소리.
“오와! 방금 그게 그 유명한 윰족의 약손이야?”
아린의 질문에 뽀삐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리는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해졌다.
“약손?”
“신체 회복을 비약적으로 북돋아 주는 윰족의 고유 비전이야. 윰족 내에서도 익힌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어?”
유리의 질문에 답을 하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생각해 보니 약손은 윰족의 수도사만 익힐 수 있다던데? 뽀삐 너, 수도사였어?”
끄덕끄덕-.
“세상에, 어쩐지! 그럼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구나?”
끄덕끄덕-.
“금제 고행 중인 거야?”
끄덕끄덕-.
신이 나서 떠드는 아린과 흐뭇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뽀삐.
그들의 대화에 유리는 요한이 해 준 말이 떠올렸다.
[고대 거인족의 후예.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수도사라 불리는 족속이 있다. 고행을 통해 영혼의 광명을 찾는 변태들이지.]‘아아, 뽀삐 쟤가 그 변태 중 하나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아린에게 시선이 갔다.
‘그런데 쟤는 생각보다 아는 게 많네?’
뽀삐가 윰족인 것을 알아채지 않나.
단지 한 번 본 거로 단번에 약손을 알아보지를 않나.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한 푼수인데 생각보다 아는 것도 많고 안목도 높았다.
그렇게 유리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뽀삐와 아린은 여전히 대화 중이었다.
“근데 윰족의 수도사가 요람에는 어쩐 일이야? 윰족도 폐쇄적인 거로 유명하지 않나?”
“배고프다.”
“윗분들이 시켰다고? 왜?”
도리도리-.
“몰라?”
“배고프다.”
“그냥 운명의 흐름이 나를 인도하겠거니 싶었다고?”
끄덕끄덕-.
“아하하, 그게 뭐야! 결국 그냥 되는 대로 산다는 거잖아?”
“배고프다!”
“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 게 화내지 마.”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듣는 건데?”
유리의 말처럼 아린은 신기할 정도로 뽀삐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저 ‘배고프다’만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물음에 오히려 아린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답했다.
“응? 처음에는 나도 좀 헷갈렸는데 계속 듣다 보니 알아듣겠던걸? 넌 안 돼?”
“…되겠냐?”
“이상하네? 왜 안 되지?”
“배고프다?”
마치 넌 왜 그게 안 되냐는 듯한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는 아린과 뽀삐.
이쯤 되니 못 알아듣는 자신이 비정상이 된 기분이었다.
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게 잘 알아들으면 대체 그동안 왜 날 찾아다닌 건지, 그 이유나 좀 물어봐 봐.”
“아, 그건 내가 예전에 물어봤어.”
“뭐랬는데?”
“널 따라다닌 건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널 따라다닌 거래. 마치 운명처럼. 그치?”
“배고프다!”
끄덕끄덕-.
아린의 말이 맞다는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뽀삐를 보고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명이라…….”
솔직히 그딴 건 믿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샤리 귀걸이.’
윰족 수도사의 몸에서 나온 샤리라는 물체.
아마 저 녀석은 그거에 끌린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한 순간.
‘…끌려?’
유리의 머리 위로 띠링- 하고 깨달음의 전구가 켜졌다.
그가 뽀삐를 향해 물었다.
“뽀삐!”
“……?”
“너 혹시… 귀신도 잡을 수 있냐?”
“배고프다.”
뽀삐가 무어라 답했으나 알아듣지 못한 유리는 아린을 쳐다보았다.
얼른 해석해 달라는 눈빛에 아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지는 못한대.”
“아…….”
약간 실망한 듯한 유리.
하지만 이내 그의 낯빛을 환히 밝히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대신 때릴 수는 있대.”
“…엉?”
“잡지는 못하는데 때릴 수는 있다네?”
이를 들은 유리가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뽀삐의 어깨에 턱- 하고 손을 올렸다.
“뽀삐여…….”
“……?”
“그대에게 내 곁을 허하노라. 날 항상 따라다니도록.”
찾았다, 나만의 귀신 퇴치제.
내 크고 소중한 귀신 막이 부적!
“배, 배고프다?”
알 수 없는 유리의 태세 전환에 당황한 뽀삐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린이 둘 사이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나는? 나느으은!”
칭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유리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도 귀신 잡을 수 있냐?”
“미쳤어? 그걸 어떻게 잡아? 아니, 그걸 떠나서 세상에 귀신이 있긴 해?”
“기각.”
유리가 손가락 하나로 아린의 이마를 밀어냈다.
이에 아린이 목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 왜! 나도 껴 줘!”
“싫어.”
“왜!”
“내 마음.”
“그런 게 어딨어?”
“그것도 내 마음.”
손가락으로 열심히 밀어내도 아린이 아득바득 버티자 참다못한 유리가 짜증을 냈다.
“아니, 너는 왜 그렇게 여기 못 껴서 안달인데?”
“너희랑… 아니, 너랑 있으면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아서?”
“…고작 그거 때문에?”
“응.”
“정말?”
“응.”
유리가 손가락 하나를 더 추가해 아린의 이마를 밀었다.
“완전 기각. 넌 무조건 탈락.”
“아, 왜! 나, 밥도 조금만 먹을게. 말도 잘 들을게!”
“그래도 기각.”
“이익, 나 활도 잘 쏘잖아! 우리의 좋았던 그 시간을 잊은 거야?”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린의 눈망울에 유리는 잠시 멈칫거렸다.
물론 그녀의 눈빛에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저 실효성을 따지고 있을 뿐.
‘확실히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쓸 만했지.’
특히 아린은 요람에서 흔치 않은 궁수이며 자신과도 제법 합이 잘 맞았다.
물론 아직 다른 50기의 실력이 어떤지 모른다.
그나마 테레시아와 붙었던 군터의 실력만 어느 정도 파악해 놓은 상태.
‘그 녀석도 꽤 쓸 만하긴 했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개별이 아닌 누군가와 협력해야 하는 퀘스트가 나온다면 유리는 1순위로 아린을 영입하리라.
‘그렇다면 미리미리 합을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유리는 슬그머니 아린의 이마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응?”
머리를 미는 힘이 없어지자 아린이 의아한 눈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더 실력 검증하고 받아 주든지 할게.”
“정말?”
아린의 눈이 순식간에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가 유리와 뽀삐의 어깨에 팔을 얹고 기뻐했다.
“와아아아!”
정말로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모습에 유리는 왠지 모르게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다 잠시 무언가를 자각하고 아린과 뽀삐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말야… 니들 여기가 어딘지 아냐?”
그 말을 하며 유리는 주변 둘러보았다.
작은 막사 안, 뽀삐와 아린의 것으로 보이는 모포가 굴러 다니고 있었다.
딱-보니 이 녀석들도 자신처럼 기절해 있다 깨어난 듯싶었다.
그런 유리의 물음에 뽀삐와 아린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배고프다.”
“몰라, 우리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어.”
“쯧, 일찍 일어나서 뭐 했냐? 여기가 어딘지 확인도 안 하고.”
“너 언제 깨어나나 구경했는데?”
“배고프다.”
옆에서 같이 구경했는지 뽀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펄럭-.
막사의 입구가 펄럭이며 한 사람이 들이닥쳤다.
놀란 셋이 입구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흑검병이 서 있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셋의 시선에 흑검병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하? 이것들 봐라? 아직도 처자빠져 있어? 여기가 네놈들 집인 줄 알아!”
그 말투에 유리는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의 눈알이 데룩데룩 움직였다.
‘…뭐지, 이 시큼털털한 음식 쓰레기 냄새가 풍기는 말투는?’
어디선가 맡아 본 듯, 익숙하고 위험한 냄새를 감지하자마자 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흑검병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오호라? 그나마 조금은 눈치가 있는 놈이 있군. 나머지는… 뭣들 하나, 기상!”
막사 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도 여전히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아린과 뽀삐.
유리가 그들의 엉덩이를 툭툭 발로 찼다.
그제야 둘이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나자 흑검병이 냉소를 지으며 유리를 지목했다.
“거기 가운데 검은 머리.”
“네.”
“저 얼빵한 두 녀석은 네가 인솔해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흑검병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이에 유리가 아린과 뽀삐를 향해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 재빨리 흑검병을 쫓았다.
펄럭-.
그렇게 막사를 빠져나온 세 사람이 마주한 건…….
“……?!”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뽀삐와 아린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게… 뭐야?”
“배, 배고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눈에 비친 광경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나.”
“저엉신!”
“둘.”
“토옹일!”
“목소리가 작다! 이것밖에 안 나오나! 하나아아아!”
“저어어어엉신!”
“두우울!”
“토오오오오오옹일!”
지름이 30㎝에 달하는 거대한 철봉에 달라붙은 4명.
그들은 안간힘을 써 가며 철봉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으아아아!”
“끄아!”
힘든 건 물론이고, 훈련이 고통스러운지 마체술을 익힌 이들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 게 무려 5개 조였다.
어디 그뿐이랴?
철퍽- 철벅-.
질척하게 만들어진 진흙 위에서 괴상한 족쇄를 차고 쪼그려 뛰기를 하는 이들이 이십여 명.
저 멀리 맨몸으로 암벽을 타고 오르는 이들이 이십여 명.
혹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팔굽혀펴기 하는 이들까지.
사방팔방에서 비명, 신음, 괴성, 고함이 울리며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그나마 편해 보이는 건 한쪽 구석에서 제식 훈련을 받는 이들이랄까?
그 모든 걸 훑어보는 유리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옘병… 어째 흑검병 말투에서 익숙한 짬내가 난다 싶었더니만.”
과거, 그가 몇 개월 정도 잠시 몸담았던 용병군 기초 훈련소가 딱 이랬다.
심지어 전반적인 시설 분위기도 비슷했다.
사방을 감싸고 있는 가시 철조망 울타리.
혹여 발생할 탈주병을 감시하기 위해 울타리 곳곳 높게 세워진 망루까지.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어린 시절 겪었던 용병군 기초 훈련소에서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용병군 기초 훈련만 받아도 보수를 곱빼기로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들어갔다가… 두 달 동안 지옥을 맛봤지.’
유사시 용병들로 정규군을 만들겠다는 어느 미친 작자의 발상에서 시작된 용병군.
그리고 그 용병군들을 위해 지어진 기초 훈련소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거친 용병들이 모인 환경.
그런 용병들을 다잡기 위해 더 거칠고 기센 교관들이 투입됐고, 매일같이 그로 인해 고문 같은 훈련이 자행되었다.
거기다 고작 며칠 일찍 들어왔다고 선배 노릇을 하려는 이들의 온갖 패악질까지 더해짐으로써 그야말로 생지옥이 탄생했다.
당시 화신으로 인해 몸이 안 좋던 유리는 이 악물고 버티며 겨우 수료하였지만, 덕분에 한 달은 골골거려야 했다.
‘아으, 소름 돋아. 아으, 짬내!’
용병군에서 지급되던 그 맛대가리 없던 군용식, 일명 짬밥의 맛과 냄새가 떠오른 유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그는 앞서가고 있는 흑검병을 놓칠세라 얼른 따라붙었다.
그가 움직이자 뽀삐와 아린도 유리를 쫓아 움직였다.
그렇게 흑검병을 쫓아간 곳.
거긴 [재판소]란 푯말이 붙은 거대한 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