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본의 아닌 박회장의 퇴장 덕분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진지한 이야기도 끝났겠다, 대장군이 기다렸다는 듯 크라이그를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대부분 스킬에 관한 것이었고 핵심은 3단 콤보였다. 지난번, 크라이그가 베누스를 단번에 처리해 버린 일화가 헤른을 통해 여기저기 퍼져나간 까닭이었다.
아직 스킬 사용에 있어 어리바리한 대장군이 대단하다며 크라이그를 추켜세우자, 지켜보고 있던 마제스티와 백검이 불쑥 끼어들었다.
“에이~ 장군 님, 그거 별거 아니에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샥! 하면 슥! 이죠.”
잘난 동생을 괴롭히는 짓궂은 형들처럼 마제스티와 백검은 이리저리 몸짓해 가며 허풍을 떨었다.
이어 자연스럽게 시작된 그들만의 지루한 스킬 토론에 보리알이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리디안과 페페는 보리알을 배웅하려 곧장 따라 일어섰고, 보리알은 뭔가 생각난 듯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아. 혹시 두 분…….”
보리알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물어봐도 되는지, 두 사람이 알고 있을지, 혹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지― 그런 걱정에서였다.
그래도 보리알은 두 사람을 믿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신세계 길드였던 나쵸. 햄스터. 두 사람, 아시죠?”
생각도 못한 이름이라, 리디안과 페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신세계 길드원이라는 것 자체가 네임드 반열이니, 그 두 사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음. 저번에 길드 성에서 탈퇴하는 거 직접 보긴 했는데. 그 이후로는 보질 못했어요.”
“저는 최근에 아예 본 적이 없네요.”
“그래요…….”
내심 안타까워 보이는 눈빛과 힘없는 목소리였다. 리디안은 보리알이 그 둘을 신경 쓰고 있음을 눈치챘다. 햄스터야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나쵸는 그래도 같은 힐러였으니 접점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건너 건너 들은 사실이지만, 보리알은 원래 저레벨 힐러들을 잘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레이드 콘텐츠가 나오면서부터 과정이 좀 스파르타해진 것일 뿐. 슈퍼문에 신입 길드원들이 자주 들어오던 1년 전만 해도 세인트의 ‘어미 새’ 역할은 보리알이 전속으로 맡고 있었다.
페페도 그걸 알아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나쵸는 제대로 된 스승 없이 홀로 떠도는 처지나 다름없으니, 그 위태로운 모습에 보리알이 마음 줄 법도 했다.
“보리 님. 혹시 나쵸 님 걱정돼서 그러세요?”
햄스터까지는 설마 싶어, 리디안은 나쵸를 먼저 언급했다. 그에 머뭇거리던 보리알은 작게 한숨 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요. 뭐, 제가 길드로 끌어들이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고요. 그냥… 둘만 나가서 따로 지낸다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라고 내린다고도 하니까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걱정된다는 뜻이었다.
나쵸는 그렇다 쳐도 햄스터는 좀 의외라, 리디안과 페페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보리알의 따듯한 마음이 잘 느껴져 리디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라면 조심스럽게 연락해 봤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약간 부끄러워 리디안은 볼을 긁적였다. 페페도 자신 역시 당연히 그럴 거라며 슬쩍 리디안을 쳐다봤다.
“그래도 될까요? 아무래도 길드 관계가 좀 그렇기도 하고. 솔직히 저도 몇 마디 나눈 적도 없고……. 오히려 나쵸 님한테는 좀 죄송한 일도 있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괜히 연락했다가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닌지.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괜히 자유 길드가 힐러한테 작업 친다고 오해받지 않을지. 좀 망설여지네요.”
세심한 걱정에 리디안은 작게 탄성했다.
전투가 가능한 세인트의 존재가 귀한 판국이다 보니, 보리알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간 봐왔던 나쵸의 순한 모습이나 길드 성에서 햄스터가 보인 행동만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 속내야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햄스터가 나쵸를 위해 한 행동이 진심이라면, 도움의 손길을 딱히 거절하진 않을 거다.
리디안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음. 사정을 잘 모르는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걱정되는 마음이라면 한 번은 연락해볼 것 같아요. 다른 상황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이요. 저도 비슷하게 도움받았거든요.”
살짝 웃은 리디안은 처음 이곳에 왔던 때를 떠올리며 페페를 쳐다봤다.
헤른과 우래귀, 캐니와 같은 파티의 도움도 있었지만, 세인트로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페페의 초기 관심과 도움도 컸다.
“저도 리디안 님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이어진 보리알의 시선에 페페는 그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사실 나쵸라는 세인트에 관한 이미지라면 익히 알고 있었고, 페페가 보기에도 나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뭐, 이건 제삼자인 페페가 왈가왈부할 이야기는 아닌지라. 페페는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속사정은 당사자들이 직접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아는 일이니 말이다.
“두 분 의견을 들으니 좀 시원해졌네요. 말씀대로 한 번 연락해 봐야겠어요.”
생각난 김에 바로 가야겠다며 보리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길드 성으로 향하는 보리알의 모습에 리디안과 페페는 잘되길 바란다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 * *
그날 밤.
리디안은 나쵸가 ‘자유’ 길드에 먼저 가입하게 됐다는 훈훈한 소식을 보리알에게서 전달받았다. 동시에 그 요청을 햄스터가 직접, 보리알에게 정중하게 요청했다는 놀라운 소식도 말이다.
덕분에 미드가르드는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헐. 그럼 나중에 햄스터도 자유 길드로 들어가겠네요?”
“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보리 님이 길드원 허락 다 받고 권유했는데. 거부하셨대요.”
나쵸의 가입으로 인해 나쵸와 햄스터의 소식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아무래도 둘 다 신세계였던 탓에 반응은 상당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어떻게 신세계를 다시 품느냐고 손가락질이 뒤따랐지만, 제법 온화한 시선도 있었다.
“나쵸? 경력도 없고, 힐런데 뭐 상관있을까? 그리고 힐러 귀한 마당에 무슨 출신을 따져? 잘 키워서 갱생시킬 생각부터 해야지.”
“그쵸. 힐러는 인성 쓰레기급 아니면 무조건 품어야 함. 그리고 내가 보기엔 나쵸, 신세계에서 거의 뭐 볼모 신세 아니었나?”
나쵸의 성향을 잘 아는 전투 길드 쪽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보다는 햄스터의 변화. 그리고 햄스터 향후 자유 길드로 들어가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잠깐잠깐 쉬러 오는 길드 아지트에서도 요즘은 햄스터 이야기만 가득했다.
“아무래도 좀 그렇지. 본인도 그간 업적 쌓은 거 알아서 사람들 시선 신경 쓰는 것도 있을 거야. 나쵸야 힐러인 데다가 그다지 네임드도 아니었으니 금방 묻힐 테지만. 햄스터는 아니잖아?”
이노센트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고개가 덜컥덜컥 끄덕였다.
“개과천선해서 새 출발 한다고 쳐도 신세계라는 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거야. 자유 길드에서 찬성했는데도 굳이 나쵸만 혼자 보낸 걸 보면. 본인도 피해 주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닐까?”
추측성 설명에 백검이 끄덕이며 수긍했다. 리디안은 그게 좀 안타까워 작게 한숨지었다.
이왕 변심한 김에 좋은 길드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면 더 좋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햄스터의 결정이 배려심 있고 용감한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햄스터에 대한 이미지는 꽤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까 베누스가 문제라니까요? 걔 때문에 햄스터도 물든 거고, 이제야 나쁜 물 빠지는 거야.”
언젠 햄스터고 베누스고 다 똑같은 끼리끼리라고 투덜거리더니. 구석에서 태세 전환 중인 아이쿠를 보며 리디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뭐, 암튼 잘됐네. 난 또 혹시나 햄스터가 다시 베누스랑 붙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예 갈라선 거 보니 신세계도 재기하긴 힘들겠다.”
“거긴 이제 끝났죠. 베누스 다 털리고 템 구한다고 난리 피우더니. 요즘 잠잠하대요? 쿠렉이나 백사부 같은 애들도 안 보이고.”
“현실을 깨달은 거지. 백날 골드 쥐고 템 산다고 소리쳐 봐라. 누가 팔아 주나. 그리고 남은 애들끼리 뭘 하겠어? 쿠렉만 은신해서 가끔 뒤 치기 하러 오겠지.”
“그날, 쿠렉도 기 많이 죽어 보이던데요. ‘저렙의 난’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아, 근데 나 같아도 찝찝해서 필드 오기 싫을 듯. 그때처럼 또 둘러싸여서 다굴당하면…….”
그때의 광기를 생생하게 떠올린 테세우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공식적인 신세계 척살이 끝난 것도 아니고, 몇몇 일반 플레이어들이 아직도 재미 삼아 그들을 추적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날의 사건이 ‘저렙의 난’이라 불리며 회자되는 것도 웃지 못할 일이었다.
“덕분에 저레벨들 활발해지고 얼마나 좋아요. 덩달아 친목 길드까지 신나서 탑승하더구먼.”
파파가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필드 사냥도 친목의 일환이기에 친목 길드의 필드 활동이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단체의 힘을 과시하듯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사냥터를 돌아다니는 게 문제였다.
단체 소풍을 온 것처럼 60명씩 풀 파티를 맺고 레이드 하듯 일반 필드를 들쑤시는 게, 요즘 친목 길드의 트렌드였다.
과거에도 가끔 있던 일이라 누군가는 그러려니 할 테지만.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텃세였다.
전투 길드 연합에서, 많아야 두 개 나오는 풀 파티가 인원 많은 친목 길드에선 네 개, 다섯 개씩도 나오고 있으니. 친목 길드가 마음만 먹으면 맵 하나에 연결된 모든 구역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규모 길드에서 그들의 행동을 좋게 볼 리 없었다. 특정 길드의 맵 독점에 대해 아니꼬운 시선이나 말투라도 던지면, 득달같이 달라붙어 버리니. 얼마 안 가,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요 며칠 사이 무생숲 A구역은 아예 별님반 지정 구역이었잖아요. 뭐 인원이 깡패고 걔들도 일단은 예약 시스템 지킨 거라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그래도 자기들끼리 파티 바꿔 가면서 종일 돌려쓰는 건 좀 너무했죠.”
레기온의 맵 예약 담당인 괴자가 찌푸리며 말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크라이그는 지난번 호드라와의 은밀한 거래를 떠올리며 뜨끔했다. 엄밀히 말해 그건 호드라의 자발적인 양보였지만, 자칫하면 부정 예약으로 몰릴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길드별로 맵, 구역당 제한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죠. 웃긴 건 그 얘기 하니까 자기들도 손해라는 거 알고 그때부터 자중하더라고요.”
“친목 쪽 애들은 단합력이 너무 강해서 문제야.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를. 아 대기업은 무조건 예외. 거긴 친목 아니고 전투니까.”
이모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파파가 허공을 바라보며 인상 썼다.
“눈치껏 행동하는 건 과일박스뿐인 듯?”
“에이. 걔들은 그냥 몸 사리는 거죠. 과일 놈 그간 죽은 듯 있더니. 요즘 다시 딸랑딸랑하던데. 확실히 아이템 뿌리니까 효과 쩔어요, 진짜.”
“어쩌겠어요. 길드원들은 하이 랭커 9위라고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데. 정작 과일 놈은 해줄 게 없으니……. 그래도 여름 전까지는 물망초 인맥 덕 보면서 태양한테 쩔도 타고 템도 얻어 쓰고 그랬는데. 하여튼 멍청한 새X. 멀리 볼 줄도 모르고.”
테세우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뒤의 일은 리디안도 잘 알고 있었다.
프루츠맨은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물망초와의 관계를 단번에 끊어내곤 이후 ‘스카디의 영광’을 두고 태양 길드와 소유권 분쟁을 벌였다. 덕분에 리디안이 ‘단죄의 단도’와 거래해 스카디를 얻긴 했지만. 그들의 일화만 보자면 정말 추잡하기 그지없는 싸움이었다.
“좀 아깝다. 과일박스도 잘만 케어하면 훌륭한 전력인데.”
“과일 놈이 길드 내에서 정치질을 잘 해놔서. 거긴 글렀어요.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전투든, 같은 친목이든. 그냥 다 씹고 다니던데, 뭘.”
“과일이 자체가 인성이 좀 그렇죠. 걔 예전에 ‘제국’ 길드였잖아요. 풍월주랑 같은 길드 출신. 길드 사냥에서 나온 템. 길마가 풍월주 줬다고 그거 가지고 개X랄 떨다가 탈퇴한 거라면서요.”
“거 템도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때 풍월주가 레벨 더 높아서 줬다는 게 포인트임.”
“그 후에 과일이가 친목 정치질로 제국 길마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잖아요.”
“근데 그걸 지가 똑같이 따라 했다는 게 더 웃김.”
처음 듣는 프루츠맨의 스토리였다.
속 좁은 그의 일화에 리디안의 눈이 커졌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들이 왜 그렇게 프루츠맨을 싫어했는지 더 이해가 갔다.
워낙 흉볼 게 많은 사람이다 보니, 이후로는 프루츠맨과 과일박스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