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44
444화
그날의 진짜 진실.
유진아의 머리로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유진아는 재빨리 게시글을 열었다.
[알고 싶다.]“아…….”
낚시였다.
하마터면 작은 욕설이 나올 뻔했다. 유진아는 허탈한 웃음을 픽 뱉으며 목록으로 돌아갔다. 게시글은 꾸준히 올라오고 있었다.
대부분 영양가 없어 보이는 글들이라 계속 봐 봤자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에 실망한 유진아가 한숨을 쉬며 길드 코너로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11504 / 우린 그날 다 접속함. 이게 진짜 진실임. (1) / 닭끼 / 02―11
다른 글들과는 달리 뭔가 의미심장한 제목이 유진아의 시선을 끌었다.
또 그저 그런 낚시글이겠거니. 그러면서도 유진아는 홀린 듯 게시글을 열었다. 그리고 나타난 장문의 내용에 유진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너넨 기억 안 나겠지. 우린 사실 게임 속에 6개월 가까이 접… 아니지. 이동해 있었다가 맞으려나. 암튼 너네 다 정상 접속돼 있던 거 맞다. 기억이 지워진 거야. 더 말하고 싶은데 약속한 게 있어서 쩝… 그리고 전투 길드애들 너무 머라 그러지마. 걔네 진짜 고생한 애들임. 뭔 고생인지도 다 말하고 싶은데 못 말하겠다. 암튼 ㅅㄱ 그리고 이거 이따가 지울거임ㅇㅇ]글을 다 읽은 유진아는 어버버 당황했다.
내용만 보자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직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플레이어가 분명했다. 하지만 ‘닭끼’라는 닉네임만 봐선 도무지 누구인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물론 모두가 입이 무거울 거란 낭만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끼리의 암묵적인 약속이 퇴색된 것 같아 리디안은 씁쓸함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건… 믿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새기 또지랄이네 / 뉴비는운다
∟형이 약 제대로 먹으랬지 / 어허그만하래도
∟라는 내용의 소설 써주실분?ㅋㅋㅋ / 귀환한용자
∟님혹시중2임? / 인생은한방
다른 누군가 동조하긴커녕. 이후로 작성자를 매도하는 댓글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이긴 한데… 뭔가 씁쓸하기도 하네.”
괜스레 작성자 닭끼를 본인에게 대입해 본 유진아가 약간의 서러움을 토했다. 동시에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언제 이렇게 변했지?”
유진아는 게시판의 이상한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노르드 월드는 특정 인물 몇몇을 빼곤 대체로 클린한 게임. ‘본캐’를 특정할 수 없는 익명 게시판이라도 항상 적정선은 지켰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게시판은 어디 다른 게임인가 싶은 정도로 상당히 낯설었다.
이번 사태로 일반인이나 타 게임 유저들이 유입되어 더 불이 붙은 것도 있겠지만. 간혹 게임상에서 봤던 ‘본캐’ 아이디를 그대로 쓰는 사람들도 있어 놀라웠다.
그런 그들마저 온갖 말을 끄집어내고 있는 걸 보니…….
“그만 봐야지.”
차마 망조가 들었다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유진아는 침울하게 웃으며 습관처럼 새로고침을 눌렀다.
그때, 또 다른 제목이 유진아의 시선을 끌었다.
11515 / 레기온 세인트 리디안 누나를 찾습니다. (23) / 헤른 / 02―11
“어……?”
작성자 헤른. 유진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놀라 당황한 유진아가 서둘러 게시글을 눌러 열람했다.
글을 읽은 유진아의 입매가 스르륵 올라갔다. 반갑고 기쁘고 미안해 헤실헤실 웃었지만, 그 아래로 달린 댓글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시위중이니까 수색글ㄴㄴ 도배도 ㄴㄴ / 건이정이
∟이퓽신새키ㅋㅋ누나 아니라고 형이라고 / 쿠쿠쟝
∟님아 리디안님 엿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ㅡㅡ 혹시 그분한테 사기 당했음? / 초보전사
∟∟ㅇㅇ누군가파더테레사를음해하고있다 / 사장님여기
∟우리 파더테레사 80에 스카디10강 주인임. 님같은 쩌리가 함부로 농락할 사람이 아님 자중하셈 / 뼝아리는꾸엑
∟뭐?스카디10강? 파더테레사도 버그파티 앞에선 어쩔수없었군ㅋㅋㅋㅋㅋ / 난니꺼야
∟근데 파더테레사 솔로 길드 아님? 찾아보니 레기온이네 / 목표는내집마련
∟∟ㅅㅂ진짜네? 길드옮긴듯 / 때리지마세요
∟∟리디안 이분 호드라쪽 부캐 아니었음? / 세인트춘배
∟∟12시간동안 대체 무슨일이일어난거냐 이개같은망겜 이게게임이냐 / 슉슉슉
∟근데 이사람도 레기온이네? 렙도 80이네? 버그파티 때 레기온 신규받았나? / 아들아아빤틀렸
∟∟와 개나소나 80이네 레스티어 빨리 보상해 보상하라고ㅠㅠㅠㅠ / 푸리링
∟얘도 그렇고 저번에 글올린 다른놈도 그렇고. 저번부터 왜자꾸 누나래 ㅄ들ㅋㅋㅋㅋ / 쿠쿠쟝
∟파더테레사 혹시 넷카마로 컨셉바꿈? ㅅㅂㅋㅋㅋㅋ / 워로드상향좀
∟∟이게맏다 / 팔라석이
∟∟일리이따 / 쿠쿠쟝
당사자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러 명이 달려들어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다. 대부분 달갑지 않은 내용들이었지만 유진아는 하도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맨 아래 달린 댓글에 또 다시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여기서 헛소리한 새끼들. 본캐 다 털었으니까 필드 나오면 뒤질 줄 알아라 / 이노센트
∟∟222222 / 백검
∟∟222222222 / 테세우스
∟∟뭐야 진짜 레기온 등판했네 저도 길가입좀 71 바드입니다 / 때리지마세요
∟∟이야~ 랭커 자신감 쩐다 본캐닉 달고 오네 ㅋㅋㅋㅋㅋ / 닉넴모로하지
∟∟뭐라냐ㅋㅋㅋㅋ여기 다 홈피닉인데 뭔수로 본캐를 털어?ㅋㅋㅋㅗㅗㅗ / 워로드상향좀
∟∟게시판 분위기 보고 눈치 챙겨 / 파파
이노센트, 백검, 테세우스. 그리고 파파까지. 익숙한 이름 뒤로 댓글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놀란 유진아가 황급히 목록으로 돌아갔다.
정말 뭔가 문제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11537 / 버그드 월드 실시간 X된 상황. (64) / 유성우 / 02―11
[너님들 닉넴 누르고 쪽지보내기 하면 본캐 뜸ㅋㅋㅋㅋㅋ개소리 싸지른 분들 빨리 수습하세요 참고로 아까부터 로그인한 애들은 다 본캐로 노출중임^^그럼ㅅㄱ!]공교롭게도 오류가 생긴 건지, 홈페이지 닉네임은 전부 게임 내 캐릭터 아이디로 바뀐 상태였다.
그 이후로 새로 올라오는 글은 뜸했으며, 그마저도 뜬금없이 정상적인 말투로 변해 지난 작성자들을 매도하는 중이었다.
유진아는 헤른의 게시글에 달린 악플이 실시간으로 삭제되거나 수정되는 걸 목격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한차례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 그런지. 한결 긴장이 풀린 것도 같았다. 유진아는 그대로 길드 코너로 향했다. 그러곤 길드 마스터 마제스티에게 연락처를 남겼다.
이후, 1분도 되지 않아 곧장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흠칫한 유진아는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전화를 받았다.
―리디안님!
예상대로 마제스티의 목소리였다.
아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진아는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다시 생겼던 긴장과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유진아는 밝게 대답했다.
“네, 길마님!”
* * *
노르드 월드, 일명 버그 이벤트 사건 이후로 두 달이 지났다.
게임은 여전히 접속 불가한 상태다. 안전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서버가 닫혀 있으며, 추후 오픈 예정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일단 공식 사이트에서 ‘재오픈’ 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힌 점. 그리고 중간 소식으로 회사 내부 모습이 보도되고 있어 갑작스럽게 서비스 종료가 되진 않을 것 같다고…….
노르드 월드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안심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플레이어들이 12시간 동안 캡슐에 갇혀 있어 일상 생활에서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
게다가 ‘버그 파티’ 사이 플레이어간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졌다는 일부의 주장이 커 게임사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재오픈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 중이다.
* * *
날이 풀린 3월의 어느 날. 유진아는 오후, 네 시쯤이 되어 집에서 나왔다. 오랜만의 장거리 외출이었다.
노르드 월드에서 돌아온 이후, 본가에서 요양하며 근처를 산책하며 적응했지만… 유진아는 지금도 가끔 이 ‘현실’이 종종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건물이나 사람들의 옷차림, 사회의 분위기 등 익히 알던 것임에도 간혹 새롭고 두렵게 다가왔으나 유진아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 삼아 먼저 다가가 봤다.
옛 학교 친구들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따듯하게 대해 주던 선배들과도 연락해 근황을 알리며 안부를 물었다.
처음엔 되게 긴장되고 어려웠지만, 막상 한 번 해보니까 너무 쉬웠다.
냉랭하게 반응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상대방들도 유진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워했다.
이어질 대화가 어색할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도 또 달랐다. 그간 노르드 월드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잘 지낸 영향인지도 모른다.
유진아는 말도 버벅거리지 않았으며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가끔 엉뚱한 답변이 나와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했지만, 마지막은 항상 웃음이었다.
조금 전도 옛 친구들과 그때처럼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약속까지 잡았다. 유진아는 하나둘 채워지는 스케쥴을 바라보며 뿌듯해했다.
삼십 분가량 버스를 타고 내린 유진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라고 했는데…….”
현재 그녀는 레기온 길드 단체방 공지대로, 노네임이 운영하는 고깃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정류장에 서서 알려준 위치를 찾아보니, 정말 노네임의 가게가 길 건너편에 있었다.
‘이름 없는 고깃집’. 그냥 봐도 노네임을 연상케 하는 널찍한 가게 간판. 희미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들.
안의 모습을 상상하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길을 건너갈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서 있을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자토 : 안 온 사람 누구? 빨리 와요.]단체방 메시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고깃집 내부로 보이는 곳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유진아는 잘 차려진 음식상보다 사람들 얼굴에 더 눈길이 갔다.
“와… 와아… 진짜 우리 길드원들이다.”
당연했다. 그간 노르드 월드에서 얼굴을 보며 친해진 사람들이었다. 얼굴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유진아는 사진을 확대해가며 감탄하다 다시 심호흡했다.
“아… 진짜 너무 긴장되는데. 어쩌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바보 같아, 유진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또 단체방 알림이 울렸다.
왁자지껄 올라오는 대화들을 보며 유진아는 한참을 웃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개인 톡 알람이 울렸다.
[서윤재 : 다 왔어요?] [네! 근처예요ㅎㅎ] [서윤재 : 어딘데요?] [횡단보도만 건너면 돼요! 윤재님은 벌써 도착했어요?]재깍 대답하던 서윤재의 답은 없었다. 유진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횡단보도로 이동했다.
그렇게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던 중, 무심코 바라본 정면에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보행자 신호로 불이 바뀐 순간, 상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유진아는 배시시 웃으며 걸어 나갔다. 역시 검은색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와… 근데 바로 알아보시네. 아, 아니지. 당연한 건가?”
귀환 후 서로 연락은 쭉 했어도 현실에선 처음 보는 건데, 그런데도 서윤재와의 첫 만남이 익숙했다.
‘아마 저 안에 들어가도 똑같겠지?’
힐끗 노네임의 가게를 쳐다본 유진아는 실없이 웃으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지난 과거를 인정하고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노르드 월드에서는 힐러, ‘리디안’으로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현실의 평범한 사람, ‘유진아’로서 다시 시작할 차례다.
‘뭐, 가끔은 노르드 월드의 리디안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환히 웃은 유진아는 손을 흔들며 힘차게 달려 나갔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