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그 말을 이해한 리디안도 머쓱하게 보리알의 눈치를 살폈다. 보리알은 괜찮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크라이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게다가 솔직히, 핑푸네가 지금 그 인원으로 뭘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아요.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였다고 보면 돼요.”
참 날카롭고 신랄한 평가였다.
보리알은 열등감이라는 말에 무너스키를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크라이그의 말이 맞았다. 무너스키는 열등감에 지배된 상태였다. 이곳에 와서 길드끼리만 생활할 땐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핑크푸크와 어울리더니… 레온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못된 말만 하는 성격 나쁜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뭐, 원래부터 과거 일이 있어 죽일 듯이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제는 점점 그 증오가 적정선을 넘고 있었다.
최근엔 어떤 꼰대처럼 ‘나이도 어린 게’라는 말을 가끔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보리알은 무너스키에게 환멸을 느끼곤 했다.
그 모습에 먹구름은 장난삼아 말하기도 했다.
아마 자기보다 어리고, 잘 생기고, 머리숱 풍성한 데다 돈도 많기까지 하니 질투하는 거라고.
아마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 농담한 것이겠지만.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아 보리알은 쓴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구름이가 갤럭시 님한테 얼핏 들었는데. 싸운 건 신세계 길드 때문이래요. 어젯밤에 핑크푸크가 다시 데려오자는 쪽으로 얘길 꺼냈다나 뭐라나.”
보리알이 넌지시 던진 정보에 리디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세상에, 그 일을 겪고도 신세계를 다시 품겠다니……. 핑크푸크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물론,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으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거다. 더군다나 신세계는 적으로 두면 무척이나 피곤한 단체이지 않은가. 한 번 동맹까지 해봐서 그 쓰레기 같은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핑크푸크로선 그들을 적대하기 껄끄러울 법도 했다.
“와. 아무리 전전긍긍이어도 그렇지. 신세계 때문에 지하 도시 파탄 났는데, 또요?”
김팔라의 물음에 보리알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뭔가 분위기에 휩쓸려 쓸데없는 말이 나오는 듯한데, 그래도 이제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앞으로 태양과 엮일 생각도 없기에 보리알은 흔쾌히 털어놓았다.
“더러워도 그냥 좀 참고 우리가 떠안고 가자는 식으로 얘기했나 본데, 솔직히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 꼬라지 보면서 스트레스받느니, 차라리 길드 마크 떼고 말지. 웃긴 건, 신세계 애들은 태양 쪽이랑 손잡을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하긴. 사람들 반응 보면 연합 내에서 신세계 길드 이미지 어떤지, 타인이 봐도 알겠는데. 걔들도 뇌랑 눈치가 있는 한, 자기들이 어떤 취급 받았는지 알 테니…….”
크라이그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누스가 아무리 그런 시선을 즐기는 ‘관종’이라 해도 사람인 이상, 기분 나쁜 건 당연했다. 더욱이 그 성격에 여태 태양 연합과 어울려 레이드를 한 건 기적적인 일이었다.
“와. 뭐야, 그럼. 이제 삼파전임? 장군 님 우리 편으로 올 테니까 삼파전 맞지? 태양네랑 우리랑 신세계. 이렇게.”
다람만 혼자 신이 나 히히 웃었다. 중요한 침공전을 앞둔 상황에서 또다시 비효율적인 구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지. 리디안은 근심이 묻은 표정으로 한숨지었다.
“당장은 그렇지. 핑푸가 우리랑 완전히 화합하겠다는 신호가 전혀 없으니까. 근데 그 덕분에, 의외로 금방 하나 정리될 수도 있어.”
“누가 정리돼?”
“신세계. 베누스가 핑푸 깠다는 건 앞으로 태양도 무차별 습격하겠다는 얘긴데. 핑푸 입장에서 자기들끼리 방어할 수 있겠어? 안 그래도 사람들 다 나갔는데? 조만간 우리한테 또 손 벌린다는 것에 한 표. 아니면 은근슬쩍 또 숟가락 얹든지.”
물론, 신세계가 이제 공공의 적이 됐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듣고 있던 파파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태양 연합에게 도구로 이용당하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리디안도 늘 태양 연합이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는 걸 번번이 목격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짜 언제 한 번 제대로 된 철퇴를 맞아야 할 텐데 말이다.
“상황이……. 이번에도 또 애매하긴 하죠? 우리도 어제 지하 도시 일로 신세계한테 갚을 게 있으니…….”
페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지하 도시 레이드 중, 지상 청소 팀을 방해한 일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라, 곧장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그러잖아도 어제 저녁, 아지트에서 신세계에 대한 처우를 주제로 잠깐 달아오르긴 했다.
“그거 때문에 새벽까지, 박회장 님이랑 풍월주 님이랑 샤봉 님이랑, 셋이서 사람들 데리고 신세계 잡으러 바로 맵 돌아다닌 것 같은데. 얄밉게 바로 잠적했나 봐요. 저희 ONE 길드 쪽에선 무필이 확실시한 상태라……. 아마 앞으로 보이는 대로, 페널티 관계없이 죽일 것 같아요.”
역시 전투 길드의 정점다웠다. 살벌한 판결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불쌍하진 않았다.
심판의 수위와는 별개로, 이 기회로 베누스를 비롯한 비매너 플레이어들이 호되게 당하고 다시는 필드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럼 이제 합법적으로 베누스 조질 수 있는 거네? 지금 별언덕 간다고 광고할까? 그럼 우리 따라오지 않을까?”
다람이 히죽 웃으며 모두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베누스를 처참히 패 죽여 놓고도.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김팔라는 그런 다람을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윤재 있는 데다, 스카디 힐러인 리디안 님에 페페 님. 그리고 보리알 님까지 계신 데 오겠음? 죽고 싶어서 일부러 오는 거 아닌 이상. 차라리 만만한 다른 팀 노릴 듯.”
“그치.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라.”
“뭐, 아무튼. 우리는 습격받을 일 없으니까 안심해요.”
크라이그의 시선이 리디안에게 잠시 머물렀다. 여태 자기 혼자, 신세계가 PK를 하러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리디안은 겸연쩍게 웃었다.
한편, 대장군의 새 길드는 모든 작업이 마무리됐는지 하나둘씩 아지트 귀환을 하고 있었다.
‘자유’ 길드원들의 모습이 사라져갈수록, 길드 성 내부의 목소리도 대범해졌다.
눈치 볼 것도 없이 터져 나온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내부를 떠도는 사이, 크라이그의 요청을 받은 길드원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헐. 많이도 왔네.”
파파의 중얼거림에 리디안도 놀란 눈으로 다가오는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탱커는 적혈구였다. 다른 딜러인 시우나 도도, 페이지, 이터널리스트는 그렇다 쳐도. 길드 내 비중 때문에 기대하지도 않은 이노센트에, 타 길드인 호드라까지 온 상태였다.
리디안은 다 모인 인원을 보며 입을 벌렸다. 저레벨들의 지원 요청으로 바쁜 상황을 생각하면, 몹시도 호화스러운 군단이었다.
“아, 뭐야! 별언덕 보스 잡는데 이렇게나 많이 필요해? 정신 사납게!”
눈치 없는 다람이 크라이그를 향해 투정했다. 뭐 하러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렀느냐는 은근한 불만이었다. 괜히 불려온 사람만 민망하게 말이다. 노르드 월드 최고의 아웃사이더다웠다.
리디안은 이노센트의 입가가 실룩거린 것을 보곤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째 그냥은 안 넘어가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이노센트가 성큼 다가와 다람 앞에 우뚝 멈췄다.
“아~ 다람 님. 퀘스트 돕는 거고, 보스 잡는 건데. 당연히 사람 많으면 좋은 거죠. 안 그래요?”
다람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차갑고 살벌한 미소가 번졌다. 다람은 자신보다 키 큰 이노센트를 잠시 올려다보다, 기가 죽어 스르륵 시선을 회피했다.
한참을 침묵하다 잘 모르겠다며 두루뭉술하게 대꾸한 다람의 눈동자는 좌우 바삐 굴러가고 있었다.
얄밉게 땍땍거릴 거라 예상했던 김팔라는 웬일이냐며 혀를 내둘렀다. 지켜보던 크라이그는 그저 본능대로 따랐을 것이라며 짧게 혀를 찼다.
“이야, 세인트 구성 화려해서 좋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적혈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별 언덕 정도면 적혈구에게 위험하진 않겠지만, 탱커 입장에서 힐러가 많다는 건 기뻐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터널, 너 오랜만에 우리랑 같이 사냥하러 가는 것 같은데?”
멤버들을 쭉 둘러본 이노센트가 파이터 이터널리스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디안도 그와 파티를 맺는 게 묘하게 낯설어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이터널리스트가 앞으로 나와 모두에게 하소연했다.
“아니, 내가 리디안 님 가입하고 나서 버스 탑승할 생각에 두근두근했는데. 귀족 딜러들한테 자리 다 뺏겨서 찬밥 신세나 되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아요? 진짜 오늘 혈구 형님 옆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없었으면 또 혼자 놀았을 거야!”
엉엉 우는 척하던 이터널리스트의 시선이 파파에게 향했다. 바드라는 직업 덕분에 리디안에게 딱 붙어 여기저기 다니며 혼자 호사를 누린 걸 생각하면, 가장 친한 친구라 해도 얄미웠다.
그 서러운 하소연에도 파파는 뻔뻔하게 대응했다. 동갑인 두 사람이 장난인 듯 진심인 듯 투덕거리는 동안, 리디안은 이노센트를 향해 밝게 웃었다.
“언니는 바쁘신 줄 알았어요.”
“바빴지, 엄청. 안 그래도 대장군네 이슈로 좀 어수선해졌거든. 근데 윤재 저놈이 도도 님한테 요청하는 거 보고 나도 바람 쐴 겸. 핑계 대고 따라 나왔지.”
이노센트는 크라이그를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리디안은 그 정도로 바쁜 줄 몰랐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 바쁜가 보네요.”
“생각보다 업하겠다는 저렙들이 많더라구? 이 분위기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박회장 님네 길드가 도와주고 있어서 아직은 괜찮아.”
“저도 빨리 퀘스트 끝내고 도우러 가야겠어요.”
불끈 주먹 쥔 리디안이 이번엔 호드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는 인사에 호드라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저만 다른 길드라 민망하네요. 스펙도 별론데. 제가 같이 가도 되나요?”
“부담 갖지 마세요. 광역 경직 필요해서 제가 요청한 거예요. 그러니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크라이그가 정중히 대꾸했다. 리디안도 도와 달라며 맞장구쳤다. 그럼에도 어려워하는 호드라의 모습에 페페가 눈치 있게 나섰다.
“저도 다른 길드니까, 저랑 같은 처지네요. 아, 보리 님도 마찬가지고요. 저희만 따로 뭉칠까요?”
농담에 기분 좋아진 호드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다 모인 인원에 인사도 끝났겠다, 크라이그가 서둘러 파티를 맺기 시작했다.
“딜러는 나랑 호드라 님이 나눠서 잡을 테니까, 리디안 님이 혈구 형님 포함해서 비격 파티 잡아 줘요.”
그에 리디안이 깜짝 놀랐다. 여태 파티 신청을 받기만 했지, 직접 파티를 만들어 누군가를 초대한 적은……. 게임 시절 초보들을 돕던 때라면 모를까. 레기온 길드에 가입한 이후로는 전무했다.
뭐, 큰 레이드가 아니라 파티장에 대한 부담은 없겠지만, 낯설고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디안은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파티 창을 열어 생성을 눌렀다. 그러곤 페페, 보리알, 파파, 다람, 적혈구 순으로 차례대로 초대를 진행했다.
[페페, 보리알, 파파, 다람, 적혈구 님과 파티가 되었습니다.] [크라이그 님으로부터 파티 동맹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Y / N] [크라이그 님의 파티와 동맹이 되었습니다.] [호드라 님의 파티와 동맹이 되었습니다.]“다들 들으셨겠지만. 지금부터 별언덕 보스 잡으러 갈 건데. 혹시 패턴 모르는 사람 있어요?”
확인차 모두에게 물은 크라이그의 시선이 유독 한 곳에 정지했다.
시선의 종착지는 바로 리디안이었다.
리디안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에 당황했다.
“거, 거긴 예전에 퀘스트 때문에 간 적이 있어서 알고 있긴 해요.”
부끄러운 대답에 이노센트가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덩달아 오, 하는 호응이 들려오자 리디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헬하임 레이드를 갈 때마다 패턴에 대해 몰랐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긴. 별언덕은 메인 퀘스트 때문에 한 번쯤은 다 들르는 곳이었죠?”
생각났다는 보리알의 말에 저마다 그러네, 를 중얼거렸다. 워낙 오래되어 패턴이 가물가물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역시 폐인… 아니, 하이 랭커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