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13
313화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플레이어들의 어깨는 축축 늘어졌다. 심지어 저 앞에 거대한 산도 넘어야 한다니. 까마득한 거리에 몇몇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자자, 칭얼거리지 말고. 앞 사람 따라서 쭉쭉 갑시다!”
보다 못한 백검이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복합적인 사정을 고려한 하이 랭커들이 죽을상을 짓는 동안. 대기업을 따라 행군하는 일반 플레이어들은 그저 해맑았다.
“메인 퀘 순서면 알프하임 두 번째잖아. 요툰하임 X나 쉬웠으니까 알프하임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요정 여왕 뜨자마자 바로 쓸려버린 사람인데. 지금 성물 있어서 하나도 안 무서움.”
“양심적으로 요툰, 알프, 바나까지는 쉬워야지.”
요툰하임을 거의 날로 먹은 결과의 여파는 상당했다. 성급한 추측과 기대에 후열은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선두에 있어 그 분위기를 알 수 없던 리디안은 먼 산을 바라보며 빌고 빌었다. 제발 힘든 여정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토벌단이 죽을 듯한 기세로 비실비실 초원을 걷다 보니 어느새 피네 강 근처였다.
피네 강은 제법 깊고 물살이 센 강이지만 튼튼한 석조 다리가 지어져 있어 겁날 것은 없었다. 질서 있게 다리를 지나던 리디안은 문득 주변 풍경에 눈을 돌렸다.
계절 감각을 잊게 만든 푸른 초원과 시원스러운 강의 물줄기. 멀리 보이는 산맥의 아찔한 비경과 청명한 하늘. 공기며, 소리며. 엇나간 것 없이 땅과 하늘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생동감 넘치는 자연 풍경에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질감 없이 녹아든 근처 플레이어들의 모습도 큰 영향이었다.
모든 게 당연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이제는 친근하기까지 했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리디안은 한참을 넋 놓은 채 풍경을 바라봤다.
“리디안 님.”
레온의 목소리였다. 가장 선두에서 걸어야 할 사람이라, 리디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서로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그간 꽤 같이 활동했어도 약간의 거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레온 역시 어색함에 웃으며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어제 흐레스벨그 잡고 나온 아이템 중에 악손 있다고 하셔서요.”
“아, 악손…….”
리디안은 곧장 파파를 떠올렸다. 어제 요툰하임을 정리하고 귀환하기 직전. 파파가 쏜살같이 달려와 무얼 먹었느냐며 캐물었기 때문이다.
딱히 숨길 이유가 없어 리디안은 그대로 읊어줬고 파파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대리 자랑했다. 그러니 레온의 귀에 들어간 것도 당연했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리디안이 민망하게 웃었다.
“네. 맞아요. 악손이 나왔더라구요.”
“그거 혹시, 저한테 팔아주시면 안 될까요?”
리디안은 갸웃했다. 레온이 다크 템플러의 아이템을 뭐 하러 사나 싶었다. 그에 인드라가 떠올랐다.
ONE 길드에서 인드라는 악손 대신 악발을 메인 무기로 사용하는 다크 템플러다. 길드원에게 사주려는 것이면 인드라 외엔 적임자가 없었다. 리디안은 헤헤 웃으며 물었다.
“인드라 님 드리려고요?”
“아… 그게… 음, 네. 아는 분 선물하려고…….”
레온의 목소리는 자꾸만 작아졌다. 은근슬쩍 허공으로 시선을 회피하기까지도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 리디안은 악손을 선물하려는 이가 인드라가 아닌, 사이임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전에 괴자 님이랑 오토마타 님이 그랬었지. 사이, 그분이 악손 보면 눈이 돌아갈 거라고.’
하츠에게 악손을 팔던 날, 분명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사이가 하이 랭커임에도 악손이 없는 건 사실 이상했지만, 사정을 따져보면 그럴 만도 했다.
헤른에게 듣자하니, 거래는 주로 친구인 도도가 맡아왔다고 한다. 워낙 신경질적이다 보니 거래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도가 한들 효과는 없었다.
근본적으로 프리피케 길드의 이미지가 문제였다. 아무도 프리피케 길드원과 거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도도가 한동안 부캐릭터로 접속해 악손을 산다고 외치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다.
“혹시 사이 님…….”
레온이 민망하게 웃었다.
“그게… 좀 어이없으시죠?”
“아, 아뇨! 그냥 좀 의외여서요.”
“…그분이 고작 아이템 하나에 마음 풀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그냥 사죄의 뜻이에요.”
리디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본인도 정말 크게 반성하고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상대는 사이였다. 레온의 말처럼 마음을 돌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고작 아이템 하나로 말이다.
레온도 그걸 알아 일부러 도도를 통해서 전달할 생각이었다. 도도가 중간 다리가 되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이었다.
“그런 목적이시면 당연히 팔아드려야죠. 부디 잘 되길 바랄게요.”
“그럼 지금 제가 바로 4억 드릴게요.”
4억. 리디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네? 4억이요? 하츠 님 한테도 3억에 팔았던 것 같은데요?”
양심적으로 4억은 아니었다. 지금은 공급 상황이 달랐다. 하츠에게 팔 당시엔 희소성 꽤 있었지만, 이후 연달아 이어진 레이드에서 알게 모르게 물량이 증가한 상태다.
언뜻 풍문으로, 레온의 씀씀이가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 악손을 4억에 파는 건 너무 양심 없었다.
그에 슬쩍 크라이그를 바라보니, 크라이그 역시 레온의 통 큰 제안에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다. 리디안은 한숨 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4억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3.5?”
“그것도 너무 비싸지 않아요? 요즘 거의 무기는 1억 언저리로 거래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런 거래는 거의 물물교환식이고, 다 아는 얼굴이라 에눌 더 들어간 거죠. 악손은 그래도 아직까진 찾는 사람 많으니, 4억도 충분해요.”
아직은 거리를 지키고 싶다는 말로도 들렸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리디안은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마음 같아선 공짜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레온과 그렇게까지 할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본인이 저리 말할 정도니. 좋은 마음으로 싸게 줘도 레온이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돈도 많은 사람이고, 먼저 비싸게 사겠다잖아요. 이참에 쫙쫙 뽑아먹어 버려요.”
곁에 있던 크라이그가 넌지시 중얼거렸다. 악마의 유혹에 리디안의 귀가 팔랑거렸고 레온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잘 생각해 보니 가격을 조금 낮춰도 될 것 같아요.”
급격한 태세 변환이었다. 작게 웃은 리디안은 자신의 기준에서 적당한 가격을 내놓았다.
“정가에 사시는 거면 3억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이상으로 팔고 싶진 않아요.”
더 싸게도 줄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레온은 칼같이 3억을 건넸다. 한순간에 또 커다란 골드가 생긴 리디안은 절로 군침을 삼키며 레온에게 악손을 양도했다.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요.”
주섬주섬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레온이 이번엔 인첸트 스톤을 건넸다. 그것도 세 개나.
리디안은 3억을 받았을 때보다 눈이 더 흔들리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지르진 마세요.”
강화의 마음을 잘 아는 레온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삼촌이 고개를 쭉 내밀며 끼어들었다.
“아, 레온 님도 너무하시네. 섭스로 스톤을 세 개씩이나 받고 어떻게 참아요? 냅다 스톤 다 모아서 대장간으로 가야지. 리디안 님. 제가 대신 맡아드릴까요?”
삼촌이 혀를 날름거리며 킬킬 웃었다. 리디안은 냉큼 괜찮다며 서둘러 스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모습에 레온이 박장대소했다.
“이제 진짜 프로 강화러 다 되셨네요.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레온이 물러나자 이번엔 세인트 무리가 우르르 다가왔다.
“아, 리디안 님. 저 다 봤어요. 나쁜 마음 가지면 안 돼요. 알았죠?”
“그래, 맞아요. 강화는 늘 신중하게.”
“그거 지르시면 저 울 거예요.”
“이거 모두의 평화를 위해 스톤 압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규호, 그레이스, 이모탈, 무니가 시어머니처럼 쫑알거렸다. 그 모습이 뭔가 웃기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리디안은 슬며시 히죽거렸다.
“어제 스톤 드신 분들 많겠죠?”
살짝 스톤 매입의 분위기를 풍기니 모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절대 안 된다고 대동단결 외치는 그들의 모습에 리디안은 은근한 재미를 느꼈다. 농담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크라이그는 그런 리디안을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함에 헛기침한 리디안은 그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 돌아본 뒤편에선 마침 태양 연합의 일반 플레이어들이 두세 명씩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어…….”
가까운 곳에 낯익은 이름과 얼굴이 보였다.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흑곰 / 길드 : 태양
레벨 : 73 / 직업 : 워로드 / 보조 직업 : 대장장이
HP : 2640 / MP : 970
흑곰은 고목나무 전쟁 이후 도망치듯 레기온을 탈퇴한 플레이어였다. 태양 길드인 백두오리에게 길드의 정보를 내어준, 이른바 ‘쁘락지’이기도 했다.
자기 딴에도 양심에 찔린 건지. 흑곰은 푹 고개 숙인 채 서둘러 앞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레기온 길드원들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아오, 저 쉬벌놈.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오늘 알프하임에는 참전하나 보네.”
분노를 참지 못한 무니가 험한 말을 뱉었다. 타 길드의 세인트들 역시 사정을 알고 있어 흑곰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이모탈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백두오리가 잘해주나 보네. 여태 붙어 다니는 거 보면.”
“씁쓸하네요. 아직 서로 얼굴 붉힐 일이 남았다는 게.”
괴자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침음을 삼켰다.
“그냥 잊어요. 그동안 저 사람 생각 하나도 안 했잖아요, 우리. 앞으로도 그냥 없는 사람,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 그만이에요.”
이모탈이 레기온 세인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의 이모탈답지 않은 냉정한 말이지만 흑곰이 벌인 짓은 생각하면 보살 수준이었다.
리디안도 그에 동의했기에 흑곰과 백두오리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괜히 눈이 마주쳐 서로 불편할 필요는 없었다.
* * *
피네 강을 건너 조금 더 전진하자 금방 지대가 울퉁불퉁해졌다.
니다벨리르 산맥과 이어지는 언덕 같은데, 별도의 맵 이름은 없었다. 게임 내에서도 본적 없는 지역이라 일부 무리에서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이쯤 되니 게임의 맵과 노르드 월드의 지형이 섞인 게 확실한 듯했다. 하이 랭커들이 저마다 추측하는 동안, 신사는 예정대로 산맥 통과 루트를 강행했다.
하지만 잔뜩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산맥의 초입부는 평탄했다. 당장 시각적인 것만 봐도 그랬다.
멀리서 보이던 험준한 이미지가 우스우리만치, 오히려 평평한 고원에 가까웠다. 토벌단은 그 고원을 그저 걷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오르막길을 올라도 피로도만 조금 떨어질 뿐. 체력적인 저하가 없자 리디안이 다행이라며 보리알에게 소곤거렸다.
“산맥이라 그래서 긴장했는데, 그냥 일반 맵이랑 똑같네요. 저번 파프니르 계곡과는 좀 다른가 봐요.”
“파프니르 계곡은 진짜 실존하는 곳이고, 여긴 원래 있는 게임 맵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보아하니 노르드 월드의 진짜 구역만 실제처럼 적용되는 모양인데요?”
이제는 구분에 익숙해진 보리알이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세인트 무리 중에서 파프니르 계곡에 갔던 사람은 리디안과 보리알 단 둘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감대가 같았다.
“정말 그런 거면 다행이에요. 거기 올라가느라 살짝 고생한 거 생각하면…….”
“설마 그런 곳이 또 있지는 않겠죠?”
“음… 장담은 못 할 것 같아요.”
“후… 역시 그렇겠죠?”
어제 요툰하임에서 태양 연합과 함께 다녔던 게 지루했는지. 보리알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떠들었다.
대부분이 무너스키에 대한 불만이었고, 따라온 먹구름까지 열을 내며 토로했다. 다소 웃지 못할 광경이었으나 덕분에 리디안이 심심할 일이 없었다.
토벌단은 대략 이십여 분에 걸쳐 니다벨리르 산맥을 통과했다. 점차 고도가 낮아지고 산맥을 완전히 벗어나자 ‘할렌 평원’이 나타났다.
할렌 평원은 알프하임 도시를 감싼 대초원 지대다. 평상시엔 크고 작은 버섯 정령들과 ‘버섯 즙’ 채집이 목적인 저레벨이 바글바글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할렌 평원 역시 침공전의 영향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바람결에 풀숲만 들썩거렸다.
기묘하리만치 고요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