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94
93화. 은혜 갚은 호랑이 (2)
처음 성(聖)의 경지를 듣고 어째서 성스럽다는 명칭이 붙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거 같았다.
마치 맑고 투명한 빛을 보석에 담아 세공한 듯.
은은하면서도 강렬함을 자아내는 모순적인 느낌.
이를 성스럽다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성스럽단 말인가.
자신이 목표로 했던 성의 경지까지 두 눈으로 확인한 유리는 실소했다.
‘하하, 이거야 원, 진짜 이 악물고 패려고 하네.’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부터 한 대라도 잘못 맞았다간 정말로 죽는다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한 대가 아니라 두 대가 남았다는 거지.’
유리의 눈에 짙은 긴장이 감돌았다.
터벅- 터벅-.
호피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사냥에 성공한 호랑이의 걸음처럼 같아 보였다.
빈사 상태에 빠진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완전히 숨통을 끊어 내기 위한 걸음걸이.
호피녀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가 유리의 시야에 그득그득 담겼다.
‘강해.’
유리에게 강함이란 것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준 이는 요한이었고.
유리가 만난 이 중 가장 강한 사람은 검주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직접 싸워 본 이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눈앞의 저 여인이리라.
‘공인 6단이라…….’
분명 자신이 겪은 것보다 더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성권을 사용할 정도였다니.
저 정도면 흑검병 조장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이일 거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덤벼드는 게 만용일 정도.
하지만 유리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후우… 가자.”
그러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하나, 둘, 셋.
가볍게 내디딘 발걸음은 서서히 빨라졌고, 어느 순간 유리는 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호피녀를 향해서.
‘맞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맞지 않으면 되는 거다!’
츠극-.
유리의 전신에서 마류의 거미줄이 뽑혀 나왔다.
동시에 그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뇌익은 이미 4번.’
앞으로 뇌익은 한 번이 최대치였다.
그리고 호랑이에게 남은 공격 횟수는 2번.
그 말은 다시 말해 그 두 번 중 한 번은 뇌익 없이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순간 이동이라 생각될 정도의 초고속 공격을 말이다.
특히나 9번째 합에 뇌익을 소모한다면 마지막 열 번째는 합을 나누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할 터.
때문에 유리는 마류를 꺼내 들었다.
‘최후의 순간, 허를 찌를 용도로 쓰려고 했던 건데.’
그러기 위해 호랑이와의 첫 싸움에서도 끝까지 마류를 사용하지 않고 버티지 않았던가.
하지만 상황이 꼬이면서 어쩔 수 없이 마류를 꺼내야 했다.
지금은 마류를 사용하지 않으면 호랑이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보다 정밀하고, 더 빠르게 예측한다.’
호랑이를 향해 달려 나가며 유리는 마류의 거미줄에 집중했다.
세밀하게 뽑아낸 거미줄을 타고 미세한 흐름이 전달됐다.
바람의 흐름.
지면의 떨림.
소리의 진동.
그리고 작은 마나의 파동까지.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정보가 되어 전달되었고 유리는 그 모든 걸 받아들이며 일일이 분석했다.
‘호랑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따라가면 늦어.’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수를 예측해서 뇌익으로 대응해 왔었다.
이는 보통 호피녀보다 1수 정도 앞선 예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뇌익을 사용하지 못한다.
고작 1수 정도를 앞서는 거로는 호피녀의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상황의 정보를 계산해 2수, 혹은 그 이상의 수를 예측하는 거였다.
‘거리는 10m.’
예측 공간을 그 이하로 줄여 버리면 수를 읽는다고 해도 호피녀의 고속에 따라갈 수 없다.
최소 10m 너머에서 수를 읽어야 했다.
그리 생각한 순간, 유리를 중심으로 뻗어 있던 마류의 거미줄이 줄어들었다.
대신 더욱더 촘촘하게 그물을 형성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탓-!
정면에 있던 호피녀가 사라졌다.
초당 수십 가지의 정보를 분석하는 유리의 뇌가 마류의 거미줄에 걸린 흐름의 신호를 감지했다.
‘어디… 어디로 오냐!’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호피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동시에 그의 심상에 호피녀의 잔상이 여러 개 나타났다.
그건 유리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뽑아낸 호피녀의 예상 경로였다.
그렇게 생겨난 잔상의 경로가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잔상이 하나만 남은 순간.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거다!’
사방으로 뻗어 있던 마류의 거미줄이 순식간에 압축되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물처럼, 바람처럼 유리의 주변에 흐르는 마류.
그 중심에 빛이 생겨났다.
스팟!
호피녀의 성권이었다.
어느새 유리의 지척에 다다른 호피녀의 주먹.
유리는 검을 들어 올리며 주변의 마류를 통제했다.
그가 조종하는 흐름은 호피녀의 성권에 간섭해 들었다.
그그그그-.
엄청난 물리적 힘이 담겨 날아 온 방패를 역으로 쳐 낸 것도 모자라, 5m의 뽀삐까지 함께 날려 버린 성권이었다.
그 힘을 억지로 비틀어 흘려내려 하니 주변의 흐름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유리는 최선을 다해 성권의 힘을 흘려 보냈다.
그 시간은 고작 1~2초에 불과했지만, 유리는 족히 수십 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키기기기깅- 스걱-.
유리와 호피녀 사이에서 불똥이 튀고 호피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핑그르르 공중 제비를 돈 호피녀가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한편 앞으로 달려가던 유리는 몸을 180도 틀어 뒤로 주륵- 미끄러졌다.
즈즈즉-.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침내 멈춰 선 유리.
살짝 상체를 숙인 그의 입에서 울컥 핏물이 터져 나왔다.
쿨럭-.
“거, 드럽게… 쎄네.”
백보 의식에서 검주의 기세를 상대하면서 느낀 건 제어해야 할 흐름이 강할수록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그리고 호피녀의 성권은 유리가 열다섯 보를 걸으며 견뎌 낸 검주의 기세보다 훨씬 더 강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소리였다.
호피녀는 유리가 걸어 낸 열다섯 보 너머,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이였으니까.
슥-.
유리는 피 묻은 입술을 대충 닦아 내며 호피녀를 응시했다.
그의 입술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 *
호피녀는 저 멀리 자신을 향해 피 묻은 미소를 짓는 소년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성을 향한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그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격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짙은 흥분으로 인한 두근거림이었으며, 호적수를 마주하며 생겨난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한데 그런 기분을 느끼는 상대가 저 어린 기수였다.
자신과 11살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요, 경지까지 한참이나 낮은 소년.
그런 이를 상대로 호피녀는 호적수를 마주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지루하던 일상에 작은 즐거움이 찾아들었겠거니 싶었을 뿐.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방향을 꺾는 괴상한 화살이 날아들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거인이 방패를 집어 던지고.
작았던 즐거움은 조금 더 재밌는 유흥거리가 되었으며.
이제는 근래 들어 가장 흥미로운 사건으로 변해 있었다.
뚝뚝-.
호피녀는 고개를 돌려 손등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응시했다.
팔뚝에서 시작해 어깨까지 이어진 자상.
그건 꽤 깊은 상처였다.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호피녀는 저 멀리,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고작 공인 1단 수준의 기수를 상대로 성권을 사용한 건, 조금 흥분하여 과하게 손을 쓴 감이 없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그런데 저 녀석은 성권을 막아 냈다.
유리를 바라보는 호피녀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조금 전 그건 뭐였을까?’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을 때, 알 수 없는 힘이 간섭하여 자신의 성권을 비틀었다.
이에 호피녀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간지럼을 느꼈다.
그녀는 알고 싶었다.
자신의 성권을 비튼 저 녀석의 힘이 무엇인지.
또한 자신의 가슴속에 생겨난 이 간지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를 알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조금 전의 것을 또 한 번 겪어 보면 될 뿐!
그녀가 유리를 향해 물었다.
“너, 이름이 뭐였지?”
“유리 홀랜드.”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유리 홀랜드… 유리 홀랜드.”
잊어 먹지 않겠다는 듯 작게 이름을 되뇐 그녀가 자신의 흉갑을 벗었다.
철그럭-.
가죽에 강철판을 덧댄 흉갑이 바닥을 나뒹구는 순간, 호피녀가 오른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자세를 낮춘 그녀는 오른 주먹을 앞으로 뻗고 왼손을 펴서 심장 어림에 두었다.
그녀에게 가장 편하고 가장 익숙한 자세.
또한, 가문의 모든 절기가 시작되는 자세이기도 했다.
그녀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흑검병단 17조 조장, 그레타 위건이다.”
가문을 나와 자신의 성까지 밝힌 건 처음이었다.
그건 유리를 향한 호피녀, 아니, 그레타가 유리에게 보내는 존중이었다.
한편, 그녀의 변한 분위기에 유리는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있는 밑바닥 끝까지 긁어 내 겨우겨우 한 합을 넘겼더니만, 갈수록 더한 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다음 공격도 쉽지 않을 거다.
아니, 다음 공격이야말로 지금껏 받아 낸 그 어떤 공격보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기기 위해서는 이겨 내야 하는 것을.
착-.
검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 낸 유리가 말했다.
“이제 요람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뽀송뽀송한 신삥, 유리 홀랜드입니다, 살살 부탁드립니다!”
입은 살살 부탁한다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유리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진중했다.
고오오오-.
나이도, 경지도 다르지만.
그래도 서로를 인정한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나무를 부수며 날아갔다가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뽀삐.
그의 전신에서는 옅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푸쉬쉬-.
비척비척 걸어 숲을 빠져나온 뽀삐의 눈에 서로 대치하고 있는 유리와 그레타의 모습이 잡혀 들었다.
그 전 과정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하는 뽀삐였지만, 둘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만으로도 이제 저들의 싸움이 종장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에 뽀삐는 주먹으로 제 심장을 두 번 두드렸다.
그건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을 위해 윰족이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와 같은 동작이었다.
한편, 나무 위.
꿀꺽-.
아린은 긴장으로 고인 침을 삼켰다.
‘저 녀석, 이미 한계야.’
딱 봐도 유리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듯 보였다.
반면 호피녀는 여전히 쌩쌩함은 물론 그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누가 봐도 이건 유리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넘어 이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린은 어째서인지 유리가 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백보 의식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 녀석이라면 무언가 재밌는 일을 만들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때문에 그녀는 진심으로 응원했다.
‘마지막 한 번.’
유리가 그 한 번만을 이겨 내길.
그렇게 아린이 기원하는 순간.
츠팟-!
유리와 그레타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