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보리알을 대신해 서둘러 여신의 손길을 외우던 코헤이와 외이리는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눈으로 버벅거렸다.
아퀴나스를 죽인 크라이그는 바로 검닉이 되어버렸다. 함께 있던 레온은 이미 한참 전부터 검닉 상태였다.
검닉일수록 모두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기에 리디안은 불안한 눈으로 영역 스펠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스펠 효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여신의 손길을 외웠다.
그동안 리디안을 대신해 회복을 담당했던 페페는 곧장 아군에게 ‘신축’을 돌렸다. 포푸리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으나, 다크 템플러 블루벨이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한 크라이그와 레온이 다시 눈짓했다. 이트가 가까워졌으니 이트를 노려도 좋을 것 같았지만, 영역도 끝났으니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멀리 순찰 팀과 함께 나갔던 먹구름이 돌아온 상태였다. 보리알 때문에 가려졌지, 먹구름도 세인트 중에선 컨트롤이 좋기로 유명한 플레이어였다.
“일단 후퇴요.”
서둘러 달려오는 크라이그와 레온의 외침에 리디안과 포푸리, 페페도 곧바로 이동했다. 쫓아오는 딜러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리디안과 페페의 회복 덕분에 위험하진 않았다.
보리알과 아퀴나스를 처리한 즉석 지원 팀은 여전히 전투가 한창인 입구에 도달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승승장구했던 태양 연합이지만, 보리알과 아퀴나스의 죽음으로 전세가 기울어져 분위기가 축 처져 있었다. 거기다 이트까지 무단으로 이탈했으니 세인트들의 힐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이트는 역전된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곤 본진에 틀어박혔다. 입구에 남은 에밀리아와 리미티드, 환몽이 아무것도 모른 채 고생하고 있었지만, 이트에겐 관심 밖이었다. 이트는 보리알보다 아퀴나스부터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MP를 힐끔댔다.
리디안을 메인으로 둔 임시 지원 팀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버베나가 제일 먼저 환호했다. 리디안에게 붙어 있던 소환수 세 마리를 도로 가져간 버베나는 자유롭게 학살을 즐겼다. 원래는 느긋하게 돌아다닐 생각이었으나, 이왕 전세가 유리해진 김에 좀 거들자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이트가 빠지고 보리알의 힐이 닿지 않으니 적군의 HP가 더 잘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리디안은 이상하게 고목나무 때보다 더 잘 보이는 주변 상황에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전처럼 떨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신기해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으나, 확실히 공포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심지어 아군 팀 상태가 어떤지, 어느 쪽이 우세하고 불리한지까지 판별이 될 정도였다. 그땐 정말 뭣도 모르고 게이지만 보며 힐만 외웠구나. 리디안은 과거의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멀티 샷.”
버베나 덕분에 잔챙이들에게서 벗어난 신사는 핑크푸크를 향해 신스킬을 사용했다. 같은 아쳐에 랭킹 5위와 12위의 싸움이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신사의 멀티 샷이 시전되자 핑크푸크의 HP가 급속도로 줄어갔다.
작정하고 노린 거라 더블 샷까지 추가했는데, 재수 없게 에밀리아의 힐이 동시에 들어온 바람에 핑크푸크를 처리할 수 없었다. 한 방에 처리되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려면 리디안의 영역 스펠을 기다려야 했다.
일순간 위험을 느낀 핑크푸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로가 80레벨에 장비도 비슷, 스탯도 비슷해서 지금까지는 고만고만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신스킬 한 방에 자칫 역전될 뻔했다. 스카디 힐이 들어올 땐 잘 몰랐는데, 핑크푸크는 찰나에 200 아래로 떨어진 자신의 HP에 식은땀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 * *
“오~ 갑자기 팍팍 밀고 나가는 느낌이다?”
도망친 백사부를 찾아다니던 이노센트가 잠시 멈춰 입구를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다 보니 전체적인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부부를 따라다니던 앵두군도 신기한 눈으로 말했다.
“보리알 잡았나 보네요? 부활이 갑자기 멈춘 거 보니까. 오, 아퀴나스도 죽은 듯?”
“근데 다른 애들은 보리알 안 살리고 뭐 하는 거지? 이트 저기 있는데? 아퀴나스부터 살리려고 그러나?”
백검이 고개를 기울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노센트는 보리알의 성격을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 레이드에서 죽은 자신에게 ‘부재축’이 아닌, ‘부재노’를 함부로 썼다며 어느 세인트에게 한껏 무안을 줬던 보리알의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슈퍼문의 세인트들은 아마 그 트라우마 때문에 ‘부재노’ 사용을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도 입구 가서 재미 좀 보자. 여기 백날 돌아봐야 잔챙이밖에 더 잡나?”
“가려면 혼자 가. 난 앵두 님이랑 좀 더 돌고.”
마음대로 하라며 이노센트가 훠이훠이 손짓했지만, 백검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어디 와이프를 두고 감히 물러납니까?”
공손히 대답한 백검은 헤헤 웃으며 이노센트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아주 잠깐, 눈꼴 시린 모습에 앵두군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다.
“어, 저기 햄스터다.”
먹이를 찾아 다시 이동하려던 순간, 백검은 저 반대편을 급히 뛰어가는 신세계 길드원을 목격하곤 손짓했다. 방향을 따라간 이노센트의 눈이 번뜩 빛났다.
햄스터, 베누스, 쿠렉, 신의아들, 나쵸. 결투장 때 그 멤버였다. 도망치던 백사부가 왜 자꾸 두리번거리나 했더니, 길드원들을 찾던 모양이고. 중얼거린 이노센트가 히죽 웃었다.
“어, 저긴 따거다.”
백검이 이번엔 다른 방향을 향해 손짓했다. 이노센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신세계가 향한 방향에서 따거와 파프리카, 보보가 쪼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중인지 다들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노르드연합이 맵 돌고 있다더니, 거기서 도망 나온 건가 본데? 어떻게 할까?”
백검의 중얼거림에 이노센트는 끙 신음했다. 양쪽 모두 패 죽이고 싶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한쪽을 쫓게 되면 다른 한쪽은 놓칠 가능성이 크다. 윽, 신음한 이노센트는 멀리 있는 따거를 바라봤다.
“원래부터 극혐하던 놈이긴 하지. 근데 미로에서 리디한테 한 짓 생각하면…….”
못 참지. 중얼거린 이노센트가 곧바로 움직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백검이 그 앞을 지나쳐 따거에게 돌진했다. 그리곤 자신 있게 신의 사슬을 외쳤다.
팔라딘 보보, 워로드 파프리카와 함께 움직이던 따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방심한 보보와 파프리카는 백검에게 붙잡혀 멈춘 상태였다.
순간의 순발력으로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따거는 기겁하며 돌아섰다. 두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상대 팀엔 앵두군이라는 힐러가 있었기에 승산이 없다. 그러니 저라도 도망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민도 없이 배신하는 따거의 모습에 보보와 파프리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여기까지 끌려온 것도 성질나는데, 개처럼 버림당하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야! 이따 외이리 보내 줄 테니까 기다려!”
보보는 허탈하게 코웃음 쳤다. 이 상황에 그 외이리가 사람을 살리러 여기까지 오겠냐고 되받아치고 싶었다.
그사이, 따거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만두고 보고 있을 이노센트가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따거의 뒤를 쫓은 이노센트는 뻥 뚫린 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푹 찔러 들어간 공격에 따거가 거친 욕설을 뱉었다. 뒤 돌아 눈을 부라리는 위협에도 이노센트는 방긋 웃어가며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쭉쭉 떨어지는 HP에 따거의 안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이, X발! 진짜 재수 없게!”
입구에선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었다. 제일 만만한 박회장이 마침 돌아다니고 있기에 잡으려 했는데. 잡긴커녕 건방진 바바리안을 만나 눕게 생겼다.
따거에게 이노센트는 보리알처럼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은 정면으로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랬지, 전부터 마음에 안 드는 플레이어였다. 그 분노를 표현해야 하는데, 둔한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세인트! 힐러만 있었어도!’
늘 그랬듯 남 탓, 환경 탓을 하며 따거는 입구 쪽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며 말이다.
그 간절한 바람은 HP 150을 남기고 이룰 수 있었다. 절묘하게 힐 범위에 들어선 따거는 때마침 들어온 에밀리아의 힐을 받아 기사회생했다.
“아오, 저 개…….”
이노센트는 터져 나온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조금만 더 가까웠어도, 한 방만 더 맞췄어도 오기 전에 죽일 수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저 비열한 성격을 보건대, 분명 기회는 더 있을 거라고. 이노센트는 일부러 따거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랬더니 역시나. 따거는 바쁜 주변 상황에 은근슬쩍 묻어가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입구를 빠져나갔다. 그 한심한 모습에 이노센트는 잠시 고뇌해야 했다.
내가 저런 쓰레기를 굳이 쫓아가 죽일 가치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이지만 이노센트는 다시 앵두군을 데리고 그 뒤를 쫓았다.
“이 시X! 왜 자꾸 쫓아오고 지X이야?!”
다시 등 뒤를 강타한 일격에 따거가 광분했다. 이번에도 힐러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상태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때, 따거의 눈에 은신한 대장군이 목격됐다. 나름 하이 랭커라고, 따거 역시 감시자의 옵션 정도는 가진 풍족한 플레이어였다.
“야! 혁아! 빨리 이리 와봐! 얌마! 나 좀 도와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목소리에 와츠의 뒤를 쫓던 대장군이 잠시 고개 돌렸다. 그러곤 눈살을 찌푸렸다.
암만 웬만한 하이 랭커들이 감시자의 눈 옵션을 달고 있다 해도, 전투 상황에서 은신한 섀도우 헌터의 존재감을 알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물론, 게임 때와는 달리 아군끼리 은밀하게 소통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배려심 깊은 플레이어라면 아마 모른 척했을 것이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고 천천히 움직이던 와츠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따거의 눈치 없음에 어이없어하던 이노센트가 급히 외쳤다.
“와츠 님! 뒤에요! 네 걸음 뒤에 대장군 있음!”
방어력은 좀 떨어져도 감시자의 옵션이 달려 별수 없이 스위칭한 장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와츠는 이노센트의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라 줄행랑쳤다.
그 와중에도 따거는 자신의 어리석음도 모른 채 대장군을 향해 반갑게 손짓했다. 어서 와서 도와 달라는 구호 요청이 이어졌으나, 대장군은 한숨을 쉬며 외면했다.
“어? 야! 얌마! 어디 가! 야 이 개X끼야! 이리 안 와?”
곧장 태도가 돌변하는 따거의 모습에 이노센트는 뭐 이런 새X가 다 있느냐며 눈살을 구겼다. 그러곤 더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따거를 덮쳤다.
연달아 들어오는 스킬 세례에 따거의 눈동자가 뒤죽박죽 흔들렸다. 뒤늦게 반격을 해보겠다고 검을 휘둘렀지만, 이노센트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바로 스킬을 사용하자니, 빗맞을 것 같기도 하여 따거는 무턱대고 일반 공격을 감행했다.
스킬 활용도가 부족한 제 실력을 생각한,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노센트에겐 장난에 불과했다.
보란 듯이 머리를 노리고 찔러오는 따거의 검 끝에도 이노센트는 태평하게 고갯짓해 피했다. 힘이 실린 탓에 쐐액 바람 소리가 살벌했지만, 공격 패턴이 단순해 피하는 건 쉬웠다.
나름 검술로 승부를 보려나 본데, 안타깝게도 동작이 어설펐다. 뭘 할지 수가 훤히 보였다.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하니 검이 아니라, 몽둥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거기에 추잡스럽게 욕설까지 퍼붓고 있으니 사람이 참 저렴해 보였다.
아무래도 정신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노센트는 이 기회에 좀 두들겨 패자며 두 팔을 들어 가드했다. 그 직후 바로 자세를 낮췄고 따거에게 파고들었다. 그러곤 재빠르게 주먹질했다.
턱과 뺨, 얼굴 전면을 노리는 날쌘 스트레이트와 훅에 따거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기가 없었으면 좀 덜했을 텐데. 살인 무기나 다름없는 뾰족한 꼬챙이를 쥐고 권투 시합을 하듯 안면을 강타하니 죽을 맛이었다. 울컥함에 하마터면 검을 집어 던지고 똑같이 주먹질할 뻔했다. 그런다고 이노센트에게 대응할 순 없겠지만…….
이후로도 따거는 별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이노센트에게 신물이 나게 터졌다.
입구에서 기껏 다 채워 놓은 따거의 HP는 어느새 300 대로 떨어져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따거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자, 이노센트는 그제야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에휴. 진짜 쭉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요, 이 아저씨야. 랭킹 8위나 됐으면 랭킹값 좀 해요. 없어 보이게 벽 붙어 다니는 것도 웃긴데. 눈치는 또 어디다 팔아먹었대? 그러니까 같은 식구들도 경멸하지. 그리고 사람이 실력이 모자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건 뭐, 실력도 없어. 눈치도 없어. 인성도 모자라.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을 수 있지?”
“뭐? 야! 이 개……!”
“카운터 스트라이크.”
안면으로 날아든 주먹질을 끝으로 따거는 침묵했다.
이노센트는 제 앞으로 쓰러지는 따거를 쓰레기처럼 팩 걷어찼다. 그러곤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제 손바닥을 툭툭 털어 보였다.
딱히 보조할 것이 없어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앵두군은 안쓰러운 따거의 모습에 조용히 묵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