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23
323화
아스가르드로 피신했다면 무사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페페 개인의 추측일 테지만, 그 말을 들으니 리디안은 조금 안심이 됐다. 뭐가 됐든, 플레이어나 이쪽 세계에 큰 피해가 없길 바랐기 때문이다.
“우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페페가 옅게 웃었다. 말을 나눌수록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이런 생각까지 할 줄 몰랐던 페페는 그런 자신이 신기한 듯 실소했다.
그에 눈을 깜빡이며 경청하던 리디안이 별안간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 다람쥐가 그랬어요. 거짓된 것들이 우리의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고. 혹시 그 가짜들을 뜻하는 말이었을까요?”
“음. 단순히 노른 세 자매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면요.”
리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타토스크가 꼬리로 여신들을 가리키며 한 말이지만, ‘거짓된 것들이’라고 했으니 전체 포괄적으로 봐도 이상하진 않다.
“어, 근데 그러면 노른 세 자매가 복제됐다는 뜻인데, 이건 이상하지 않아요? 노른 세 자매는 전투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왜…….”
“음, 글쎄요. 그냥 침식된 경우일 수도 있죠. 그 다람쥐는 침식된 개체까지 ‘거짓된 것’으로 인정한 건지도 모르고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요.”
“아, 뭔가 이 부분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네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훤히 보이자 페페가 옅게 웃었다. 무심코 그 미소를 본 리디안은 뒤늦게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제가 너무 갑자기 말이 많았죠……?”
“아녜요. 덕분에 저도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요.”
혼자만 너무 진지했던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었던 리디안은 페페의 긍정적인 반응에 안도했다.
멋쩍게 웃는 리디안을 보며, 페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타인. 그것도 낯선 세계의 존재를 이해하고 그들의 사정과 환경을 고려한다는 건 인간의 본능상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다. 리디안처럼 인외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는 이도 많다.
다만, 현재의 그룹은 플레이어들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하이 랭커들이 가득 모인 자리니, 리디안이 유독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박회장이 있었다. 물론, 박회장은 지식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회장과 리디안.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내놓고 있어 자잘한 실마리가 잡혀가는 듯했다.
“으음. 방금 얘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보고는 해야겠어요.”
벌떡 일어나는 리디안의 모습에 페페도 간부들 쪽을 바라보며 동의했다. 언뜻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어보니, 대강 출발 준비가 끝나가는 듯했다.
“다시 도시 탐색이네요.”
이번엔 또 어떤 상황이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리디안은 긴장된 표정으로 나아갔다.
* * *
대략 사십여 분이 지나서야 전체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그동안 길드 마스터들은 각 친목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을 불러 모아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무스펠하임엔 하이 랭커들만 진입하겠습니다.”
신사의 선언에 잠깐의 소란은 일었지만 큰 반발은 없었다. 그들도 알프하임에서 일어난 일을 충분히 전해 들었고, 위험을 인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반 플레이어들은 꽤 단순했다.
“아,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갑자기 왜 저래. 시스템이든 오딘이든. 둘 다 우리한테 적 아닌가? 그럼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되는 거 아니야?”
“우리끼리 조촐하게 잡고 올까? 잡몹은 별것도 아니더구먼.”
“성물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우리도 타격감은 맛봐야지! 게다가 템도 잘 나온다던데. 우리 같은 쩌리들이 이때 아니면 언제 몹 잡아 보냐?”
간혹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날뛰는 이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아주 잠깐 짜증과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눈치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성물 버프 효과 진짜 무섭다. 사람들 공포심을 자존심으로 업시켜 버리네.”
한창 파티 편성에 집중하던 이노센트는 그런 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백검과 함께 끄덕이던 크라이그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몰래 도시에 진입할 수도 있으니까 성문 감시하는 인원도 추가해야겠어요.”
“과일 놈. 자기네 자꾸 일시킨다고 짜증 내는 거 아니야?”
“자기가 먼저 우리 돕겠다고 했는데요, 뭘.”
“그럼, 그럼. 자업자득이지.”
“하긴. 우리가 그 인간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
고개를 주억거린 이노센트가 힐끔 인벤토리를 쳐다봤다.
“근데, 이거.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나? 좀 찝찝한데.”
“성물? 그렇긴 한데. 그래도 몹 전투 생각하면 버릴 순 없잖아. 일단 오딘 쪽이랑 얘기되기 전까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검 형 말이 맞아요. 나중에 오딘 측에서 성물로 물고 늘어져도, 우린 이거 없으면 도시 진입 자체가 불가해요.”
“근데 이러다 방해받으면 어쩌지? 브륀힐드 때 보니까 다 지켜보면서 대응하는 거 같던데. 우리가 오딘 측이랑 만나는 것 자체가 변절자한테는 방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쪽을 못 찾게끔, 성물을 없애버린다든지?”
백검의 걱정 섞인 호들갑에 크라이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 성물이 없으면 우린 어디에도 못 가겠죠. 근데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그랬을 거예요. 리디안 님이랑 박회장 님 말처럼. 그놈도 아주 완벽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런 얘길 들으니까 진짜 찝찝하긴 해.”
이노센트는 껄끄러운 얼굴로 인벤토리를 응시했다. 백검이나 크라이그 역시 성물이 껄끄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착잡한 마음으로 성물을 힐끔거리던 때, 뒤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와, 대박. 진짜 나타났네?”
“마음 바뀐 건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무슨 일인가 하여, 돌아본 세 사람이 목격한 건.
다크 템플러 ‘사이’였다.
일반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사이는 한결같다.
전 프리피케 길드 출신으로 PK에 환장한 사람. 혼자만 레기온에 이적하지 않고 태양으로 간 별종.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알량한 자존심에 혼자 잠적해 버린 인간.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다들 사이의 줏대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그런 사이가 광장을 가로질러 떡하니 나타나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와, 뭐야? 탈퇴한 줄 알았더니 태양 마크는 아직 달고 있네?”
“이제 태양 말고는 갈 데가 없거든.”
“아~ 그래서 이제 혼자 버티기 힘드니까 온 건가?”
레온과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을 모르는 일반 플레이어들에겐 알쏭달쏭한 등장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을 두고 이야기만 무성해질 때쯤. 소식을 전해 들은 도도가 허겁지겁 달려와 사이를 맞이했다.
“왔어?”
어색하게 헤헤 웃는 도도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미안함,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사이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찌푸린 얼굴을 하고도 도도를 따라갔다.
사이가 도도를 보자마자 이 새끼, 저 새끼. 험한 욕부터 싸지를 줄 알았던 페이지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도도가 어딘가로 사이를 데려간 뒤, 잠시 후 출발이 좀 늦어질 것 같다는 공지가 전달됐다.
리디안은 레온과 사이가 접촉했을 거라 확신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 연락했대요?”
네임드의 등장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프리피케 길드 출신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보니 도도를 제외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고, 리디안도 괴자를 따라 자연스레 무리에 합류했다.
“어제 공표하고 도도 형이 바로 연락했대요.”
크라이그의 시선을 받은 시우가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괴자, 오토마타, 페이지, 헤른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에 이노센트가 어이없어했다.
사실 이젠 환경이 많이 바뀌어, 도도의 이야기를 잘 아는 게 시우뿐이었다. 오토마타와 괴자는 연애 중이라 둘이 다니기 바쁘고, 그나마 오래 있었던 페이지는 헤른과 함께 새로 사귄 형, 누나들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도도를 챙기는 건 자연스럽게 시우의 몫이었고, 도도 역시 시우에게 많이 의지하는 상태였다.
전 길드 마스터인 도도에게 소홀했다며 즉시 반성하는 네 사람의 태도에 잠시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시우는 민망한 얼굴로 설명했다.
“신기하게 답장이 바로 왔대요. 보니까 자기도 그간 혼자 좀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고… 도도 형이 그러더라고요.”
모두가 별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실제 친구 사이인 만큼. 사이를 보는 도도의 눈은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보니까, 태양에서도 사이 형한테 계속 찔러보고 도와달라고 요청 넣었나 봐요.”
리디안은 말없이 수긍했다.
태양 연합은 최근의 분열로 극심한 인력난을 겪었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가 죽었고, 언뜻 듣자 하니 그 기간 사냥터에도 일절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사이 같은 하이 랭커의 빈자리가 간절했을 테고, 어떻게든 사이를 회유하려 했을 건 분명하다.
“사이 형은 자기 입으로 레온 님 싫다고, 절대 같이 안 할 거라고 선언해 버린 상태라… 자존심 때문에 계속 등 돌리고 있었나 봐요. 근데 거기서 점점 사태 돌아가는 게 심각해지니까, 자기도 관심 생기고 참여하고 싶고 그랬던 거겠죠. 그 형이 원래부터 이벤트 같은 건 되게 좋아했거든요.”
“어, 맞아. 그 사람. 뭐 이벤트 할 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오긴 했어. 그래서 나랑 더 자주 부딪혔고. 거기서 페이지랑 오토 님, 시우 님도 나한테 달려들고 그랬지.”
사이와 싸웠던 기억을 회상한 이노센트가 맞장구쳤다. 시우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음, 아무튼. 그 타이밍에 레온 님이 공개 사과를 해버린 거죠. 거기서 자기 찾았다니까 사이 형도 이때다 싶어서 칼답 한 것 같다고. 도도 형 생각으로는 그렇대요.”
그에 괴자와 오토마타가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근데 아마 레온 님이랑 화해는 안 할걸요? 그 양반 성격이 워낙…….”
“맞아요. 그냥 침공전에 끼고 싶어서 대충 듣는 척하다가, 이참에 레온 님 기 엄청 누르기만 할 거예요. 그 지랄 같은 성격 생각하면 딱― 답 나와요.”
부정적인 편견에도 어쩐지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리디안은 안타깝게 한숨지었다. 조금 찜찜한 엔딩이긴 하지만, 그래도 프리피케 출신들이 입 모아 말하는 사이의 성격을 미루어 보면, 사이로서도 그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말이야. 과연 레온 님이 사이한테 끌려 다닐까? 분명 사이는 표면적으론 화해한 척 굴면서도 레온 님 속 박박 긁으면서 온갖 미운 말 다 할 텐데?”
그게 문제였다. 애초부터 사이는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말투가 베이스로 깔린 인물이라, 레온을 향할 핍박과 불만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다들 찌푸리며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레온이 그렇게까진 못 굽힐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한 시간이 지나서 빗나갔다.
“음… 뭐,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저희 사정 아는 분들이니 그냥 공개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사이 님과 저는 과거 일에 대해 서로 속 시원히 다 풀었습니다. 그렇게 알아주시고 저희 관련해서 불필요한 언급은 지양해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사이 님도 무스펠하임 탐색에 합류할 거예요.”
주력 하이 랭커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레온이 간단하게 공지했다.
리디안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경악했다. 무척 기고만장해진 사이의 옆에서, 레온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속없이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