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진짜 싸움 냄새는 귀신같이 맡고 찾아오네.”
붉은 태양의 신전 대기실로 나온 순간. 혼잡한 풍경에 세자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디안도 주변을 서성이며 흘깃대는 플레이어들의 시선에 놀라 멈칫했다. 대부분 일반 랭커 혹은 그 이하의 평범한 플레이어였다.
“끔살당할까 봐 들어오진 못 하고, 대기실에서 언제 나오나― 하고 오매불망 기다렸나 보네요.”
규호도 그런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 소리 나게 혀를 찼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전투 길드끼리의 싸움이었다. 그걸 어떻게 구경하지 않을 수 있냐는 괴자의 대꾸에 여기저기서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뭐야. 진짜 ONE이랑 레기온이 졌어? 나 쟤네한테 돈 걸었는데…….”
“먼저 나온 건 태양 애들이라며? 그럼 태양이 진 거 아닌가?”
“아냐. 걔네 X나 낄낄거리면서 나왔어. 분위기 보면 걔네가 이긴 모양인데.”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에 리디안은 불편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개싸움, 소싸움, 닭싸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개중에는 도박판도 벌였는지, 별별 소리가 다 나오고 있었다. 서둘러 대기실을 지나쳐 헬하임으로 이동했지만, 헬하임의 분위기도 미묘하긴 마찬가지였다.
“아, 재수 없게 왜 다 여기에 몰려 있어?”
게이트 부근으로 신세계를 포함한 일부 연합 소속 플레이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혹시나 간부들이 있나 싶어 마제스티와 레온이 두리번거렸으나, 핑크푸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지나쳐 갔으면 좋았을 것을. 게이트를 통해 헬하임을 빠져나가면서도 플레이어들은 기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 막, PK를 끝낸 참이라 별수 없었다.
한동안 서로를 원수 보듯, 개 닭 보는 듯한 시선이 자연스레 얽혀들었다.
“아, 저 스카디 힐러. X나 짜증 났지, 진짜.”
“개얄미워.”
“잘만 하면 허접 매지션 다 잡을 수 있었는데, 쟤 땜에 오질라게 안 죽더라.”
은연중에 그러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면서도 리디안은 찝찝함에 고개 돌리지 못했다. ‘스카디’로 인해 낯선 사람들에게 호명당해 평가당하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욕먹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리디안은 불편한 걸음을 재촉했다.
“리디안 님, 고생 많으셨어요.”
톡톡,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길에 리디안이 고개 돌렸다. 페페가 웃고 있었다. 리디안도 곧장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페페 님. 페페 님이 더 고생하셨죠! 안 그래도 세 시 지원하러 갈 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페페가 항상 근처에 있었다는 걸 상기한 리디안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좀 할 만했어요? 사람 많아서 엄청 복잡했을 텐데.”
“진짜 정신없었죠……. 그래도 저번에 고목나무 때 경험도 있고, 또 다른 분들이 너무 잘하셔서 덕분에 잘 묻어간 것 같아요!”
여전히 겸손한 모습에 페페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몇 번 더 필드에서 싸울지도 몰라요. 오늘처럼 영역 쓰러 돌아다니실 땐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앗, 그럼 저야 좋죠……!”
또 싸움판이 벌어진다는 건 반갑지 않았으나, 페페가 따라다니며 도와준다는 건 참 고맙고 듬직한 일이었다. 영역은 다 좋은데, 혼자선 마음 놓고 쓸 수 없는 게 큰 단점이었다.
마지막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해 얘기하며, 두 사람은 사이좋게 미드가르드 게이트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많은 시선이 레기온 연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실시간으로 동선 파악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쓰게 웃는 페페의 말에 리디안도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더 머물러 봐야 좋은 꼴 못 볼 테니, 얼른 귀환하세요.”
먼저 가보라며 페페가 손을 흔들었다. 동맹끼리 따로 주점에서 모일 줄 알았던 리디안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어차피 해결은 간부들이 할 텐데. 페페가 말한 것처럼 일반 길드원들이 떼 지어 공개된 장소에 몰려 있어 봤자 안 좋은 시선만 받을 게 뻔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리디안은 레기온 길드 아지트로 귀환했다.
* * *
말 많은 테세우스, 세자, 삼촌의 빠른 메시지 덕분에 레기온 아지트로 이미 많은 길드원이 집합해 있었다. 귀환하기 무섭게 자토가 제일 먼저 리디안을 불러 반겼다.
그 뒤를 따라 손을 흔드는 헤른, 이노센트, 노네임, 아이쿠가 보였고 우래귀와 페이지도 그들과 함께였다.
“어, 그럼 난 또치 형한테 가볼게!”
쭉 함께였던 파파는 오랜만에 보는 또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리디안도 자토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사이, 익숙해진 길드원들도 리디안을 향해 인사했다. 꾸벅 고개 숙이면서도 리디안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인지 크라이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간부들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한 모양이라고, 막판에 멀리서 언뜻 보기에도 크라이그가 여전히 검닉이었던 걸 상기한 리디안은 작게 한숨 쉬었다.
“리디! 고생 많았어! 걔네가 버그 썼다며?!”
급히 옆자리를 내어 주면서 자토가 걱정스레 말했다. 헤른, 행복, 우래귀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노네임과 아이쿠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들의 욕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먼저 온 이노센트와 페이지가 대부분의 상황 설명을 한 탓에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너도나도 신세계를 탓하고 욕하는 사이, 리디안은 페이지를 향해 물었다.
“도도 님도 간부분들이랑 같이 가신 거죠?”
“아… 넵. 핑푸네랑 계속 얘기해 보려나 봐요.”
어쩐지 군기 바짝 든 대답에 리디안은 멋쩍게 웃었다.많이 익숙해졌지만, 리디안과 페이지는 아직 어색한 사이였다. 페이지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디안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도도가 없는 탓에 시우는 테세우스와 함께였고, 오토마타는 괴자를 따라 세인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여전히 도도와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은 그들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완전히 레기온에 녹아든 듯했다.
“베누스 새X 잔머리 쩌네. 어떻게 거기서 친추 도배할 생각을 하지?”
“그 상황에서 하필이면 걔네가 버그 찾아낸 것도 진짜 어이없지 않아요?”
“걔네는 꼭 그런 쪽으로만 운 좋더라?”
노네임과 아이쿠가 흥분한 얼굴로 씨근거리는 동안, 한쪽에서는 현장을 뛰고 온 페이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그래 봤자 앞서 한 얘기와 똑같은 얘기지만, 그럼에도 반응은 처음처럼 신선하고 열정적이었다.
끝없는 푸념 속에서 앞으로의 상황을 예상한 헤른이 인상 쓰며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 버그가 고쳐질 리가 없으니… 당분간 PK할 때 이걸로 재미 좀 보겠네요.”
“어휴, 그럴 바엔 그냥 힐러 없이 싸우는 게 낫겠다.”
삐죽거리며 푸념하는 자토의 모습에 우래귀가 이노센트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이제 신전 레이드는 못 하는 거예요?”
“글쎄요. 분위기상 아무래도? 오픈된 곳이라 계속 싸우면 걔들이나 우리나 보스 못 잡거든요. 그냥 같이 죽자고 작정한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계속 핑푸가 우리 쪽 연락 씹는 눈치라서요.”
아예 그쪽으로 콘셉트 잡은 모양이라고. 덧붙인 이노센트의 대답에 우래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네임을 시작으로 다시 신세계를 향한 비난이 폭주할 때, 리디안은 불현듯 어제 있었던 친목 길드끼리의 마찰을 떠올렸다.
“맞다. 헤른, 캐니 님이랑은 더 문제없었어?”
“아! 캐니요? 안 그래도 아침에 누나들 레이드 하러 가고 나서 미안하다고 연락 왔어요.”
“저, 저한테도요!”
번쩍 손을 든 우래귀의 대답에 리디안은 다소 안도했다. 행여나 캐니가 어제 일로 기분 상해 헤른, 우래귀와 사이가 멀어지는 건 아닌지. 살짝 그런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암튼 뭔가 확실히 정해지기 전까지는 저레벨 길드원들도 필드는 무조건 자제하는 게 좋을 듯하네요? 이런 분위기에선 눈만 마주쳐도 시비 붙기 쉬워서요.”
일단 기다려 보자는 이노센트의 말에 헤른, 우래귀가 시무룩하게 고개 숙였다. 한창 사냥에 재미가 들린 그들로썬 아쉬울 따름이었다.
반대로 그간 힘들게 사냥하느라 지쳐 있던 자토나 행복은 오랜만에 모두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간부들이 잘 해결해 주겠지! 그때까지 우리는 아지트에서 노가리나 까자구요!”
팡팡 등을 두드리는 손짓에 악 소리 지른 헤른이 허탈하게 웃었다. 밝은 기운에 당해 낼 수 없다며 말이다. 우래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는지, 이참에 아이템 정리나 하면서 푹 쉬어야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실실 웃던 리디안은 아이템이라는 말에 앗, 하고 소리 질렀다.
“우래귀 님! 혹시 방패! 수호하는 절대자, 이거 필요하지 않으세요? 제가 어제 먹은 건데, 자토 언니는 가진 거라 우래귀 님 드리려고요.”
그에 모두가 오― 하며 감탄했고 우래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입술을 떨었다.
수호하는 절대자. 가디언의 종결 무기. 아마 자신은 평생 절대 가질 수도, 구경할 수도 없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근데 그걸 리디안이 덜컥 준다고 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이야! 역시 리디안 님. 마음씨도 고우셔. 우리 윤재는 뭐 없나?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한데?”
짓궂게 웃는 노네임의 모습에 리디안은 땀을 흘렸다. 크라이그가 다크 템플러 신발 아이템을 먹은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뺏으려 할 게 분명했다.
뭐, 그건 둘이 알아서 할 문제기에 리디안은 일단 우래귀에게 아이템부터 건넸다. 그때까지도 우래귀는 어버버 말도 못 하고 붕어처럼 뻐끔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허리를 접었다.
“가, 감사합니다! 리디안 님! 꼭 갚을게요! 진짜로요!”
“와! 우래귀 님 축하해요! 저도 방패 들으려고 열렙 중인데, 우리 같이 힘내요!”
자토의 응원에 우래귀가 부끄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리디안의 마음도 뿌듯해졌다.
누군가 아깝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착하고 열심히 하는 우래귀라면 아깝지 않았다. 또 같이 성장하는 처지고 잘 되면 좋은 거 아닌가?
그래서 리디안은 헤른을 향해 헤헤 웃어 보였다. 빤한 그 시선에 헤른이 갸웃했다.
“헤른도 이거 필요하지?”
대뜸 튀어나온 ‘우르의 주목나무 활’ 아이템에 헤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하도시에서 먹었다고는 들었지만, 리디안이 이미 팔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제게 내민 것을 보니 팔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헤른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리디안을 쳐다봤다.
“어? 누나?”
“원래는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헤른, 요새 열렙한다며. 71 됐다고 해서 선물로 주려고 했지. 솔직히 예전 새벽빛 때 사냥 좀 도와준 거 말고는 별로 챙겨 준 것도 없었고. 진작 주려고 했는데, 한참 지나서 말 꺼내니까 뭔가 민망하네.”
헤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누나아― 하고 입술을 오므린 헤른은 벌떡 일어나 리디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저한테는 누나밖에 없어요.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우스꽝스러운 헤른의 오버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따라 웃으면서도 리디안은 행복을 보며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이제 언니 무기만 먹으면 목표 달성이에요!”
“누나! 저는요?! 제 것도요! 전 파이터니까 용의지 하나면 될 것 같아요!”
아이쿠가 눈치 없이 손을 들어 꽥꽥댔다. 자토와 노네임이 눈치 좀 챙기라고 무안을 주는데도 아이쿠는 열심히 자신을 어필했다. 물론, 리디안은 웃음으로 지나쳤다. 세자 덕분에 좋은 아이템을 가진 아이쿠는 진작 열외였다.
“내 것까지 주려고? 난 괜찮아. 내 무기는 이미 9강이라서…….”
행복이 고마움에 민망하게 웃었다. 고강화 무기임이 밝혀지자 리디안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한편, 철없는 아이쿠를 두들겨 팬 이노센트의 시선이 잠시 행복에게 머물렀다. 9강이라 하니 뭔가 생각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