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18
318화
다시금 검을 쥐어 드는 그녀의 모습에 리디안이 기겁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마주했던 모습으로 보아 진심이 분명했다.
그때, 신사가 번쩍 손 들어 급히 외쳤다.
“잠깐, 잠깐만요! 저희와 협력할 생각은 없는 겁니까?”
협력이란 단어에 브륀힐드가 멈칫했다. 흥분했던 박회장도 그 모습에 즉각 태도를 바꿔 안달했다.
“맞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있으면, 변절자를 잡는 것에 있어 훨씬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꽤 그럴듯한 설득이었다.
그러나 브륀힐드는 박회장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의 도움 따윈 필요치 않다. 우리에게 있어 너흰 변절자와 같다. 우리 세계를 위협하는 ‘악’이다.”
“달라요! 우린 지금 이용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아니, 물론 우리가 가진 힘이 이곳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억울하지!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처절한 외침에도 브륀힐드는 가소롭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살고 싶어 안달이 났군. 하나 소용없다. 너희가 발악해 봤자, 이 라그나로크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라그나로크의 결말이요……?”
리디안과 플레이어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금 브륀힐드가 말하려는 건 플레이어들의 패배와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브륀힐드는 선심 쓰듯 플레이어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다. 이 세계의 침식을 막는 것.”
“그 방법이 ‘라그나로크’인가요?”
“그렇다. 우리는 라그나로크로 미드가르드를 비롯한 모든 지역의 멸망을 일군다.”
멸망. 그 끔찍한 단어에 리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의 군대는 너희 이방인과 침식된 자들을 말살한 뒤, 오염된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위그드라실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야말로, 그 최후의 끝이니. 우린 새로운 위그드라실에서 다시 태어나 평화의 세계를 맞이할 것이다.”
즉, 오딘은 시스템에 침식되고 있는 이 세계를 파괴한 뒤 재창조하겠다는 뜻이다. 신화에 무지한 리디안이라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세계의 멸망이라는 단어가 플레이어의 목숨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말이다.
그를 못 박듯 브륀힐드가 차갑게 던졌다.
“우리 세계에서 너희의 힘은 이물질과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 세계를 지키려면 너희의 죽음은 필연적인 셈이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에 하나둘씩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허… 멸망을 막기 위해 멸망으로 대적한다는 뜻인가?”
이노센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백검도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리디안 님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네. 우리의 승리가 이곳 세계에 미칠 영향.”
“잘은 모르겠지만, 저들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무언가 변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아까 제가 페이지 님과 목격한 ‘로빈’이 딱 그랬으니까요.”
대장군의 발언에 크라이그가 끄덕였다. 리디안과 함께 봤던 빌 우드 역시. NPC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NPC로 변화하는 과정이 똑똑히 보였다.
“침식으로 NPC화 된 빌 우드가 알프하임에서 브륀힐드를 만나 잠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가정하면 아귀가 들어맞아요.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다시 NPC화된 것도 변절자라는 존재의 방해로 생각하면 더욱 이해되고요.”
“아니, 그런데 꼭 우리가 죽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물론, 이해는 하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다른 방법을 모색할 기회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인 건…….”
불퉁하게 투덜거린 스타일리쉬가 주저앉아 땅을 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신사는 흘끔 브륀힐드를 쳐다봤다.
브륀힐드는 멸망만이 해결법인 양 말했지만, 스타일리쉬가 말한 대로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브륀힐드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별 도움도 안 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고로 협력의 의지가 전혀 없는 듯했다.
“난처하네요. 이렇게 된 이상, 우리로선 어떻게든 저들과 협력해 변절자에 대항해야 하는데. 문제는 저 여자가 우리를 전혀 신용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저 여자 말만 들어보면, 저들로선 우릴 죽이는 게 가장 간단한 해결법이니까요.”
“우리를 벌레 보듯 얕잡아 보는 것도 큰 문제죠. 하다못해 전투력으로라도 인정받아야 하는데. 저 오만한 콧대를 보니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다 알겠네요.”
박회장이 브륀힐드를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여자는 미미르와 달라요. 온화하지 않고 이방인인 우리를 절대적으로 적대해요.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죠. 그러니 섣부르게 행동할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이대로라면 우린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누구보다 걱정 많은 샤봉이 답답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합심해 브륀힐드를 공격할 순 없었다. 여기서 플레이어가 브륀힐드를 공격한다면 변절자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격이다. 브륀힐드의 말마따나 플레이어들은 훌륭한 꼭두각시가 되는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다수 플레이어는 아직 패닉에 빠져있어 공격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마제스티는 사람들을 향해 끝까지 차분하게 행동할 것을 권고했다.
무리에서 작은 소란이 번지는 동안, 박회장이 재빨리 나섰다.
브륀힐드가 이방인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버렸으니, 어떤 것으로든 브륀힐드의 흥미를 끌어 경계를 낮추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했다.
그에 가장 걸맞은 주제는 ‘변절자’였다.
최고신 ‘오딘’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브륀힐드는 변절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다.
본인은 알려줄 의무가 없다며 퉁명스레 말했지만, 변절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방인인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저희 측이 생각하기로, 변절자로 추측되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예상대로 브륀힐드는 변절자라는 주제에 즉각 반응했다. 시선이 제게 향하자, 박회장은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혹시 파수꾼 ‘헤임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상대로 브륀힐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노발대발하며 받아쳤다.
“감히 태양의 신을 의심하는 것이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박회장은 섬뜩함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대답했다.
“저희로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붉은 태양 교단이라는 단체가 헤임달을 태양신으로 내세우며 오딘의 군대를 적대하며 부추기고 있으니까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그 단체는 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더러운 집단이다.”
브륀힐드의 단호한 목소리엔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교활한 이방인이 자신들의 잇속을 불리기 위해 헤임달 님을 사칭하며 신의 명성을 갉아 먹고 있다.”
“그럼 헤임달 역시, 우리처럼 이용당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풍월주의 물음에 브륀힐드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용이라 하니, 감히 신을 능멸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브륀힐드는 그저 침묵으로 불편하게 긍정했다.
“그렇다면 더욱 저희의 입장을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나요?”
“감히 너희 따위가 신과 동급으로 여겨지길 바라는 것이냐?”
싸늘한 눈빛과 목소리에 모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브륀힐드에게선 인간을 향한 일말의 감정이 일절 느껴지질 않았다.
“그럼. 오딘은 누굴 변절자로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흥분을 다 가라앉히고 침착해진 박회장이 손을 들어 물었다.
어차피 브륀힐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말살 명령만 받았을 터. 오딘 정도면 그래도 변절자에 대한 가닥이 잡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하지만 브륀힐드는 끝까지 냉담했다.
“누군지 알면 달려가 목숨이라도 구걸할 생각이냐?”
완벽히 비꼬는 어조에 박회장은 점점 답답해졌다. 저렇게 삐딱하게 굴며 의심하면서도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브륀힐드라는 인물에게 짜증이 치솟았지만 박회장은 꾹꾹 참아 누르며 다시 좋게 좋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 때문에 이곳 세계에 피해가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쪽은 변절자라는 인물, 그리고 우리 세계의 힘이 이곳에서 없어지길 원하는 것 아닙니까?”
브륀힐드는 이번에도 역시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러니 서로 머리를 맞대 그것들을 몰아낼 방법을 생각하자는 겁니다. 그쪽도 굳이 멸망을 거칠 필요가 없다면 좋은 일 아닌가요?”
이어진 침묵에 박회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점잖고 여유롭게 말했지만, 사실 터무니없었다. 애초에 변절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힘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도 모르는데. 머리를 맞댄다고 흑막을 몰아낼 방법이 뚝딱 나올 리 없었다.
네오는 차라리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게 더 가능성 있지 않겠냐며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만 박회장이 지켜본바, 브륀힐드는 그런 감성이 먹힐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만 더 돋울 것이다. 그러니 여기선 플레이어들이 쓸모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심어야 했다.
“저희에게 익숙한 힘이니만큼, 누구보다 이 시스템. 변절자의 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그쪽은 어떤가요?”
돌아온 질문에 브륀힐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박회장이 더욱 몰아붙였다.
“솔직히 말해, 이 낯선 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침식된 자들의 행동에 대해선? 그러고 보니, 당신의 군대는 어떤 상태인가요? 혹시 침식된 겁니까?”
리디안은 브륀힐드의 안면이 파르르 떨린 것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그에 박회장은 방긋 웃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서로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면 합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 브륀힐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평화라는 단어에는 조금 흥미가 생긴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디안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발언했다.
“브륀힐드 님. 혹시 오딘께 우리의 말을 전해주실 순 없나요?”
“감히 나를 전령으로 쓰려하느냐?”
“그, 그게 아니고요! 세계와 세계를 잇는 건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잖아요?”
“그렇다.”
“저희가 그곳을 통해 이곳에 왔으니… 역으로 그걸 이용해 저희를 돌려보낼 순 없나요?”
“헤임달께서 자리에 없다는 걸 잊은 거냐?”
“아뇨! 오딘 님이요! 그분이 최고신이니, 비프로스트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 않나요?”
모두가 숨죽이며 브륀힐드의 대답에 집중했다. 그러나 브륀힐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멍청하군.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그리했을 것이다.”
“아…….”
리디안은 어리석은 물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여타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 절대신 오딘이라 할지라도 고유 영역에는 개입할 수 없다. 그게 이 세계, 균형의 법칙이다.”
절망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본 브륀힐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설명에 리디안은 조금씩 조각이 맞춰져 가는 기분을 느꼈다.
“변절자는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아니, 침식을 이용해 모든 것에 개입하려 하고 있나 봐요. 그래서 이곳의 균형이 깨지고 있고, 오딘은 그걸 재앙으로 여기는 모양이에요. 그 균형을 바로 잡아 재앙을 막기 위해 라그나로크를 실행한 것이고요. 단순히 이방인인 우리를 말살하기 위한 게 아니었어요.”
“흠. 재앙을 막기 위해 멸망으로 이끌어 세계를 재창조한다, 라니. 정말 ‘신’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발상이군요.”
아퀴나스가 찌푸리며 답했다. 너무 고차원적이라 범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 말은 끝났나?”
각자 정리가 덜 된 머리를 싸매는 사이, 브륀힐드가 검을 붙들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안됐지만 너희는 여기서 퇴장이다. 방해 말고 조용히 죽어라.”
살해 경고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겨우 차분함을 되찾았던 박회장은 그 말에 표정이 뒤틀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방금 내가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되는 겁니까?”
브륀힐드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에게 있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너희와 변절자. 둘 다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의 도움 또한 필요치 않지.”
강경한 태도에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브륀힐드가 협력 같은 말로 회유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리디안이 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오딘의 눈이요! 오딘께선 오른눈을 원하지 않나요?”
공격 자세를 잡던 브륀힐드가 멈칫했다. 오른눈을 떠올린 브륀힐드는 리디안을 노려봤다.
“건방진 것. 감히 신체를 훔쳐간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는 구나.”
“후, 훔친 게 아니에요! 그건 퀘스…….”
“네 속셈이라면 훤히 보인다. 신체를 인질 삼아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다.”
브륀힐드는 리디안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눈은 샘의 규칙에 얽매인 것이라, 제아무리 오딘이라 하여도 되찾을 수 없다. 계약의 힘을 얕보지 말라.”
오딘이 오른눈을 가질 수 없다니. 리디안은 의아했다.
샘의 규칙이라면 미미르도 분명히 언급했다. 미미르가 말한 ‘내 공간의 법칙’이 샘의 규칙과 같은 뜻이라면 말이다.
게다가 미미르는 오딘의 눈이 새로운 법칙에 적용됐다고 말했었다.
즉, 그건 이 세계의 물질이 아이템화되었다는 뜻. 아무래도 브륀힐드는 아이템화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리디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만약… 제가 가진 오른 눈에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었다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오른눈 또한 침식당해 저희 세계의 법칙에 묶였다면요? 그로 인해 완전히 제 소유가 되어 샘의 규칙이 사라졌다면요? 그래도 오딘께선 오른눈을 되찾을 수 없는 건가요?”
브륀힐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주한 이래 처음 보는 당혹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