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니, 파파 앞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리디안은 크라이그, 호드라, 페이지가 가까이 보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현재 위치는 입구에서 아홉 시 방향이다. 뭐 방향만 그렇다는 거지, 실제 거리로는 입구에 더 가까웠기에 일찌감치 투입된 태양 연합 플레이어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앞쪽에 듬성듬성 퍼진 적군 너머로는 무리를 이룬 아군들이 작은 진영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고개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니, 태양 측도 세 시 방향에 진영을 이룬 상태였다.
“딜러님들! 우리 팀 진영 가는 길 좀 뚫어 주세요!”
“거기 지금 크라이그 님이 다 뚫어 가요!”
“인드라 님 여기 필드요!”
“입구! 빨리 입구부터 먹어야 해요!”
“저 미리 부재축 걸어 주세요!”
“매지션들! 입구 위주로 갈겨 주세요!”
“여기 다템 좀 떼어 줘요!”
전투가 가장 활성화된 곳은 입구였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입구 싸움에 다급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아우성쳤다.
길드 마스터들의 공지 후, 바로 사람들이 몰려 입구는 일차적으로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하이 랭커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장비나 컨트롤 혹은 방어력이 밀리는 플레이어들은 일찌감치 쓸려 나간 상태였다. 그런 탓에 입구 근처로는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에 각 진영의 부활 세인트들이 죽은 아군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스펠, 스킬에 죽은 자가 부활을 받고 살아나도 금세 다시 죽기 일쑤였다.
난잡한 상황에 파파가 휘파람을 불며 호응했다.
“와, 미쳤다. 벌써 템 떨군 사람도 있네. 리디도 어제 부재축 배웠다고 했지? 오늘은 부재축 싸움이라 더 정신없을 거야. 넌 그냥 힐만 해도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부재축도 쓸 준비해.”
신전도 공식적으로는 논피케 맵이라, 선공으로 플레이어를 죽여 검닉이 된 플레이어들이 집중 공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검닉이 되어 사망한 이들은 전부 몸 주변에 아이템을 흘린 상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떨어진 것들은 대부분 고가 장비였다. 부활 세인트들이 그들을 우선으로 살리는 듯했으나, 악의를 갖고 얼쩡거리는 플레이어들이 많아 퍽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야! 저거 아이템 못 먹고 증발되게 다굴 쳐!”
누구인지 모를 흥분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크라이그의 아이디 색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들어오자마자 적 길드에 먼저 공격받았는지, 아직 누군가를 먼저 죽이지 않았는지 검닉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특정 구분 없이 무분별하게 PK를 하고 있어 언제 검닉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보통은 페널티를 우려해 일부러 상대방에게 선공을 유도하는 편이나, 이 정신 없는 상황에서 크라이그가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리 없었다. 적어도 리디안이 아는 크라이그라면 말이다.
짧은 시간 보아 온 크라이그는 아주 바람직하고 전형적인 개돌…….
그러니까 개같이 돌격하는 딜러 유형이었다.
뭐, 대중적인 뜻이 그렇다는 거지. 크라이그는 충분히 실력이 뒷받침되는 사람이라 나쁜 의미보다는 장난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래도 개돌이 제 몸 사리지 않는 타입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으로 오만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크라이그가 검닉이 되어 아이템을 떨어트리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랜덤 박스 이벤트 개시였다.
바로 펼쳐지는 지옥도에 리디안은 몸을 털었다.
물론, 크라이그 말고도 누구든 언제든지 걸어 다니는 랜덤 박스가 될 수 있다. 다만 크라이그는 좀 더 자신과 친하고, 신세 진 것도 많고, 마침 또 가까이에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리디안은 애써 합리화했다.
* * *
[리디안 님이 성령의 축복 을 사용하셨습니다.] [리디안 님이 여신의 세례 를 사용하셨습니다.] [리디안 님이 여신의 손길 을 사용하셨습니다.] [리디안 님이 보호의 빛 을 사용하셨습니다.]신세계 길드와 떨어져, 혼자 있던 파이터 교감의 상대는 크라이그였다. 교감에게 검을 휘두르던 크라이그는 갑작스레 빨라진 이동 속도에 흘깃 허공을 바라봤다. 마침 지속 시간이 끝나 아쉬웠던 성령의 축복이 새로 들어와 있었다.
시전자의 이름과 연달아 들어온 스펠을 확인한 크라이그가 씩 웃었다.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규호에게 풀 버프를 받은 상태였지만, 리디안의 것으로 덧씌워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뭐야, 시X. 갑자기 왜 처웃고 난리임?”
스킬 ‘격파’를 이용해 크라이그의 어깨를 찍어 차기한 교감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크라이그가 뜬금없이 입꼬리를 올렸으니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낀 것이다. 재빨리 정색한 크라이그는 모른 척했지만, 오히려 교감의 속을 더 뒤집어 놓을 뿐이었다.
“무시하냐? 무시하냐고! X같은 새X야!”
신세계는 정말 베누스의 반려 쓰레기들뿐인 걸까? 잠시 그런 의문이 생겨났다. 한숨 쉰 크라이그는 마침 쿨타임이 돌아온 일격필살을 준비했다. 교감을 상대로 사용하기엔 아까운 스킬이지만, 더 상대하다간 험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일격ㅍ……”
스킬을 다 내뱉기도 전이었다. 아군 진영에 다가오던 태양 연합을 한차례 휩쓴 뒤, 입구로 이동해 은신하고 있던 페이지가 스윽 다가왔다. 크라이그는 교감의 뒤로 나타난 페이지를 보곤 멈칫했다. 그러곤 사용하려던 스킬을 변경했다.
“일섬신월.”
“난폭의 채찍질.”
기가 막히게 터진 두 사람의 스킬 콤보에 교감의 HP가 바로 하얗게 바뀌었다. 힐이 들어올 틈도 없었다. 둘 다 더블 샷을 넣은 데다, 심지어 페이지의 스킬은 높은 크리티컬이 터졌다. 소리도 못 지르고 털썩 고꾸라진 교감을 확인하고 나서야, 페이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교감 컷!”
프리피케 시절에는 처리한 상대를 호명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페이지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원래 게임 시절의 길드 PK 규칙상 전투 중 상대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비단 페이지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플레이어가 상대의 이름을 필터링 없이 거론하며 상황을 적나라하게 중계하고 있었다.
“사이 님! 거기 스카디 힐러 잠깐 잡아 주세요!”
그러다 보니 들어서는 안 될, 혹은 듣기 불편한 말들이 종종 들려오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리디안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무너스키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켰다.
덩달아 근처를 배회하던 사이와도 눈이 마주쳤다. 옛 프리피케의 부길드 마스터이자 다크 템플러 PK로는 네임드 중의 네임드. 또한 그 뒤로 달려오는 무너스키 역시 워로드 일인자였다.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라고 확신한 순간 사이도 즉각 반응했다. 사이가 호리호리한 체격을 이용해 사람들 틈을 유유히 비집고 다가왔다.
리디안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크라이그의 뒤로 도망쳤다. 고맙게도 크라이그도 무너스키를 발견해 똑같이 달려와 거리를 좁혀 주었다.
어쩌다 보니 방패 삼아 숨는 모양새가 됐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사이는 바로 걸음을 멈춘 채 인상을 찡그렸고 달려오던 무너스키도 낭패한 표정으로 멈춰 머뭇거렸다.
뭐, 크라이그와 맞붙으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바드 파파와 세인트 리디안의 지원을 받는 크라이그는 솔직히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다. 반대로 자신들은 아군과의 거리가 벌어진 상태라, 빵빵한 지원을 받기엔 모호한 형편이었다.
사이의 디버프 필드에 잠깐이라도 걸렸다면 약간의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리디안을 놓쳐 입맛을 다시던 무너스키는 사이와 조용히 눈짓하다 돌아섰다.
그에 리디안이 와, 하고 감탄할 무렵. 게릴라로 필드를 분주히 돌아다니던 버베나와 포푸리가 반가운 눈으로 달려왔다.
“리디안 님! 저기 아홉시에 짱박히지 말고, 그냥 우리 따라 다녀요. 나랑 포푸리가 확실하게 지켜 드림.”
소환수를 풀로 거느린 버베나와 극 방어력으로 세팅한 포푸리가 히죽 웃어 보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일전의 고목나무 전쟁에서 도도 덕분에 서모너의 호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아홉 시에 가봐야 계속 자리만 지키고 서있을 분위기다.
늦게 들어와 겨우 대피한 낙루가 혼자 덜덜 떨고 있는 게 신경 쓰였으나, 지키고 있는 딜러들이 많아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앵두군, 무니, 드림드림, 추장은 각자 따로 팀을 이뤄 맵을 활보하고 있었고, 낙루를 제외한 나머지 세인트들은 전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리디안은 아홉 시 진영과 입구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PK에 대해 잘 모르는 리디안에게도 입구가 좀 더 의미 있어 보였다. 정신없고 위험해도 차라리,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게 훨씬 경험이 되지 않을까?
당연한 판단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리디안은 곧장 네, 하고 대답했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버베나와 포푸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버베나는 리디안 옆에 있는 파파를 향해 또 물었다.
“거기 바드님도 콜? 우리 쪽 파피루스 아홉 시에 짱박혀서 마침 바드 필요한데.”
“옙. 맡겨만 주십쇼, 누님.”
“그럼 크라이그는 어떻게 할래? 우린 이대로 입구 근처만 돌 거야.”
“같이 다녀요. 크라이그 님~ 어차피 이쪽도 대충 다 정리됐구먼. 나머진 아홉 시에 있는 분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버베나를 따라 포푸리도 꼬드겼다. 크라이그는 리디안을 슥 쳐다보곤 흔쾌히 수락했다.
“그럼 저도 같이 따라다닐게요.”
“오, 좋아! 최강팀 결성. 리디안 님이랑 파파 님은 포푸리 뒤만 바짝 쫓아다녀요. 옆이랑 뒤는 내가 지킬 거고, 앞은 크라이그가 지킬 거예요.”
이보다 든든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반짝이는 눈으로 끄덕거리면서도 리디안은 동행하는 크라이그를 보며 안도했다. 이대로 쭉 자신의 시야에 머무른다면 더 신경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근데 저쪽에 누워 계신 분들, 먼저 살려야 하지 않아요?”
대열을 잡던 중, 리디안이 입구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아직 일어나지 못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하긴, 10분이 되기 전에 살리긴 살려야 했다. 버베나는 끙 신음했고 크라이그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좀 이따가요. 아직 저쪽 사람들이 더 많아서, 살려 봤자 광역 어그로 맞고 다시 누울 거예요. 애초에 방어력이나 반응 속도가 느려서 누운 사람들이라……”
“지원 언니랑 크라이그 님이랑 둘이서. 뒤로 돌아가서 네오랑 하얀소라만 잡으면 게임 끝날 것 같은데, 어때요? 한 번 해보실?”
포푸리가 히죽 웃으며 제안했다. 크라이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현재 세 시 방향에서 입구에 광역 스펠을 쏟아붓는 사람이 네오, 하얀소라라 잠깐은 솔깃했다. 확실히 그 둘만 잡으면 입구 상황은 한결 편해질 테니까.
그러나 그건 태양도 같은 심정일 터.
마찬가지로 아홉 시 방향에서도 맥스비와 테세우스, 시우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고, 다른 딜러들이 수시로 그 주위를 돌며 엄호하는 상태였다. 태양 쪽도 네오와 하얀소라를 지키기 위해 딜러들이 정찰을 돌고 있었기에 크라이그가 고개를 저었다.
“바로 가는 건 힘들 것 같은데요. 입구부터 뚫고 천천히 가면 모를까. 지금 네오 옆에 보리알이 있어서 모르겠네요. 차라리 누나가 군위 써주면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야, 그럼 나 리디안 님 못 지켜.”
“윤재 형. 신스킬이면 보리알 원 킬 가능하지 않을까요? 보리알 때문에 걸리면 레온 님도 데려가서 동시에 쳐도 되고요.”
그에 버베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매인 레온은 입구 바로 앞에서 힐러들의 비호를 받으며 태양의 나이트인 프리스비, 로그 아빌린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서 날아오는 매지션들의 스펠 때문에 레온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다.
“엥. 레온 저거 한참 걸릴 것 같은데? 이트가 아직 안 들어온 상태긴 한데, 저쪽도 지금 에밀리아랑 방해꾼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크라이그 너나 신사가 가서 레온부터 도와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명호 오빠는 아직 밖에 있나 본데? 안 보이네. 그 오빠 들어오면 힘들어지니까 그 전에 빨리 입구 정리하자.”
가서 좀 거들자는 버베나의 손짓에 모두가 신속히 이동했다. 리디안은 가는 길에 분주히 버프를 덧씌웠다.
가능하면 모두에게 보험차 ‘부재축’까지 걸고 싶었으나, 딜러들은 언제 검닉이 되어 아이템을 떨굴지 모르는 상황이라 애매했다. 자칫하면 오뚝이처럼, 살아나도 금방 다시 죽어 아이템을 두 배로 더 떨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리디안은 남을 공격할 일이 없는 바드, 세인트를 위주로 보는 사람마다 ‘부재축’을 걸어버렸다. 비교적 입구와 떨어진 곳에서 게릴라 팀과 별도로 움직이고 있던 무니, 드림드림이 상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입구 근처로는 최근 지하도시 드롭으로 ‘부재축’을 배운 그레이스와 이모탈. 그리고 원조 부재축 힐러인 캐티스가 활약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태양 연합 측은 ‘부재축’을 배운 이가 보리알뿐이라, 보리알 혼자만 몹시 바쁜 상태였다.
더군다나 보리알은 세 시 진영을 지키느라 자신과 가까운 이만 살리고 있고, 실질적으로 부활을 담당하는 건 ‘부재노’ 세인트들이었다.
여름 전만 해도 동맹 길드에서 ‘부재축’을 배운 사람은 캐티스 한 명뿐이었는데, 최근 레이드로 그레이스, 이모탈, 리디안까지 배웠으니 길드 간 스펙 격차가 얼마나 커졌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어, 정면에 몹……!”
때마침 리젠된 ‘영혼의 잔재’에 리디안이 급히 멈췄다. 그러나 사바에서 빗발치는 스펠, 스킬에 몹은 별 활약도 못 한 채 즉각 사라지고 말았다. 뭐 그런 거로 유난이냐는 버베나의 눈빛에 리디안은 머쓱해졌다.
“와~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까 잡몹도 순삭이네.”
다시 전진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본 파파가 연신 감탄했다.
보통 필드 PK전에서는 플레이어보다 몹에게 죽는 게 더 수치스럽다고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비열한 일부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일부러 몹사를 유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의도치 않게 몹이 쓸려나가는 상황이라, 잔꾀를 부릴 틈이 없었다. 덕분에 장애물 없이 시야가 뻥 뚫려 쾌적했다. 아군 식별이 쉬우니 리디안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적군의 모습도 잘 보인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