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14
414화
“오. 다행이다. 아직 제대로 유지되고 있군.”
기뻐한 군주가 성큼 샘 밑으로 내려가 손짓했다.
저 거울이 입구라며 따라오라는 말에 간부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민했다. 무턱대고 따라 들어가기엔 조금 찝찝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정말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뱀들이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곳곳에서 걱정 섞인 질문이 이어졌다. 처음과는 다르게 나약해진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군주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뱀들은 그냥 입구를 위장하는 용도지, 먼저 공격하지만 않으면 돼.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줄 테니까 걱정 말라구.”
그 목소리에 플레이어들이 다소 안심했다. 결국, 성 내부로 들어온 플레이어 전부가 샘 안으로 내려왔다.
군주는 검은 거울 앞에서 멈춰 플레이어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안은 죽은 자의 세계야. 너희야 죽어도, 망자의 저주 덕분에 원래 있던 곳에서 다시 살아날 테지만 나는 죽으면 끝인 몸이야. 그러니 미리 작별 인사할게. 조금이라도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우뚝 멈춘 군주가 살짝 고개 돌려 씩 웃어 보였다.
작별 인사라는 슬픈 단어에 리디안과 박회장, 스타일리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할 때, 군주는 이 찐득거리는 분위기가 싫다며 크게 웃곤 불쑥 거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뒤따랐다. 중간 순위로 검은 거울 속으로 뛰어든 리디안은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거울 안 세계는 명확한 밤이었다.
달인지, 해인지 모를 커다란 무언가가 하늘에 떠 있었는데, 하늘은 대체로 어두웠다.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으며 짙은 흙바닥은 언 것인지 무척이나 딱딱했다.
전체적으로 숨 막히는 분위기라, 모두가 군주의 아련했던 뒷모습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대부분은 무거운 공기에 목울대를 짓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저 앞에 뭐가 보이네요.”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아퀴나스가 먼 방향을 가리켰다. 황무지 같은 공간에서 하얀 무언가가 작은 점처럼 보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거대한 건물이었다. 하얀 저택, 내지는 궁전.
보이는 건 그것뿐이라, 모두가 홀린 듯 그곳을 향해 걸었다.
“저게 그 저택인가요? 엘류드니르?”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박회장이 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군주도 사실 이 영역에 발 들이기는 처음이라 자신 없이 대꾸했다.
“아마도. 듣기로는 얼음 궁전이라 했는데…….”
군주는 끙, 하고 신음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라 세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하얀 얼음 궁전치곤 주위로 여러 빛이 반짝였다.
붉거나 푸르거나. 혹은 노랗거나 보랏빛이거나, 초록빛이거나. 건물 표면으로 여러 색이 조그맣게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그것의 정체를 확신한 건, 건물과 좀 더 가까워지고 나서이었다.
“취향인가? 난해하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촌스럽네요.”
“설마 이것 때문에 채굴한 건가?”
“어쨌든 크긴 크네요.”
갖가지 보석이 요란하게 장식된 건물의 외벽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플레이어들은 생각보다 커다란 엘류드니르의 규모에 수군거렸다.
거인족의 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높이 솟은 성벽과 성문에 고개를 젖혀 감탄할 때,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돌연 회오리가 일어났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치고는 대단히 인공적인 느낌이 다분했기에 떠들던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니나 다를까. 수상한 회오리가 쌍으로 몰아친 자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마치 흘러내린 액체처럼, 바닥으로 철퍽 떨어진 그림자는 점차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리디안은 버젓이 나타난 남녀의 모습에 눈을 홉떴다.
하얀 셔츠에 단정하게 맨 크라바트. 단조로운 검은색 코트와 바지. 그리고 뾰족한 구두. 얼핏 보기엔 현대의 정장 같은 복장이었다.
특이하게도 두 사람 모두 같은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생김새마저 비슷했다.
푸른 머리에 붉은 눈. 머리 길이만 다를 뿐, 두 사람은 이목구비까지 닮아 플레이어들을 갸웃하게 만들었다.
그 똑같은 얼굴이 무심하게 군주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남자 쪽이었다.
“이거 참. 오랜만에 뵙는군요, 우트가르드 로키님.”
“이상하네요. 우트가르드 성 밖에서 비렁뱅이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이번엔 여자가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에 남자가 픽 웃었다.
“저들의 도움을 받았겠지요.”
“이방인들이요? 저런. 한심하군요.”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두 남녀는 자기들끼리 대화하며 키득거렸다.
군주의 이름이 나온 건 둘째치고, 어쩐지 아는 사이 같아 박회장이 군주의 몸을 콕콕 찔렀다.
“누구예요? 저것들?”
조롱에 침묵하던 거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는 강글로트. 여자는 강글라티. 헬라의 직속 부하야. 저 둘은 헬라의 권능으로 태어난 신의 힘 자체가 다름없어. 그러니 평범한 요정족처럼 생각하지 마.”
괜스레 진지한 군주의 목소리에 곳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리디안은 그 말이 공격받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려 새하얘진 얼굴로 당황했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만요! 저흰 헬라 님을 만나 뵙고 싶어 온 거예요!”
그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리디안에게 향했다.
긴장하던 플레이어들도 그 목소리에 정신 차리곤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싸울 생각이 없음을 표현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두 사람이 별안간 픽, 하고 비웃었다.
“이런. 우리가 당신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강글로트의 눈매와 입가가 얄밉게 비틀렸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 말이다.
얼빠진 플레이어들을 한참이나 비웃던 강글로트가 강글로티를 바라보며 물었다.
“개미를 상대로 겁내는 이도 있나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두 남녀는 또 자기들끼리 대화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일부러인지 플레이어들의 신경을 긁는듯한 말투에 서서히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 변화를 눈치챈 강글라티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뭐죠? 그 표정은? 이방인 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건가요?”
“망자의 저주가 걸려있군요. 상대하기 까다롭겠지만, 그렇다고 못 할 건 또 없죠.”
“저 건방진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군요.”
성큼 나선 두 사람의 손에서 갑작스럽게 검이 생겨났다.
고약하게 웃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붉은 눈동자는 광견처럼 빛났다. 누가 봐도 살의가 가득한 모습에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 잠깐! 기다려! 그러지 말고, 잠시 대화를 하자고!”
보다 못한 군주가 나섰지만 흉흉한 살기는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악귀 같은 표정으로 플레이어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질겁한 리디안이 크라이그의 손에 이끌려 뒤로 물러나던 그 순간이었다.
흐리기만 하던 허공 위로 번쩍 빛줄기가 치솟았다.
―그만.
웬 여자의 음성이 하늘에서 웅웅 울렸다. 짤막한 목소리에 강글로트와 강글라티의 움직임이 바로 멎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하며 플레이어들이 두리번거렸고, 두 사람은 깍듯한 표정과 몸짓으로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고개 숙였다.
―데려와라.
또다시 울린 음성에 두 남녀가 재차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살기가 조금 사그라진 눈빛으로 플레이어들을 쳐다본 강글라티가 따라오라 손짓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라진 태도에 박회장이 어이없는 눈으로 군주를 쳐다봤다. 군주는 작게 안도했다.
“다행히 헬라에게 초대받은 것 같아.”
* * *
플레이어들은 보폭 배려 없이 척척 앞서가는 두 남녀를 따랐다.
거대 궁전 앞에 다다르니 커다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조심스럽게 진입한 곳은 꽁꽁 얼어붙은 회랑이었다.
그다음은 넓은 회랑을 가로질러 복도로 향했고, 코너를 돌자마자 다시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저택의 외관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 문에도 자잘한 보석이 질서 없이 박혀 있었다.
대단히 멋없는 장식에 몇몇이 인상 쓰는 사이, 강글로트와 강글라티가 양쪽에서 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컴컴한 내부 끝자락에서 유달리 빛이 나는 금빛 왕좌가 보였다.
한걸음 들어서니 내부는 무척 넓은 홀이었다.
컴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물론, 비어있는 왕좌에 모두가 경계하며 나아갔다.
그 직후, 문은 거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잠시 어둠에 갇힌 플레이어들은 우왕좌왕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홀 곳곳에 촛대가 있어 작은 불씨가 타올랐지만, 그 정도 빛으로는 겨우 얼굴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방이 가로막힌 데다 어두운 시야에 사람들은 생존본능처럼 꼭 뭉쳐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어디선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스윽스윽,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도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공포감을 극대화했고 리디안은 세인트들과 꼭 붙어 숨을 삼켰다.
잠시 후, 왕좌가 있던 홀의 상단에서 기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어느샌가 생겨난 커다란 화로들이 붉은 카펫을 따라 차례대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옅은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뽐내는 왕좌 뒤로, 한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길을 따라 우아하게 걸어 나온 여자는 검은색 긴 생머리에 창백하다 못해 푸른 피부를 자랑했다.
붉은 눈은 뱀의 눈동자처럼 갈라져 섬뜩했으나 잠시 공포를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모두가 홀린 눈으로 바라볼 무렵, 하얀 드레스 자락 아래로 긴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바닥을 휩쓸며 치맛단 아래를 넘나들고 있던 건 뱀의 꼬리였다.
윤기 나는 그물 무늬와 두툼한 둘레에 대장군이 질겁하며 비틀거렸다.
조금 전 스윽스윽 끌리던 소리는 저곳에서 난 게 분명했다.
“헬라…겠죠?”
묻지 않아도 뻔했다.
리디안의 작은 목소리에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긍정했다.
명성대로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이었다. 일부는 헬라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말을 잇지 못하고 허무한 탄성만 흘렸다.
“헬라……!”
정적 속에서 잊힌 군주가 발끈하며 나섰다. 곧 작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몸으로 검은 덩굴이 칭칭 감겼다.
“우트가르드 로키. 네놈에겐 볼일 없다.”
가시덩굴에 꽁꽁 얽매인 군주에게서 분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대방을 순식간에 제어해 버린 능력에 플레이어들은 당혹스러운 시선을 나눴다.
그 사이 헬라는 그대로 왕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플레이어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눈매는 곧 호를 그리며 휘었다.
“참으로 반갑도다, 이방인들.”
신답게 연륜과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말투와 눈빛이었다. 가볍게 비틀어진 입술 아래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매섭게 드러났다. 무미건조하게 웃던 헬라는 천천히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거울 세계에서 넘어온 이방인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마주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악의 하나 없는 순수한 미소에 그 권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리디안은 몸서리치면서도 조용히 앞으로 걸었다. 다람만이 주눅 들지 않은 채 헬라를 똑바로 마주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 허튼소리는 뱉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억눌린 채 다가오자 헬라는 몸을 움직여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새로운 동물을 구경하듯, 하나둘 찬찬히 살피던 헬라의 시선이 리디안에게 멈춰 섰다.
“오오. 정말 갖고 있구나. 오딘의 눈.”
익숙한 명칭이 들려오자 리디안은 움찔 몸을 떨었다.
인벤토리에 있는데도, 그 기운이 선연한지 어째 만나는 이마다 모두 같은 소리다.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헬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검은 머리 아래 섬뜩하게 갈라진 붉은 눈동자가 환히 빛났다.
“네게 있는 걸 보니 정말 샘의 규칙이 사라진 모양이구나. 그러니 내게 다오. 그 눈은 내가 지니고 있어야 균형이 맞는단다.”
천진난만한 얼굴 위로 탐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원초적인 욕망에 리디안은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