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15
415화
【헬라】
“어서 다오.”
헬라는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며 재촉했다.
아이템화가 된 ‘눈’을 넘기기 위해선 별도의 양도 방법이 필요하다는 건 둘째치고. 지금 헤임달 때문에 노르드 월드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이 와중에 오른눈에 욕심을 내다니.
리디안은 헬라를 이해할 수 없어 기가 찼다. 그러나 상대는 오딘과 비슷한 이 세계의 신.
행동이 어떻든 헬라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리디안은 기세에 눌려 잔뜩 얼어붙은 동료들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 눈은 오딘과 협력을 약속하며 훗날 돌려주기로 했어요.”
잔잔히 웃던 헬라는 단박에 표정을 굳혔다.
“그럼 여긴 뭣 하러 찾아왔느냐?”
“그건 헬라 님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헛걸음했군.”
어느덧 헬라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휙 고개 돌려 혀만 차는 헬라의 모습에 리디안은 잠시 당황했다.
어찌할 줄 몰라 뻐끔대는 리디안을 대신해, 이번에는 박회장이 슬며시 나섰다.
“헬라 님. 듣기로는 헬라 님이 오딘과 함께 이 세계를 지탱하는 최고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부를 보탠, 제법 그럴싸한 존중에 헬라의 시선이 살짝 움직였다.
“지금 오딘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헬라 님께서도 힘을 합쳐주신다면 이 세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치 왕을 영접하는 것처럼, 박회장이 대단히 정중한 태도로 요청했으나 상대는 시큰둥했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박회장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박회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헬라 님. 이대로라면 이곳은 오래 지나지 않아 붕괴할 겁니다. 헤임달이 집어삼키고 있으니 철저히 헤임달의 세계가 되어버리겠죠. 물론, 밤의 세계는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낮의 세계가 온전해야 밤의 세계도 균형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결국 죽은 자들의 근원은 낮이라는 걸.
박회장은 그걸 강조하며 헬라를 회유했다. 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글쎄. 내가 왜 굳이 나서야 할까? 어차피 이곳이 붕괴하여도 내겐 헤임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데.”
위기감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멍해 있던 리디안은 그 냉정한 말투에 정신 차리며 끼어들었다.
“영구적이진 않을 거예요. 헤임달은 새로운 힘을 지배하기 위해 융합 중이고, 그 영향력 역시 점점 커지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힘을 완벽하게 다룰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헬라 님의 주변 환경으로도 분명, 달갑지 않은 상황이 생길 거고요. 게다가 저희가 패배하면 오른눈이 헤임달에게 갈 텐데. 괜찮으신가요?”
리디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헬라의 표정을 살폈다.
오른눈을 소유하고 싶어 하니, 제삼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도 분명 원치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한 집착을 기대했다. 하지만 헬라에게선 픽, 하는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나 헤임달이나 오른눈이 오딘에게 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 것뿐이란다. 헤임달은 어차피 눈의 힘을 활용하지도 못할 텐데. 내가 그를 견제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다, 당장 활용하진 못해도 언젠가는 가능하게 될 거예요……!”
“너희들의 세계에서 건너온 새로운 힘을 빌어서?”
리디안은 어버버, 입술을 뻐끔거렸고 헬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뭐,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헤임달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우려되진 않는구나.”
“네……?”
“왜냐하면 헤임달이 추구하는 목적은 명확하거든.”
“목적이요……?”
어리둥절한 물음에 헬라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헤임달이 오른눈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더라도, 놈이 꿈꾸는 이상에 죽은 자의 세계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단다. 헤임달은 오딘 대신 빛이 되고 싶은 거지. 이 어둠의 영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니 자신과 척지려 하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오딘을 대신해 공존하려 할 거라며 헬라는 확신했다.
그 확고한 판단에 다른 이들이 절망하는 한편. 리디안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무리 영역이 다르다고 해도, 낮의 세계 역시. 헬라 님과 세계를 공유하는 곳 아닌가요?”
“내게 소속감이나 책임감, 애정 따위가 있기를 기대하느냐?”
헬라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방인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구나. 내가 원해서 만든 세상도, 내가 바라 얻은 직위도 아니다. 나 역시 우주에서 태어난 한 줌 관리자에 불과하지.”
“아…….”
“더군다나 이 세계는 재창조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는 곳. 섬기는 것들이 많은 오딘이면 모를까, 이곳 존재들에게 불길하게 여겨지는 내가. 세계 유지에 힘과 시간을 낭비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무심히 떨어진 물음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대꾸에 헬라의 무관심한 태도를 지적할 수 없게 돼버렸다.
잠깐의 몇 마디만으로도 웬만해선 헬라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울 거란 판단이 들었다.
리디안은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혹스러운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때, 풍월주가 성큼 걸어 나왔다.
“혹시 헤임달이 두려워서 그러는 건 아니죠?”
겁 없는 도발에 곳곳에서 커다란 숨을 삼켰다.
가장 가까이 있던 대장군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풍월주의 옷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그런데도 풍월주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헬라를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이었지만, 길드 마스터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헬라의 영역에 들어서면서부터 한 번의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이미 크라이그를 비롯한 몇몇 격수들은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며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헬라의 코웃음이 들려왔다.
“무슨 의도인지 훤히 보이는구나. 불쾌하지만… 내게 약한 것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단다. 그러니 오른눈을 내게 줄 것이 아니라면 그만 물러가도록. 내 오늘은 거울 세계의 지성체를 본 기념으로 무사히 돌려보내 주마.”
헬라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힌 문이 활짝 열렸다.
다시 나타난 강글로트와 강글라티가 나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듯 플레이어들에게 눈짓했다.
쫓겨나는 상황에 더욱 당황한 리디안은 이판사판, 도박을 시도했다.
“잠시만요! 그럼 오른눈을 드리면 저희를 도와주실 건가요?!”
오랫동안 시큰둥하던 헬라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헬라는 함박웃음을 지며 리디안을 쳐다봤다. 제게 줄 것이냐는 헬라의 반복된 물음에 리디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른눈의 소유권에 관해 오딘과 삼자대면하는 건 어떠세요?”
예상대로 헬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물음이 표정에 가득했다.
덩달아 곁에 있던 동료들마저 영문을 모르겠다며 서로 눈짓했다.
리디안은 질문이 쏟아지기 전에 재빨리 대꾸했다.
“오딘은 지금 군대를 거의 잃은 상태라, 저희에게 기대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오른눈의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고요. 하지만 저희도 오딘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라, 본의 아니게 오른눈을 인질 삼고 있어요.”
“그래서?”
“만약. 헬라 님께서 헤임달 토벌을 도와주신다면 상황이 크게 변할 테니, 오딘도 오른눈의 소유에 대해 깊게 고민해볼 거예요.”
그제야 주변에서 이해했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오딘의 의사 없이 건네진 일방적인 제안이긴 해도, 오딘이 보였던 긍정적인 반응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헬라는 리디안의 제안이 고약하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잠깐. 그게 괜찮을까? 아무리 봐도 저 여자한테 오른눈이 가면 이 세계의 운명도 답이 없을 것 같은데?”
무너스키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에 하이로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헬라도 오른눈의 본질을 활용하진 못할 겁니다. 오른눈은 신의 권능을 더 돋보이게 하는 힘의 상징이지만, 태생을 따지자면 오딘은 최고신. 오른눈은 그 최고신의 신체. 헬라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 아래고요. 헬라는 단지 오른눈이 없는 오딘과 힘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 할 뿐일 겁니다.”
“쉽게 말해, 자신보다 더 영향력 있지만 않으면 된다?”
작게 소곤거리는 무너스키의 물음에 하이로가 힐끔 헬라를 쳐다보며 끄덕였다.
“헬라에게 있어선 단순한 견제용이죠. 오딘도 아마 그 부분을 이해하고 있을 테고, 상황도 상황이니 새로 협상하면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습니다.”
“맞아요. 애초에 오딘이 미미르에게 오른눈을 맡긴 것도 그 균형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미미르가 침식된 지금, 그 역할을 해줄 존재가 없으니 헬라가 욕심 없이 소유한다고만 하면 오딘도 받아들일 거예요.”
박회장까지 하이로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그 지지에 리디안은 더 자신감을 얻어 은근한 눈으로 헬라를 바라봤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꽤 달콤한 제안인지 헬라는 팔걸이에 손가락을 톡톡 치며 오랜 시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리저리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차던 헬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딘을 불러봐야겠구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리디안과 길드 마스터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비로소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전에 잠시 확인할 게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헤임달에게 맞설 수 있는 군대가 있습니까?”
무표정하게 손든 신사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헬라는 그에 가소롭다는 웃음을 내비쳤다.
“차고 넘치는 게 죽은 것들이다.”
붉은 손톱이 허공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까닥였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홀의 양옆에서 덜그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플레이어들이 좌우로 고개 돌리자 검게 변한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수 일어섰다.
까만 그림자는 점차 옅어져 모습을 찾아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좀비부터 해골. 멀쩡한 모습이나 눈에 총기가 없는 요정족까지.
각각 기괴한 형태로 나타난 망자들의 모습에 여러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망자들은 전부 붉은 눈을 한 채 가지런히 정렬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생생함과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 모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 건 헬라뿐이었다.
리디안은 악동처럼 웃는 헬라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약한 것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더니.
지금 표정은 재미있다 못해, 쾌감을 느끼는 수준이었다.
그에 다수가 환멸을 느끼는 사이, 헬라는 웃음을 멈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겁먹을 필요 없단다. 내 군대를 의심하는 듯해 보여준 것뿐이니.”
헬라의 손짓에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가 흔들렸다.
동시에 좌우로 빼곡하게 늘어섰던 망자들이 한순간에 어둠으로 꺼졌다.
압박에서 풀려난 리디안은 심호흡과 함께 헬라에게 다시 물었다.
“그, 그럼 오른눈에 관해 오딘과 이야기해볼 마음이 있으신가요?”
“잠깐 말을 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너는 놈을 꽤나 믿는 눈치로구나. 오딘이 정말 그리할까?”
붉은 입술 새로 비웃음이 걸렸다. 오딘 또한 자신과 같을 거라 믿는 표정이었다.
실패를 확신하는 교만한 미소는 물론, 그간 플레이어들의 노력까지 부정하며 짓밟는 시선에 리디안이 불쾌해져 한마디 뱉었다.
“적어도 오딘은 이 세계를 위해 소멸할 각오까지 하고 있으니,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리디안을 쳐다봤다.
레기온 길드원들은 말 한번 잘했다며 몰래몰래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정작 리디안도 제 발언에 흠칫 놀란 상태였다. 리디안은 황급히 입을 막은 채 슬그머니 헬라의 반응을 살폈다.
면전에서 자신을 깎아내린 리디안의 발언 때문인지.
헬라는 단박에 표정을 굳히곤 입가를 실룩거렸다.
“후…….”
찰나의 분노를 태운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헬라는 창백하게 질린 리디안을 응시하며 냉소했다.
조금 전 발언의 일부는 아주 괘씸했지만, 그 말대로라면 본인은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다.
사실 눈을 받아낼 수 없다면, 이방인들을 금방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도 아니면 강글로트, 강글라티를 이용해 실력이 어떤지 구경하거나, 살짝 겁을 주려고도 했다.
그러나 저 이방인의 제안이 헬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오딘이 오른눈의 소유권을 양도한다면?
자존심 상하게 오딘에게 먼저 손 내밀 필요도 없이 잠자코 이방인들의 중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조금 전 어느 놈팡이의 말대로 오른눈에 담긴 힘을 본인이 직접 사용할 순 없을 터.
그래도 오른눈은 지닌 것만으로도 헬라에겐 몹시 큰 의미가 부여된 균형의 증표다.
그 오만한 오딘이 이 세계를 위해 헌신하려 한다는 건 솔직히 조금 놀라운 일이지만, 이 일로 오딘이 오른눈의 소유권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헬라로선 공정하게 오른눈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였다. 계산을 마친 헬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