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그동안 여러분이 이곳을 어떻게 생각해 왔을지. 솔직히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게임이라 생각해 왔을 테고, 누군가는 현실이라고 인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미드가르드의 분위기처럼요.”
뜸 들인 레온의 서두에 사람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성질 급한 이들은 어서 본론만 말하라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레온은 굴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물론, 저희로서도 초반엔 이곳이 게임이 아닐 수도 있음을 누차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게임 시스템에 어느 순간 우리는 의문을 접어둔 채, 불편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묻어두고 당장의 일상에 안주했습니다.”
레온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점차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광장의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기존과 다른 변수 등이 많았지만, 초중반까지만 해도 저희는 크게 이상하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하고 상식적인 시스템적 해석으로 얼마든지 풀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랬기에 대다수가 이곳이 게임, 노르드 월드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물러선 레온이 마제스티를 바라봤다. 군중 내에서 짙은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마제스티가 퀘스트를 언급했다.
“마녀의 무덤 클리어 이후. 저희 측에서 우연히 ‘비극의 일기장’이라는 아이템을 얻었고 퀘스트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일련의 미심쩍은 사건들을 여러 차례 겪었으며 점차 이곳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려는 건. 우리가 있는 이곳에 대한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모두가 고정관념, 상식을 버리고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우리가 알던 게임 ‘노르드 월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을 다른 차원의 ‘노르드 월드’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번갈아 이어진 두 길드 마스터의 설명에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고정관념과 상식을 배제한 채 생각해 달라는 말이 앞에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득한 이야기였다.
광장은 한동안 조롱과 분노, 흥분이 가득한 고성으로 가득 찼다. 특히 지독하리만치 극단적인 현실파 플레이어들은 말도 안 된다며 삿대질했다.
“시X!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뭔 개소리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현실을 믿지 않을 이들이었다. 잔뜩 분개한 그들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이미 흐레스벨그의 목격담이 퍼져나간 뒤라, 전투 길드의 공표를 바로 믿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조금 전 그랬듯, 서로의 의견 마찰이 시작됐고 레온은 혼돈을 막기 위해, 흔들림 없는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곳은 가상 현실 세계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던 게임 세계와 같으면서도 다른 곳이기도 합니다. 아주 확실하진 않지만 평행 세계나 패러렐 월드 등의 일부로 추정되며 현재 이곳은 어떤 미지의 이유로 인해 게임과 현실이 뒤섞이는 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힘이 실린 굳센 목소리에 시끄러웠던 잡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중요한 건, 우리는 이곳 주민들에게 있어 ‘이방인’ 내지 침략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침공전 또한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흑막, 또는 적대 세력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잠깐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멎었다.
곧 고요함을 뚫고 질문 공세가 시작됐지만 레온은 깡그리 무시한 채, 그간의 경위에 관해서만 설명했다.
“변화에 대한 전조를 느낀 지는 꽤 됐습니다. 앞서 마제스티 님께서 말씀해 주신 ‘비극의 일기장’ 퀘스트를 마지막까지 완료함으로써 관련한 이상 징후들을 여럿 발견. 그 과정에서 이곳의 원주민으로 추정되는 ‘미미르’라는 이세계의 존재이자 원주민. 그리고 ‘파프니르 계곡’이라는 공간을 저희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계신 하이 랭커분들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레온은 이번 이야기에 있어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연달아 강조했다. 흐레스벨그 등장 이후로 흔들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 확인 사살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래봤자 서버에 갇힌 것이겠거니, 아니면 질 나쁜 운영진의 농간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플레이어들은 ‘이세계’라는 단어에 깊은 혼란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말문이 막힌 채 전투 길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 명 가까이 되는 하이 랭커들이 단체로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증거를 확인했다는 말 자체가 이 주장에 상당한 힘을 실어줬다.
플레이어들은 얼빠진 얼굴로 초점을 잃어갔다.
“그 시점부터 저희는 이 사태를 진중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점차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여러분께 번질 혼란을 우려해 미리 공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요툰하임에서 ‘흐레스벨그’를 마주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이 진실을 숨겼을지도 모릅니다.”
레온은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숙였다.
“오늘에서야 이 불편한 진실을 밝히게 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뒤따라 전투 길드원 전체가 고개 숙였다.
소름 끼치도록 진지한 그들의 태도에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언의 공포와 혼란이 가득한 가운데, 누군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보스에 대한 소문도 진짜인가요?”
레온을 비롯한 길드 마스터 전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해졌던 좌중은 또 한 번 소란으로 들끓었다.
“그 말이 진짜라고? 그걸 그럼 어떻게 잡아?”
“못 잡지. 패턴이 없다는데 어떻게 잡아? 하이 랭커들도 바로 튀었는데.”
“뭐야. 우리 진짜 다 죽는 거야?”
“저기요! 사망 페널티는요?!”
“침공전 클리어 못 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누가 우릴 가둔 건데요? 혹시 우리가 뭘 잘못한 건가요?”
“그럼 우린 여기서 죽어요? 돌아갈 가능성은요?”
겁에 질린 이들에게서 다급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비참하게도 답변은 한정적이었다. 영양가 없는 답변은 사람들의 화를 부추겼고 광장은 오랫동안 절규와 분노에 휩싸였다.
폭발해 가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전투 길드원들은 하얗게 질린 채 굳어버렸다.
리디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곳 분수대 주위로만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만 해도 무섭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러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곤란한데…….”
옆에 선 이노센트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걱정했다. 말대로 최악의 경우, 극단적인 이들이 폭주해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간 신세계가 저질러왔던 만행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침공전에 대한 재도전은커녕. 플레이어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고 와해하여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앗.”
어디선가 날아온 노란 동전 하나가 리디안의 팔을 맞추고 튕겨 나갔다. 분노한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골드를 집어 던진 것이다.
그에 크라이그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으나, 뒤이어 동전이 또 날아들었다. 사방에서 날아온 동전은 크라이그를 비롯한 여러 하이 랭커들의 몸을 두들겼다.
전형적이고 소심한 화풀이었다.
물론 그까짓 동전 따위에 맞아봤자 별 타격은 못 됐다. 하지만 타인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는 게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 불편한 마음에 살짝 찡그리면서도 리디안은 한편으로 소름이 끼쳤다.
‘만약 오늘 내 이야기를 했다면…….’
공표 내용 중에 퀘스트에 대한 약간의 언급은 있었다. 그러나 길드 마스터들은 어떤 퀘스트인지, 진행자가 누구인지. 또 퀘스트 아이템인 ‘오딘의 눈’에 대해서조차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고 어쩌면 야금야금 퍼져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상세히 밝힌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복잡한 문제였다.
모든 책임이 전체에게 쏠린 것과 개인에게 치중된 것은 완전히 다르다. 돌아올 비난의 강도도 다를뿐더러, 짊어져야 할 책임감의 무게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마제스티는 굳이 리디안을 앞에 세우고 싶지 않아 했다. 그저 퀘스트를 진행했을 뿐인 리디안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모든 책임을 리디안이나 레기온에 떠넘기려 했던 핑크푸크를 흘겨보면서 말이다.
덕분에 화살받이 신세는 면했지만, 배려받은 리디안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리디안은 말없이 고개 숙였다. 그를 눈치챈 이노센트는 조용히 리디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공표 이후 삼십여 분 동안, 광장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이 서로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할 때도 길드 마스터들은 차마 개입하지 못한 채 방관해야 했다.
수습 불가한 상황이 내리 이어지던 때였다. 누군가 분수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우렁차고 걸걸한 목소리에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단순한 질문이었을 뿐인데. 싸우던 사람들도 잠시 행동을 멈춘 채 답변이 나올 곳에 집중했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이렇게 다 모아두고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진중하게 울려 퍼진 남자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삐딱해진 어느 플레이어가 곧장 그에게 반박했다.
“시X! 이제 와서 그게 뭔 소용인데! 저 새X들 아까도 털리고 왔는데. 이 상황에 가망성이 있겠냐?”
아마도 이십 대 초반. 나이 어린 친구의 울화통이 쩌렁쩌렁 허공을 울렸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인파를 가로질러 나타났다. 아이디는 ‘돈게스’. 조금은 장난스러워 보이는 아이디와는 달리 중후한 인상에 떡 벌어진 체격을 가진 사십 대 아저씨였다.
‘돈게스’는 자신에게 반말과 욕을 지껄인 어린 친구의 무례에도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며 받아쳤다.
“그래서 계속 징징대기만 할 겁니까?”
“아, 누가 징징댔다고! 솔직히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는 건데?”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후회하는 것보다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돈게스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모두에게 말했다. 꼬집는 듯한 말투라 반감 어린 시선은 많았지만 대놓고 그에게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비로소 좌중이 고요해지자 돈게스는 작게 혀를 차더니 한마디 더 했다.
“당신들도 작작하십쇼. 그렇게 자기 안위가 걱정됐으면 진작 저 양반들처럼 여기저기 움직였어야지. 그동안 저 사람들이 자진해서 여기저기 휩쓸고 다녔고, 그만큼 가장 희생도 많이 했을 건데. 그 정도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저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무책임과 방관을 꾸짖는 일침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빤히 보이는 부끄러움에 돈게스가 목소리를 더 높였다.
“난 오히려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 정도까지 알아내 주었다는 사실에요! 그간 저 사람들이 우리 대신해서 희생 감수하면서까지 위험한 지역 드나들어 준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 양반들한테 책임 전가할 자격 되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할 말 있으면 지금 한번 해보십쇼!”
성난 일갈이 사람들의 뺨을 때렸다. 돈게스 주변에 있던 이들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그간 광장을 가득 메우던 잡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생각도 못 한 지원병에 전투 길드원들은 어리바리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혹시 아는 사람이냐는 물음이 떨어졌지만, 모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뭐여. 저 아재, 전투 길드 첩자 아님?”
어디선가 의혹 가득한 시선이 날아왔다.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그러나 리디안도 반쯤은 설마―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간부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도 돈게스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잠시 후, 군중들 사이에서 ‘돈게스’에 대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글쎄. 아닐걸. 저 아저씨, 가을 길드잖아. 가을 길드 길마가 별님반 라인인데. 설마…….”
“저 사람도 가을 원년 멤버임. 첩자일 확률 낮음.”
잠깐의 의심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를 봐온 플레이어의 증언이 나타나자 첩자 의혹도 쏙 들어갔다.
결국 돈게스는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태도를 보인 것뿐이었다. 그의 진정성이 증명되니 좌중은 더 숙연해졌다.
레온과 마제스티 등. 전투 길드 일동은 돈게스를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정리되었고 일반 플레이어들도 조금은 양심에 찔리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