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54
54화
그림자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구경하며 느긋하게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점차 한 시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리비쿠스의 그림자에 플레이어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옮겼다. 리디안 역시 발밑을 주의하며 이동했다.
하지만 다가오던 리비쿠스는 다시 방향을 바꿔 아홉 시 쪽으로 향했다. 정말 제멋대로였다. 이미 한 시 방향을 빠져나온 리디안은 그 자리에 멈춰 사위를 살폈다.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묘했다.
기둥이 치솟는 순간 즉사하는, 그런 위험하고 진지한 상황인데도 트랩을 피해 사방으로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뭔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어 리디안은 혼자서 눈치 없는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한동안 플레이어와 그림자 사이의 술래잡기 시간이 이어졌다.
몇 번 경험한 ONE 길드원들은 비교적 여유로운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게임 때와는 달리 실제의 경험이 처음인 레기온 길드원들의 표정은 혼비백산이었다. 심지어 점점 빨라지는 그림자 속도에 여기저기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오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이도 있었다.
리디안 역시 랜덤한 방향으로 모래 아래를 헤엄치는 리비쿠스 때문에 긴박한 달리기를 반복했다. 또 트랩을 피해 이따금 점프까지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가만 생각하니 레이드가 아니라 극기 훈련에 참여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길게 이어지는 대혼란 속에서 리디안은 간신히 그림자를 피해 열두 시 방향에 자리 잡았다. 우연찮게 맞닥트린 스타일리쉬와 마주 보며 휴, 안도하는데, 한 시 방향으로 꺾었던 리비쿠스가 다시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에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빨리! 이쪽으로!”
열한 시 방향에 몸을 피한 사람들이 다급히 손짓했다. 중앙 쪽으로 움직여도 괜찮았겠지만, 긴박한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이 손짓하는 곳으로 몸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스타일리쉬가 먼저 움직였고 혼비백산한 리디안도 자연스레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긴 다리로 트랩을 시원스레 넘어가던 스타일리쉬가 반대편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중독되고 말았다. 표식이 없었으니 확인 작업 때 누락된 다른 트랩이 분명했다.
당황한 스타일리쉬가 옆으로 물러난 순간, 리디안은 덜컥 멈춰 섰다.
‘밟으면 죽는다.’
짧은 찰나에 확신한 리디안은 울상을 지었다. 리비쿠스는 바로 뒤에 다가온 참이었다. 어느 방향이든 몸을 피해야 했으나, 사방이 지뢰밭이었다.
아니, 여긴 왜 이렇게 트랩이 많은 거야!?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트랩이 적은 곳은 한 군데뿐이었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타일리쉬가 착지한 쪽으로 좀 더 멀리 뛰는 수밖에…….
망설일 시간도 없어 리디안은 일단 뛰고 봤다. 있는 힘껏, 온 힘을 다해서. 운동 신경이 꽝이라 몹시도 걱정스러웠지만,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생각보다 높이 뛰어오른 듯한 느낌에 어? 하고 당황한 순간, 트랩을 뛰어넘은 리디안은 안타깝게도 착지에 실패, 그대로 엎어져 모래밭에 처박혔다.
꼴은 꽤 우스꽝스러웠지만, 다행히 트랩은 건드리지 않았고 쫓아오던 리비쿠스 역시 다시 방향을 틀어 반대편으로 되돌아갔다. 혹시나 리비쿠스가 쫓아왔을까,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본 리디안은 크게 안도했다.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본인들이 같은 상황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겠지만, 저 의도치 않은 몸 개그를 보면 누구라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파티원 전부가 그를 목격한 건 아니지만, 열한 시 근처에 있던 상당수가 리디안의 상황을 알아버렸다. 모래 범벅이 된 리디안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졌다.
“되게 잘 뛰시네요!”
마침 열한 시 방향에 있던 버베나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표현에 솔직한 사람답게 얼굴 가득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리디안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부축받아 일어섰다. 배를 잡고 웃던 버베나가 괜찮다고, 멋있었다고 달랬지만, 그건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리디안이 떨어트린 무기를 줍는 사이, 헤엄을 끝낸 리비쿠스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유롭게 지면 위로 솟아 더듬더듬 바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괜히 화가 솟구쳤다. 리디안은 뚱한 표정으로 다시 한 시 방향으로 돌아갔다.
같은 타이밍에 돌아온 파파가 리디안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다 본 모양이라고, 리디안은 애써 외면해 모른 척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무렵, 리디안과 함께 도망쳤던 스타일리쉬가 중앙을 향해 씩씩거리며 외쳤다.
“열한 시 트랩 확인 누굽니까!”
꽤나 성난 목소리에 중앙에 모여들기 시작한 2파티 사람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트랩이 하나 더 누락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에 메인 탱커를 맡은 포푸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죄송함돠!”
군기 바싹 든 대답에 스타일리쉬는 뒷목을 잡는 것으로 조용한 분노를 표현했다. 금방이라도 와다다 포푸리를 몰아붙일 기세였지만, 보는 눈이 있어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레이드가 끝나면 포푸리는 크게 혼이 날 예정이었다.
* * *
잠깐의 혼란이 지나가고 다시 레이드의 흐름이 돌아왔다. 모두가 지정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리디안도 흐름에 녹아들어 꼬임 없이 신축과 전체 회복을 사용했다.
잡몹 담당 팀 쪽에 수호자 니드, 호그가 몰린 탓에 신축 사용 횟수가 더 많았지만, 게이지를 보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리비쿠스의 남은 HP는 80% 남짓했다. 제법 얌전해진 리비쿠스 덕분이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누군가 이제 좀 할 만하다고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리비쿠스가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쳐들었다.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는 독침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중독 필드! 다들 가까운 언덕으로 올라가세요!”
신사가 다급히 외쳤다. 눈치 빠른 중앙 팀은 벌써 가까운 언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비교적 보스와 떨어져 있던 한 시 팀과 이동 팀도 부랴부랴 움직였다.
리디안은 바로 뒤, 한 시 방향으로 뜀박질했다. 필드에 발이 닿는 순간 즉사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트랩을 피해 무작정 뛰어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어느새 검은 모래 위로 초록색 독액이 잔뜩 퍼져 있었다. 녹조를 떠올리게 하는 혐오스러운 색상은 물론, 이따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비주얼이었다.
리디안은 긴장한 채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켰다. 대강 10분에서 15분 사이가 지난 듯한데, 얼추 예상해도 최소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았다.
‘이런 걸 내내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거야?’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컨트롤이 아닌, 도망 실력만 잔뜩 늘어날 것 같았다.
‘뭐, 도망도 컨트롤이라면 컨트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머쓱함에 볼을 긁적이는 때, 누군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페페가 있었다. 리디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중앙 팀이야 보스의 물리 공격에 이리저리 움직이니 어느 방향 언덕으로 올라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던지라 페페가 이쪽으로 온 줄 몰랐던 리디안은 페페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엄청 구르시는 거 같던데. 모래 범벅 되셨네요.”
쓰게 웃은 페페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꽤 우스꽝스럽게 엎어진 리디안의 얼굴이 창피함에 붉어졌다.
보셨구나……. 민망함에 어쩔 줄 모르는 리디안의 눈빛처럼 페페의 손도 허공에서 어쩔 줄 몰라 멈칫거렸다.
페페는 직접 모래를 털어 주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보는 눈도 많았고 괜히 리디안이 오해받아 곤란해할까 봐. 그래서 어색한 손짓으로 모래가 묻은 부위를 조금씩 알려 줬다.
“많이 힘들죠?”
방향을 따라 모래를 털던 리디안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없어 죽겠어요. 가운데 계신 분들 스펠 사용하는 것부터 잘 보고 싶은데… 신축하느라 볼 틈도 없고, 정신 차리면 트랩 피해서 뛰어다니고 있고…….”
한숨과 함께 작은 어깨가 축 처졌다. 페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잘하고 계시는데요, 뭘. 저희도 스펠 쓰고 도망 다니느라 다른 사람 볼 틈도 없어요. 여태 실수 안 하신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칭찬에 리디안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단순히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의도겠지만, 탑 세인트인 페페가 하는 칭찬은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느껴졌다.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인정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리디안은 입이 귀에 걸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야, 갑자기 처음 도전 때 생각나네. 되게 웃겼었는데.”
리디안과 페페가 자기들끼리 화기애애한 사이, 아쳐들과 가까이 있던 그레이스가 언덕 아래 중독 필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ONE 길드원들도 낄낄대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게임 때는 저거에 닿아도 치명상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언덕 올라갈 필요 없이 그냥 힐 받으면서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가 몇 명 빼고는 거의 다 전멸했지.”
“진짜 너무 어이없어서 게이트 앞에서 영혼 없이 웃었잖아요.”
“난이도가 너무 거지같이 변했어요.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네.”
모두가 웃으며 투덜거리는 사이, 중앙을 점령한 중독 필드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래 위에 독침을 꽂아 넣고 있던 리비쿠스가 얄밉게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갔다.
언덕 위로 대피했던 플레이어들도 다시 원래 위치로 향했다. 신속히 움직여야 했기에, 반복된 뜀박질에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신음이 흘렀다. 리디안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체력이 동나겠다고, 당장 체력 걱정부터 해야 했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정도로 리비쿠스는 일부러인지 사람들을 자꾸 뛰어다니게 했다. 중간중간 독 안개도 많이 뿜었다. 바람의 방향을 체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비쿠스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워낙 많아 여기저기 모래가 흩날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HP 10%를 더 깎은 시점에서 리비쿠스가 두 집게를 모래에 꽂고 괴성을 질렀다. 구덩이 패턴이었다.
지면이 크게 진동했고 사방에서 구덩이를 알리는 그림자가 다량으로 생겨났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피신했다.
유독 한 시 방향에 그림자가 많이 생겨 그곳에 있던 7, 8, 9파티가 사색이 되기도 했다. 다들 눈치껏 도망쳤고, 리디안도 헐레벌떡 열두 시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그림자는 금세 구덩이로 변했고 대략 1분이 지나자 모조리 사라졌다. 리디안은 이번에도 잘 피했다며 뿌듯해했다.
제자리로 돌아간 리비쿠스의 피는 이제 70% 남짓 남은 상태였다. 그래도 그새 꽤 많이 줄인 상태였다. 플레이어가 도망 다니며 허비한 시간만 아니었다면. 더 줄일 수도 있었다.
“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누군가 답답함에 그리 외쳤다. 그러나 그건 절대 해선 안 될 말이었다.
한동안 잠잠하겠다, 싶었던 리비쿠스가 다시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독 기둥 패턴이었다. 조금 전 구덩이 패턴이 끝나고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짜증스럽게 야유했다.
겨우 한 시로 복귀했던 리디안은 울먹이며 다시 뛸 준비를 했다.
준비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얄미운 리비쿠스가 이제 막 모래 아래로 들어가 종횡무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제멋대로 움직이는 녀석인 데다 곳곳에 있는 트랩까지 피해야 했기에 많은 인원이 몰린 곳은 자연스레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었다.
리디안은 자신이 달려가던 방향으로 사람들이 여럿 뛰어오는 걸 목격하곤 당황했다. 자칫하면 부딪혀 발이 꼬일 수도 있으니 되도록 한적한 곳으로 피해야 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크라이그가 달려온 상태였다. 덜컥 멈춘 리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면 분명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또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크라이그가 덥석 소매를 붙들었다.
“어?”
“그냥 나 따라와요, 헤매지 말고.”
당황스러웠지만 거절할 시간이 없었다. 위쪽으로 올라오는 리비쿠스의 그림자에 겁먹은 리디안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크라이그의 뒤를 쫓았다.
신기하게도 크라이그가 가는 곳은 트랩도 거의 없었고 리비쿠스가 따라오지도 않았다. 대신 한 시 방향에서 조금 떨어진 열 시 방향이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여기까지 와도 되나? 돌아갈 걱정에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레이스나 무니를 비롯한 다른 원거리 딜러들의 위치도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리비쿠스를 피해 다섯 시 방향에 뭉친 상태였다.
얄궂게도 원거리 딜러들을 쫓아가는 리비쿠스의 모습에 리디안은 그대로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조만간 다시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 올 느낌이 강렬했지만 말이다.
“어째 패턴 지속 시간이 더 길어지는 거 같은데…….”
“…네?”
크라이그의 중얼거림에 반문한 그 순간이었다.
“한 시! 눈알! 눈아알!”
누군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고, 리디안과 크라이그 역시 반사적으로 한 시 방향을 바라봤다.
스콜의 오른 눈, 하티의 오른 눈이 팔락팔락 날갯짓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리비쿠스가 아직 독 기둥 패턴을 선보이며 모래를 휘젓고 있는 탓에 도망 다니느라 여유 있게 공격할 수 없는 원거리 딜러들의 얼굴이 낭패로 물들었다.
그나마 멀리 떨어져 공격이 가능한 사람이 있었지만, 혼자서 두 마리를 처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원거리 딜러들은 여전히 리비쿠스에게 쫓기고 있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잡몹을 끌고 다니던 이동 파티도 달갑지 않은 존재에 신음을 흘렸다.
“아, 망했다.”
간신히 쌍욕을 참은 버베나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필드 가까이 다가온 눈알들이 눈치 없이 플레이어들에게 디버프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곧, 새카만 눈동자에서 기분 나쁜 푸른 빛이 쏘아져 나왔다.
[스콜의 오른 눈이 플레이어의 MP를 흡수합니다.] [하티의 오른 눈이 플레이어의 MP를 흡수합니다.]리디안은 순식간에 닳아 없어져 가는 MP 게이지에 뻐끔뻐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