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보스의 정화 패턴에 다크 템플러와 세인트들이 정성껏 걸어 놓은 디버프와 버프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서로의 머리 위로 무수히 떠있던 상태 아이콘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험악한 욕설과 야유가 빗발쳤다. 신사는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바드랑 세인트분들! 빨리 디버프랑 버프 덧씌워 주세요!”
날카로운 명령에 메인 다크 템플러인 하츠와 인드라, 메인 버프 담당인 앵두군과 추장의 입이 더 바빠졌다. 방어력과 밀접한 관계인 ‘신의 수호’와 ‘보호의 빛’이 벗겨진 터라, 곳곳에서 불안한 눈빛이 오갔다.
정화 하나로 플레이어들을 무력화시킨 보스는 일반 전체 공격인 ‘증오의 발톱’과 ‘꼬리 치기’를 연이어 사용했다.
여과 없이 그대로 들어온 대미지에 플레이어들의 HP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버프 효과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리디안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더 떨어지는 HP에 놀라면서도, 다급히 여신의 손길을 외웠다. 그러나 얄궂게도 중간에 기가 막히게 떨어진 종유석 패턴에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레인포레스트 님이 사망하였습니다.]공격력 위주로 장비를 세팅하느라, HP가 현저히 낮았던 ONE 길드의 매지션이었다. 그녀는 위에서 떨어지는 종유석을 미처 피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보스의 꼬리 치기에 맞물려 회복될 틈도 없이 누워버렸다.
그간 크게 위기감 없던 레이드였지만, 사망자가 나옴으로써 다소 분위기가 굳어졌다. 타이밍이 나빠, 정말 운 없는 경우이긴 해도 바라보는 사람들은 긴장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잖아도 힐에 치중하느라 정신없던 세인트들의 안색은 더욱더 창백해졌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잠시 휘청였던 분위기는 신사의 빠른 지시와 캐티스의 부활 처리로 간신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레인포레스트 역시 살아나자마자 곧장 합류해 차분히 공격을 이어갔다.
“다행히 정화는 기존이랑 달라진 건 없어 보이네요.”
보스의 앞발 후려치기를 피해 잠시 물러난 레온이 중얼거렸다. 근처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마제스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다른 패턴도 똑같아야 할 텐데, 하고 푸념하던 때 인드라의 외침이 들렸다.
“디버프 완료!”
뒤따라 앵두군도 버프가 완료됐다며 손을 들어 외쳤다. 보스의 위협적인 공격이 다시금 시작됐지만, 다시 방패를 얻은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낮은 체력을 우려해 잠시나마 근접 공격을 피하고 있던 아쳐와 레인져, 로그, 섀도우 헌터 플레이어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환호하며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방어력 상관없이 공격력만 믿고 보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던 크라이그는 개떼처럼 달려드는 딜러들을 의식하곤 슬쩍 물러났다. 아낌없이 사용한 스킬들의 쿨타임도 한참 남았겠다,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보스는 잠깐의 농땡이를 부릴 틈도 주지 않았다. 바닥을 지탱한 앞발을 대뜸 벌린 보스가 몸을 낮추더니 입을 쩍 벌렸다. 크라이그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서둘러 사람들 틈으로 향했다.
리디안은 몸을 낮춘 보스의 등과 어깨가 꿀렁꿀렁 떨리는 걸 본 순간, 디버프 패턴임을 확신했다. 여신의 영역을 사용할 차례였다.
“리디안 님!”
예상대로였는지, 하이 랭커들이 급히 리디안을 불렀다. 미리 반응한 리디안은 서둘러 뛰어나가 플레이어들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여신의 영역!”
스콜과 하티 때보다 타이밍이 난감해 시간을 계산할 틈도 없었다. 리디안은 급한 대로 냅다 스펠을 외웠다. 다행히 적당한 때에 시전한 모양이었다. 초록빛의 마법진이 알맞게 피어오름과 동시에 보스가 무언가를 속에서 게워 내기 시작했다.
흉악한 아가리에서 왕창 쏟아져 나온 건 탁한 보랏빛의 짙고 걸쭉한 액체였다. 보기만 해도 불쾌한 질감이 지면을 잔뜩 물들였다.
정원 초과로 영역에 오르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그 액체에 닿자마자 갖가지 상태 이상에 걸렸다. 그러나 다행히 바닥을 메운 액체는 금방 사라졌다. 상태 이상에 걸린 사람들을 향해 규호와 낙루가 서둘러 신성한 축복을 돌렸다.
혼란과 수면 등, 봉쇄에서 풀려난 탱커들은 바로 자리를 잡고 다시 보스를 도발했다. 어그로가 안전하게 고정되자 기다렸다는 듯 딜러들이 총공격에 나섰다. 지속 시간이 짧은 영역 스펠의 효과를 최대한이나마 누리기 위함이었다.
하이 랭커들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대미지가 높은 스펠, 스킬부터 시전했다.
운 좋게 쿨타임이 맞아떨어진 레온과 테세우스가 다급히 ‘참격난무’와 ‘썬더 스톰’을 차례대로 날렸다. 레온의 용감무쌍한 활약 뒤로 푸른 번개가 난무하자 몇몇이 크게 환호했다. 사기적인 공격력을 자랑했던 만큼, 여신의 영역 효과로 증폭되자 더한 효과를 발한 것이다.
다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신사는 노파심에 크게 외쳤다.
“스펠, 스킬 쿨타임 아끼지 말고 지금 팍팍 쓰세요!”
물론, 신사가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다들 그럴 생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가능한 영역 스펠 한도 내에서 큰 스펠,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오매불망 쿨타임만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리디안이 사용한 여신의 영역 마법진이 바닥에서 점차 흐릿해져 갔다. 리디안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깜빡거리는 아이콘에 다급히 외쳤다.
“영역 곧 끝나요!”
“스나이핑 샷.”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마지막을 장식한 건 아쳐 고독한이었다. 원거리 딜러라 움직일 필요 없이 화살과 스킬을 적절히 섞어 날리던 고독한은 한 끗 차이로 날아간 자신의 스킬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간에 맞춘 것도 다행인데, 심지어 적당한 크리티컬까지 터졌기 때문이다.
보스 머리 위로 느낌표가 무수하게 떠있었으나, 고독한 정도의 썩은 물이라면 자신의 대미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던 상황이 진정되자, 플레이어들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다행히 디버프는 스콜, 하티 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요? 스위칭할 필요 없이 일반 신축으로도 잘 풀리고, 일부에서 전체 적용으로 바뀐 거만 빼면 나머지는 그대로인 거 같은데?”
“디버프 걸리셨던 분들, 혹시 지속 시간 봤어요?”
“게임 때랑 똑같아요. 40초!”
“흠. 남은 패턴도 별문제 없으면 정화 때 디버프랑 버프 빨리 돌리기만 하면 할 만하겠네요.”
“아, 제발 그랬으면…….”
지쳐 가던 개복치가 간절히 바라는 사이, 여신의 영역 효과 내내 크게 얻어맞은 보스의 검은 갈기가 태양처럼 맹렬히 타올랐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에 누군가 먼저 알아보고 크게 소리 질렀다.
“마킹한다!”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던 갈기가 허공을 향해 물감처럼 퍼져 나갔다.
리디안은 플레이어들을 향해 가시처럼 날아오는 잔해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지하도시를 떠올렸다. 보스 로크바가 혼령화를 걸기 위해 흩날렸던 검은색 구슬비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킹도 같은 원리인지, 검은 잔해가 일부 플레이어들의 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검은 물감이 튄 듯, 육안으로 뚜렷이 보였기에 신사가 재빨리 파악에 나섰다.
“마킹 포푸리, 캐티스, 독재, 이케, 마프로, 삼촌, 환경파괴자!”
호명되기 무섭게, ‘신축’ 담당 세인트들이 대상자들을 향해 다급히 해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신축’ 한 방에 풀렸던 게임 시절과는 달리, 여러 번의 ‘신축’으로도 마킹은 해제되지 않았다. 마킹이 풀리면 바로 힐을 보조하려 했던 캐티스와 괴자는 낭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마킹 해제 불가요! 지능 신축으로도 안 풀림!”
‘신축’에 실패한 규호의 외침에 신사를 포함한 다수의 세인트가 욕지거리를 삼켰다. 마킹은 플레이어의 모든 회복률을 대폭 감속시키기 때문에 MP 사용량이 많은 직업에겐 골치 아픈 상태 이상이었다.
바드의 MP 회복 버프 효과는 물론 플레이어의 기본 HP, MP 회복률까지 깡그리 무시되는 것이기에 현재 상황의 세인트에게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난감하네. 마킹 해제 불가할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힐량 높은 세인트 둘이 걸려버리네. 그렇다고 물약 빨아서 커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잡몹 팀에 속해 있던 드림드림도 힐끔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쟁쟁한 힐러 둘의 성능이 떨어지는 상태라, 그로서도 작은 긴장을 삼켜야만 했다. 리디안 역시, 두 사람의 힐이 덜 들어오게 된다면 더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물리 팀, 마법 팀과 합류한 뒤로 세인트들은 리디안의 힐 타이밍에 맞춰 스펠을 외우고 있는 상태였다. 다들 눈치 빠르니 알아서 더 조절하겠지만, 혹시라도 MP가 모자라는 상황에 이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남은 힐러끼리 120초만 버티면 되겠네요.”
페페가 애써 웃으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위기에 보스가 작정한 듯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보스의 단골 패턴인 일반 전체 공격부터 시작해 봉인과 그림자 떼 패턴이 이어지자 힐을 외우는 리디안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마킹에 걸린 괴자와 캐티스가 남은 MP를 이용해 재량껏 힐을 넣고 있지만, 그림자 떼로 걸린 출혈과 얄밉게 쏟아지는 종유석 패턴 콤보에 일부 플레이어의 HP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뜬 HP 게이지가 흰색에 가까워질수록 리디안의 심장은 쿵쿵 요동쳤다. 스콜과 하티 때처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1초가 1분 같았고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손끝이 뻣뻣해졌다.
스스로도 본인의 회복량이 가장 높다는 것을 잘 알아, 더 그랬다. 만약 한 번이라도 회복 스펠 타이밍이 어긋난다면…….
자꾸 그려지는 최악의 상황에 리디안은 더욱더 긴장해 집중했다. 실수하는 순간 누군가 죽어 나갈 거란 생각에 머리끝이 바짝 곤두섰다.
빨리 두 사람의 마킹이 풀리고, 출혈이 풀리길 바랐지만 융합한 보스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달려드는 딜러들을 위치 교환으로 교란했고 틈틈이 봉인을 사용해 주력 딜러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리디안은 여기서 봉인까지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테세우스는 차라리 자신을 봉인하라며 세인트들의 앞을 가로막는 촐랑거림을 보였다.
그 갸륵함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세인트들이 봉인에 걸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보스는 정화 패턴을 한 번 더 사용했다. 괴자와 캐티스의 마킹으로 급히 투입돼 보조 힐을 넣던 앵두군과 추장은 거친 욕을 내뱉었다.
예정에 없던 보조 힐로 가뜩이나 MP가 다급한 상황인데, 또다시 버프를 돌려야 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MP를 아끼던 괴자와 캐티스의 MP도 결국, 100 아래로 떨어졌다. 걸려 있는 버프 덕분에 조금씩 차오르긴 하는데, 정말 ‘조금’이었다. 보스의 마킹으로 효과가 반감된 덕분이었다.
괴자는 자기 몸에 들러붙은 검은 자국을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아! 빨리 좀 풀려라! 힐 하고 싶단 말이야!”
괴자가 발을 동동 굴리며 애원했으나 그런다고 시간이 단축되는 건 아니었다. 그사이 보스는 구속 패턴을 사용해 플레이어들의 발을 묶었다.
“아씨, 묶였어!”
근거리 딜러라 뛰어다녀야 하는 로그 꼬마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구속에 걸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딜러였는데, 기존에도 해제 불가였던 패턴이라, 원거리 딜러들은 그 자리에서 차분히 공격을 이어갔다.
그러나 눈치 없이 떨어지는 종유석과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가스에 발 묶인 딜러들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가까스로 피한 신사는 다급한 눈으로 구속된 인원을 파악했다.
“6명 구속! 꼬마, 일반인, 샤봉, 하츠, 불꽃심장, 크라이그!”
“가스 생겼다! 폭발 조심해요!”
“종유석도 떨어질 듯요!”
구속에 묶인 상태에서도 검기류를 가차 없이 날리던 크라이그는 발밑에 생기는 그림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송곳처럼 뾰족한 것이 드드득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정수리로 떨어질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구속으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크라이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침착하게 죽음을 대비했다.
세인트의 힐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출혈과 전체 공격이 맞물린 지금, 오브젝트 패턴까지 감당할 재간은 없었다. 크라이그는 손을 들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렸지만, 의외의 대꾸가 들려왔다.
“출혈 곧 풀리니까 잠깐만 빠르게 힐 넣을게요!”
리디안은 자신의 MP와 다른 세인트들의 MP를 확인하며 소리쳤다. 리디안의 힐 속도에 맞춰야 했기에 서투른 낙루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페페나 이모탈을 비롯한 세인트들은 곧장 리디안의 속도에 따라갔다.
초 단위로 크게 깎이는 HP였지만, 3인 이상의 세인트가 콤보 단위로 여신의 손길을 사용하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 애탄 노력 덕분인지, 때마침 떨어진 종유석에도 크라이그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크라이그는 한순간 100 언저리에 머물던 HP를 떠올리며 리디안을 쳐다봤다.
아마 힐러로서의 사명감이었겠지만, 다소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려 준 리디안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