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27
327화
“게…이로…드. 너도… 나쁘다……! 군…로드랑 똑같…다! 나를… 공…격…했다.”
불 거인의 표정이 일순 사납게 일그러졌다. 동족을 향해 적대감을 보인 불 거인은 또다시 불꽃 창을 만들었다.
길고 붉은 창날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게이로드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군로드의 죽음으로 폭주하여 두 배 가까이 몸집이 커졌던 게이로드는 그 한 번의 공격에 힘을 잃고 쓰려졌다.
쿵, 쓰러진 거구의 체격에 땅이 뒤흔들렸다. 휘청거린 플레이어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불 거인이 스스로 플레이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사는 혹여 불 거인이 탐욕의 길링까지 공격하지 않을지.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있는 네임드 셋을 모두 잡는 게 과연 괜찮을지. 그런 부분이 걱정되기도 했다.
“게이로드 피 5%요! 빨리 잡아요!”
어리둥절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핑크푸크가 목청껏 외쳤다. ONE 길드원들은 갑작스러운 핑크푸크의 지시에 신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멀뚱히 쳐다보고 있기엔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 판단한 스타일리쉬가 먼저 ‘스나이핑 샷’을 사용했다. 그 거침없는 공격에 눈치를 보던 딜러들도 뒤따라 공격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딜러들이 급한 불을 끄는 동안, 불 거인은 리디안을 쳐다봤다.
“길…링. 길링도… 위험하…냐?”
어수룩한 물음이 떨어졌다.
리디안은 잠시 당황했다. 여태 세 거인에게 공격받고 있었으면서. 게다가 이상하다고 몇 번 말까지 했는데. 또 되묻는 걸 보니, 정말 기억력이 좋지 않은 듯했다.
“아… 그게…….”
놀란 리디안이 삐걱대며 고개 돌렸다. 하지만 길링이라고 게이로드와 다를 건 없었다.
가디언의 단일 어그로 스킬인 ‘숭고한 방패’에 붙들린 길링은 잠깐 스킬이 풀릴 때마다 난폭하게 굴었다. 아퀴나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목격한 리디안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렇구…나.”
동족의 배신 때문일까. 어쩐지 조금 침울해진 듯한 불 거인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순하고 어수룩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공격성에 대해서만큼은 참 강단 있었다.
불 거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불꽃 창을 만들어 던졌다.
아퀴나스에게 묶여 있던 탐욕의 길링은 가슴 정중앙에 창이 꿰뚫려 정지했다. 길링 역시 창에 맞아, 5%의 HP가 남은 상태였다.
네임드들의 폭주로 아찔하기만 하던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된 셈이었다.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플레이어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 우리 안 도망쳐도 되겠는데?”
“근데 이러다 네임드들 우르르 뜨면 어쩌죠? 분위기가 알프하임 때처럼…….”
“에이, 저 거인이 또 도와주겠죠.”
“그러다 반대로 우리 공격하면요?”
예측할 수 없는 돌발행동 때문인지. 일각에선 불 거인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도 피어났다.
하지만 리디안과 불 거인의 대화를 쭉 들어본바, 간부들은 플레이어들이 먼저 자극하지 않는 한 불 거인이 공격해 올 일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불안한 기류가 사라져 갈 때쯤, 이번엔 박회장이 신사의 불안을 잠재웠다.
“신사 님. 네임드 모두 잡는 거, 따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저 불 거인의 공격 효과인지는 모르겠는데. 창 맞으면 무조건 5%로 떨어지고 정지 상태 오는 모양이에요. 좀 찝찝하다 싶으면 창 맞은 상태로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럼 혹시 모르니까 길링은…….”
잠시 공격을 멈춰달라고 요청하려던 신사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핑크푸크와 딜러들의 의욕이 너무 앞섰다.
게이로드는 벌써 처리된 지 오래였고, 핑크푸크는 은근하게 길링의 처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딜러들이 길링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멈추라며 손을 뻗기도 전에 길링을 향해 스펠, 스킬이 쏟아지는 걸 본 신사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저거 보니까 아쉽네요. 브륀힐드도 좀 더 냉철하게 판단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쓰러져 재가 되어가는 길링을 보며 박회장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신사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어……. 동족… 다 죽었…다. 내가… 죽였…다. 나, 혼난…다.”
길링이 완전히 사라진 후, 털썩 주저앉은 불 거인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주먹 쥔 팔뚝으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용암과 서러운 통곡에 한숨 돌리던 플레이어들이 힐끔거렸다.
분명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브륀힐드와 같은 존재 같건만. 불 거인은 신기하리만치 상위 종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다.
“얕보지 말아요. 저래 보여도 무스펠하임 보스예요.”
길드 마스터답게, 마제스티가 파티원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 말에 멍한 표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던 플레이어들이 그제야 지레 겁먹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길드 마스터들은 불 거인이 울고 있는 걸 지켜보다 리디안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어때요? 말은 잘 통해요?”
그간 귀동냥으로 들었음에도 마제스티가 은근하게 물었다. 공격에 열중하느라 리디안과 불 거인의 대화를 자세히 듣지 못했던 플레이어들도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리디안이 불 거인과 몇 마디 대화했고, 궁극적으로 불 거인이 리디안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
“음. 저 거인이 너무 순해서 제 말을 잘 들어준 것 같아요. 생각보다 대화 난이도가 조금 높아 보여서 걱정이지만요.”
리디안이 차분히 말하자 박회장이 손가락으로 불 거인을 가리키며 콕콕 찌르는 시늉을 했다. 다시 말을 걸어보라는 뜻이었다.
뭐, 저 정도 성격이면 누가 말을 걸어도 잘 받아줄 것 같은데. 리디안은 민망하게 웃으며 불 거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거인님.”
큼지막한 목소리에 울먹이던 거인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신을 보라며 방방 뛰며 팔을 흔들고 있는 리디안을 보자, 거인은 울음을 뚝 그쳤다.
“이방…인.”
좀 침울해 보이긴 하나, 여전히 공격성은 없어 보였다. 안심한 리디안이 다시 외쳤다.
“잠깐 저희랑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방인. 착…해?”
찌푸려져 있던 거인의 눈이 스륵 주변을 훑었다. 적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순박한 거인의 표정을 보곤 너도나도 외쳤다.
“그럼요! 저희 무진~장, 착해요!”
“저희보다 착한 사람은 없을걸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놀라운 거짓말에 리디안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순간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려왔다.
어쩐지 순진한 사람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냐?”
놀랍게도 거인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리디안이 괜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동안, 박회장이 성큼 나와 말했다.
“저희는 이방인 대표입니다. 이번 침공전과 이쪽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막고자, 오딘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희 이야기를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중한 목소리에도 거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 나는 그런 거… 자, 잘 모른…다.”
말이 좀 어려웠던 건지. 거인은 혼란한 표정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에 좋은 생각이 떠오른 리디안이 다시 두 팔을 들어 방방 뛰었다.
“그럼, 거인 님! 혹시 브륀힐드 님을 아세요?”
신기하게도 거인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걸 본 박회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자신의 방법이 아닌 것 같다며 말이다.
“브…륀…힐드……! 브륀…힐드… 만난… 거냐……?”
귀에 걸린 입꼬리며 더 붉어진 듯한 얼굴이며. 뭔가 수줍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리디안은 바로 긍정했다.
“네! 알프하임에서 만났어요. 그분께서 저희 이야기를 들어 주셨어요!”
“그, 그…럼 나…도… 듣…는다…….”
무슨 얘기를 할진 알고 말하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리디안은 애써 웃었다. 이제 다음 말이 중요했다.
“그런데… 브륀힐드 님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브륀힐드님과 함께 있던 요정족들이 거인 세 분처럼 변했거든요.”
“그…래…서?”
“음. 그러니까… 결론은. 브륀힐드 님도 지금 변한 상태예요. 이제는 저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
리디안은 그렁그렁해지는 거인의 눈에 움찔했다.
“브…륀…힐드. 이…제 못 보…는 거냐……?”
“아, 아뇨!”
“나, 나아… 브…륀힐…드. 좋다. 보고… 싶다.”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브륀힐드가 잘못된 것에 저 거인이 화를 내 돌변하면 어쩌나. 순간적으로 그런 걱정도 들었다.
기겁한 리디안은 재빨리 외쳤다.
“브륀힐드 님은 무사하세요! 그리고 돌려낼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뭐, 어쨌든 죽은 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닌지라. 약간 애매한 변명이었다. 리디안은 양심에 찔려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다행히 순진한 거인의 표정은 금방 온화해졌다. 빠른 표정 변화에 안도한 리디안이 재차 말했다.
“그래서 거인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거인님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불 거인이 누구냐는 것보다. 불 거인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에 지금까진 딱히 통성명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라면 통성명은 필요했다.
파티원들도 막상 대화가 이어지니 거인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한편 신화와 설정에 빠삭한 몇몇은 짐작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디안이 이름을 묻자, 거인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내…이름. 수…르트. 내가… 거인…족 왕…이다. 아…마도.”
드디어 밝혀진 이름에 리디안의 눈이 커졌다.
수르트. 노르드 월드 게임 내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그 이름에 낯설어했다. 그나마 신화에 빠삭한 박회장과 몇몇 소수만이 고개를 주억댔다.
“신화에 나오는 화염 거인족이에요. 라그나로크에서 모든 걸 불태워 버리죠. 뭐, 여기서도 비슷한 포지션인 것 같은데. 다른 인물들처럼 관계성이나 기타 설정은 완전히 다르네요.”
늘 그랬듯 박회장이 재빨리 간략한 설명을 던졌다.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한 리디안은 동시에 브륀힐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군대는 너희 이방인과 침식된 자들을 말살한 뒤, 오염된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다.”
“아. 모든 것을 불태운다고 했던 게, 설마?”
불의 힘을 쓰는 거인. 그 시각으로 바라보니 알 것 같았다.
“역시 수르트일 줄 알았어. 저 큰 몸에 불을 두르고 있는 거인이 몇이나 있겠어?”
자신의 정확한 추측이 기특했던 건지. 박회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자화자찬했다. 그에 길드 마스터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빨리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시선에 박회장은 억울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정신이 있었냐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 도와…야…하냐……?”
내내 갸웃하던 수르트가 그리 물었다. 거인의 정체에 놀라있던 리디안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수르트 님. 혹시, 오딘께 저희의 이야기와 요청을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딘?”
“네!”
수르트는 곧장 얼굴을 찡그렸다.
“오…딘. 바…쁘다. 일…하기… 전까지… 부…르지 말라…고 했…다. 나… 귀찮…다고…….”
“그, 그럼 연락할 수 없는 건가요? 그리고 일이라는 건,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질문이 연달아 들어간 것을 인지한 리디안이 아차, 했다. 못 알아듣진 않았을까, 걱정했으나 수르트는 뒷말에 먼저 반응했다.
“일…해야 한다. 나… 저기.”
수르트는 손을 올려 남쪽을 가리켰다. 그에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고개 돌렸다.
무스펠하임의 높은 성벽, 그 위로 그림처럼 펼쳐진 드높은 하늘과 태산. 온통 자연의 풍경뿐이지만 그 방향 끝엔 미드가르드가 있었다.
“저기… 저쪽……. 저…쪽에서 연기… 나면. 저…거 터트…리라고… 했다.”
수르트가 반쯤 몸을 돌려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짙은 구름 띠를 두른 거대한 활화산이 있었다.
“…라피아 화산.”
리디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