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41
441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리디안 님!”
“감사해요!”
홀로 낯선 현실감에 신기해하던 때였다.
기나긴 행렬 속에서 몇몇이 리디안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리디안이 갸웃했다. 그 반응에 지나가던 이가 웃으며 설명했다.
“둥지에서 애써주셨다면서요.”
그는 후방 지원팀에 소속한 딜러였다.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그가 주변인들에게 파프니르 공격팀의 활약을 전파한 것이다.
그에 리디안은 민망하게 웃었다.
“아녜요… 전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모두 전투 길드원들의 도움 덕분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사실 리디안은 뿌듯했다.
이 커다란 전쟁에서 자신도 뭔가의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더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그 부끄러운 표정을 읽은 페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리디안 님, 정말 용감했어요. 제가 다 자랑스러울 정도로요.”
적나라한 칭찬이 듬뿍 이어졌다.
아마도 술트르를 들고 뛰어다녔을 모습일 거라고, 리디안은 민망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만 배시시 웃고 말았다.
“계속 곁에서 도와주신 페페 님 덕분이죠. 다른 세인트분들도 그렇고요…….”
늘 그랬듯, 페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직후였다. 기분 좋게 웃던 두 사람의 귀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반대편 건물 골목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베누스……?”
워낙 퉁명스러운 인상이라 플레이어 정보가 뜨지 않음에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베누스는 저레벨들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장비를 대충 걸친 채,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에게 삿대질하는 중이었다.
입으로 뱉는 말이야 한결같았다.
여태 고생한 전투 길드원들을 얕잡아 비웃고, 함께 온 몇몇 원주민들을 조롱하는 둥, 오랜만에 나타나 보여준다는 게 수준 이하의 극치였다.
“마음 같아선 두고 갔으면 좋겠는데… 쓰레기는 우리가 거둬 가야죠.”
보리알이 고까운 눈으로 투덜거렸다. 저러다 슬그머니 묻어갈 거라며 무시하자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모른 척하기엔 베누스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그 어그로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되도록 베누스를 상종하고 싶지 않아 하던 간부들이 쌍심지를 세울 즈음이었다.
“햄스터다.”
베누스가 서 있는 골목 인파가 좌우로 갈렸다.
척척 걸어가는 햄스터의 모습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뒤늦게 햄스터의 접근을 눈치챈 베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활짝 휘었다.
“오, 햄찌! X나 오랜만! 님 백화했다면서? X나 안 어울리는데?”
베누스는 눈치 없이 낄낄대며 걸어왔다. 햄스터는 그런 베누스의 얼굴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짝, 소리와 함께 베누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얼얼한 고통에 베누스는 눈을 끔뻑이다 햄스터를 쳐다봤다.
“이게 뭔…….”
짝, 소리와 함께 베누스의 고개가 또다시 돌아갔다.
“야……!”
반대로 또 한 번.
“이 시X……!”
같은 방향으로 또 한 번.
얼굴을 들어 올릴 때마다 연달아 네 번을 처맞은 베누스는 그제야 이곳이 도시, 피케이 불가 지역이라는 걸 떠올리곤 눈을 찌푸렸다.
“아니, 잠깐. 시X… 왜 때려짐? 지금 이거 피케이 맞지? 나랑 막 가자 이거지?”
동시에 햄스터가 무장 상태라는 걸 눈치챈 베누스가 허겁지겁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시스템이 먹통인 상태에서 인벤토리가 열릴 리 없었다.
“뭐야, 시X. 왜 아직도 안 열려? 쟨 어떻게 들고 있는데? 미쳤나, 진짜.”
“형모야. 내가 지금, 너랑 싸우면 누가 X될 거 같아?”
조용히 떨어진 물음에 베누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전까지 가깝게 지낸 만큼, 베누스는 실제의 햄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햄스터와 오로지 육탄전으로 맞붙게 되면 누가 불리한지도 뻔히 알고 있다.
베누스는 찍소리도 못했고 햄스터는 작게 충고했다.
“형모야. 게임 끝났어. 이제 현실이야. 그러니까 너, 입 조심해. 지금 여기에 너 벼르고 있는 사람… 없을 것 같지? 응, 아니야. X나 많아.”
그 말을 끝으로 햄스터는 돌아섰다. 그러다 잠시 멈춰 또 한마디 했다.
“그래도 네가 한때, 내 친구였으니까 의리로 충고해주고 간다. 괜히 또 뻘짓 하다가 개 처맞고 울지나 말고. 앞으로 처신 잘해, 병X아.”
베누스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경멸의 시선 속에서 몇몇 플레이어들이 금방이라도 달려와 때릴 것처럼 씩씩대고 있었다.
베누스는 지금 도시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식은땀을 흘렸다. 주변은 햄스터처럼 언제든 달려와서 자신을 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들 천지였다.
베누스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게임 노르드 월드의 베누스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졌음을.
아무 능력 없는 현실의 자신은 이토록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베누스는 고개 숙인 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잘했어요.”
눈치 빠른 보리알이 돌아온 햄스터를 칭찬했다. 햄스터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나쵸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오… 이제 남은 빌런들만 처리하면 되나?”
어느새 다가온 다람이 주변을 기웃거렸다.
보리알은 다람이 떨떠름해 온갖 인상을 쓰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람의 손가락이 보리알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 따거다.”
한동안 소식 없던 유명인의 출몰이었다. 보리알만큼이나, 리디안도 따거에 대해선 감정이 좋지 않은 편이라 불편한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퇴출당하고 나서 대장군 님이랑 신사 님한테 울며 빌었다는 얘기가 있긴 있었죠?”
“그래도 두 분이 안 받아주니까 그 뒤로 아예 은둔 생활했대요. 뭐, 베누스처럼 젊은 피도 아니고, 솔직한 말로 혼자선 뭐 아무것도 못 하는 양반이니까…….”
이모탈, 캐티스가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했다.
말대로 오랜 은둔 생활로 따거는 몹시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모른 채, 근근이 들려오는 주변인들의 소식에 연락을 망설이던 때.
파프니르 레이드 소식이 들렸고 어영부영 하루를 기다리다 보니 모든 게 정리됐다. 모이라는 소리에 일단 나오기는 했지만…….
따거는 곳곳에 보이는 아는 얼굴들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푹 고개 숙였다.
“옛날 같았으면 거들먹거리면서 와서 핏대 세우고 그랬을 텐데. 하도 까이고 길드에서 손절 당하고… 이젠 레벨 10짜리 한테도 븅X소리 들으니까 주제 파악이 된 거죠.”
워낙 쌓인 게 많은 흑도가 팔짱 낀 채 비난을 뱉었다.
일부가 따거의 몰락을 동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업보라며 차디찬 시선으로 외면했다.
그중 풍월주가 대장군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겠어요?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그간 저 인간 때문에 안팎으로 시달렸다면서요.”
대장군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잘 모르겠어요. 핑푸 형은 아마 저 형님이 밖에 나가면 예전처럼 연락해서 또 협박할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절대 반성할 사람 아니라고요. 근데 저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이번엔 절대 봐주지 않으려고요.”
제법 단호한 태도에 풍월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알아서 잘 해결하라는 무미건조한 답변에도 대장군은 방글방글 웃기 바빴다.
“어디, 다음 폭탄은 누구냐…….”
우르르 지나가는 인파에 다람은 안 좋은 의미의 ‘네임드’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리디안도 본의 아니게 인파를 힐끔거렸다.
“과일맨도 살아있었네?”
프루츠맨.
알프하임 클리어 사건 이후 종적을 감춘 사람이었다.
프루츠맨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마제스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파에 숨다시피 걷고 있는 프루츠맨은 어색하게 정면만 주시했다.
좌우로 전투 길드원들이 서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가능한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했다.
“그래도 쪽팔린 건 아나 보네.”
“자기 잘못 길드원들한테 덮어씌우려다 뽀록 났잖아요. 그 이후로 길마 권한, 신용. 다 잃었고 소문까지 쫙 퍼졌으니 얼굴 못 들고 다니죠.”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플레이어들은 프루츠맨의 어리석은 판단을 회상하며 오랫동안 수군거렸다.
그러다 힐끗 시선을 돌린 프루츠맨이 길드 마스터들과 눈이 마주쳤다. 프루츠맨은 화들짝 놀라 땀만 뻘뻘 흘리다가, 꾸벅 고개 숙이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마지막까지도 못난 모습에 여기저기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냥 그러려니 추가 모두가 관심을 꺼버렸다.
그에 비해 별님반의 제니스는 무척이나 뻔뻔했다.
“고생들 하셨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걱정말고 사람들 따라가세요.”
제니스는 한 치의 부끄러움 없는 태도를 보였다. 도도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측근들과 안내원인 양 행동했다.
그 뻔뻔함에 샤봉이 황당한 눈으로 투덜거렸다.
“어이가 없네. 자기가 뭘 했다고 남들한테 생색이야?”
“뭐, 별님반에서 몇 명 보내준 것도 결과적으론 도와준 거니까요.”
아퀴나스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나머지 길드 마스터들은 제니스의 발랄한 미소에 차례차례 뒷목을 잡으며 신음했다.
* * *
분수대 앞에선 델피네마켓 길드가 대강의 인원 체크를 진행했다.
오딘은 무지개다리를 당분간 열어두겠다고, 혹여나 돌아가지 못한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신사는 최소한의 파악은 필요하다며 체크를 고집했다.
그로 인해 행렬이 잠시 정체되는 동안. 리디안 앞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갔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리디안과 전투 길드원들에게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현했다.
초반 파티 멤버였던 ‘케니’도 마찬가지였다.
“누님! 저도 후방에 있었어요! 사실 제가 계속 아는 척하고 싶었는데요. 저번처럼 말실수할까 봐… 그냥 꾹 참았어요. 암튼, 선두에서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회한 케니는 조금 성숙해져 있었다.
반듯하게 고개 숙이는 케니의 모습에 리디안은 과거의 불미스러웠던 일을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다. 덩달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싸움에 참여해준 케니를 향해 밝게 웃어줬다.
부끄러워 도망친 케니를 두고 헤른과 도란도란 떠들던 때였다.
리디안은 갑작스럽게 제 앞으로 뚝 멈춰선 두 남성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는 얼굴이었다. 레기온에 가입하기 직전, 무생숲을 함께 돌던 파티.
두 사람의 길드 이름만은 선명했기에 리디안이 반갑게 외쳤다.
“망했어요!”
“안 망했어요, 아직.”
껄껄 웃는 브루스리에 이어 곽두팔이 재치 있게 받아쳤다.
호쾌하게 웃은 곽두팔은 어쩐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야. 그때도 고급 인력이셨는데. 지금은 더 고오오오급이 되셨네요. 나중에 어디 가서 아는 분이라고 자랑해도 되죠?”
“두 분도 더 고오오급 되신 것 같은데요…….”
레벨은 보이지 않지만, 겉으로 보이는 장비는 범상치 않았다. 풀 세트는 아니더라도 언뜻 보이는 고가 장비에 리디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고작 둘뿐인 ‘망했어요’ 길드도 후방 지원팀에 참가했다는 사실에 리디안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스레 반가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덧 인원 체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행렬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자, 브루스리와 곽두팔도 손을 흔들며 먼저 떠났다.
“미드가르드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 없는 것 같은데요?”
섀도우 헌터들의 전언에 거리를 지키던 전투 길드원들도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심가의 허공에서 오색 빛이 솟구쳐 올랐다.
높이 이어진 계단 끝으로 찬란한 색을 품은 구름다리가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직감했다. 저것이 바로 비프로스트, 그간 플레이어들이 애타게 원했던 무지개다리라는 것을.
“드디어…….”
비로소 마주한 귀환길에 몇몇이 뭉클하며 울먹였다.
이제는 정말, 현실로 돌아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