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76
76화
한참 후, 부스스 눈을 뜬 리디안은 비몽사몽 몽롱한 의식으로 눈알을 굴렸다.
아지트는 고요했다. 레이드 멤버 대부분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쪽잠을 자고 있었고, 몇 명만이 제정신으로 조용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핏 확인한 시스템 시간은 아직 여섯 시가 되기 전이었다. 좀 더 자도 되겠다, 라고 판단한 리디안은 마음 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내가 지금 어디에 기대 있는 거지?’
분명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는데,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고개를 의식한 순간 뭔가 딱딱한 것이 뺨 위로 느껴졌다.
그 순간, 싸악, 핏기가 가셨다. 번쩍 눈 뜬 리디안은 번개처럼 몸을 빼 고개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몸을 기대고 있던 왼쪽으로 의자에 앉아 팔짱 낀 채 잠을 자는 크라이그가 보였다. 기대고 있던 건 그의 갑옷 같은 방어구였다. 리디안은 동그란 눈을 떨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내가 어쩌다가? 혹시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반사적으로 입가를 닦았지만, 묻어 있을 턱이 없었다.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리디안은 바짝 붙어 있는 서로의 의자를 바라보며 갸웃했다.
크라이그가 옆에 앉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되짚어도 자기가 먼저 크라이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때, 고맙게도 크라이그가 게슴츠레한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깼다.
“…더 안 자요? 피곤할 텐데.”
깬 걸 알고 있었는지, 힐끔 곁눈질한 크라이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리디안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끔뻑거렸다. 잠깐 고개 돌린 크라이그는 뒤편에 있는 휴식 공간을 확인했다.
“저기 소파 비었으니까, 소파로 가서 자요.”
그 말을 끝으로 크라이그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규칙적인 숨소리는 물론, 동요하나 없는 자연스러운 태도에 리디안은 뭐라 묻지도 못하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조용히 일어섰다.
그의 말대로 비어 있는 소파로 찾아가면서도 한참을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크라이그가 먼저 제게 어깨를 내어 준 게 틀림없었다.
우뚝 걸음을 멈춘 리디안은 뜨거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잠결이었다곤 해도 남의 어깨를 베고 잠들었으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겨우 열을 식힌 리디안은 힐끔 고개 돌려 크라이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봤다. 여러 가지로 제게 도움을 주는 그가 듬직한 건 사실 인정해야 할 부분이었다.
리디안은 머쓱함에 얼굴을 긁적였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이다. 리디안은 복잡하게 한숨 쉬며, 터덜터덜 소파로 다가가 털썩 누워버렸다.
일단 잠이나 자고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 * *
버베나에게 발각되어 다소 난처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썩고목’ 레이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운 좋게도 타임마다 꼬박꼬박 꽃이 나와, 아침 일곱 시 반 타임까지 세 개의 고목나무 꽃을 모았다.
마제스티는 다섯 개를 모으는 즉시 상자를 만들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같이 지르자고 약속한 참이었다. 그래서 다들 힘든 티를 내면서도 상자에서 나올 아이템에 대한 기대로 잔뜩 들뜬 상태였다.
그리고 네 번째, 마지막 다섯 번째 타임이 되자 시간이 난 레온도 동생인 버베나와 함께 구경하러 왔다.
이왕 왔으니, 놀지 말고 용병 딜러나 하라며 마제스티가 장난스레 레온을 닦달하던 때, 두 길드 마스터에게 동시에 알림 음이 떴다. 발신인은 태양의 새 길드 마스터, 핑크푸크였다.
마제스티와 레온은 찝찝한 눈으로 핑크푸크에게 온 메시지를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태양과 무법자 길드원이 서로 협력해 ‘썩고목’ 레이드를 돌겠다는 게 핵심이었고, A구역 사용 요청 시간은 당장 다음 타임인, 새벽 0시가 넘어서였다.
레온에게 바짝 붙어 있던 버베나는 그 내용을 듣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이 새X들이 왜 갑자기 썩고목 레이드를 해?”
레기온 간부들도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네르투스 상자 일이 아니고서야, 그들이 ‘썩고목’ 레이드를 돌 일이 없었으니까. 특히 핑크푸크는 단순한 의심으로 ‘썩고목’ 레이드를 진행할 만큼 어설픈 사람도 아니었다. 뭔가 확신이 있기에 이리 당당하게 맵 사용 신청을 하는 게 분명했다.
“이상하네. 핑푸가 이 얘기를 어떻게 알지?”
백검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마제스티와 레온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ONE, 레기온. 두 길드 중 하나에 ‘쁘락지’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쁘락지’는 길드 활성화 당시 유행하던 일종의 첩자 놀이였다. 요즘은 인맥을 활용한 진짜 첩자 활동으로 인식되지만, 서버 초기에는 보조 캐릭터. 즉, ‘부캐’를 이용해 상대, 적 길드에 가입하여 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하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했다.
워낙 PK가 유행하던 시기라, 정보를 이용해 맵 깊숙한 곳까지 알고 찾아와 뒤통수를 치는 건 기본. 상대방, 혹은 타인을 비방하는 은밀한 대화를 엿듣고 널리 퍼트려 이간질과 싸움을 부추기기도 했다.
정말 저열한 행위지만,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하는 나름의 외교 활동이었다. 오히려 안 하면 바보. 우리만 당할 수 없다며, 모든 길드가 너나 할 것 없이 경쟁 길드에 쁘락지를 심어 서로를 감시하곤 했다.
이는 초창기에 각 전투 길드가 자리를 잡기 전, 신규 길드원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에 가장 활성화되었다. 보통 본 캐릭터가 아닌 보조 캐릭터로 활동하기에 다중 접속이 가능한 일반 MMORPG에서나 성행할 법하지만, 가상 현실 노르드 월드라고 못할 건 없었다.
지금이야 1인 1계정 1캐릭터로 규칙이 정해져 있지만, 초기의 노르드 월드는 개인 계정당 최대 2개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고, 대리 접속 툴이라는 비공식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해 계정 동시 접속도 가능했다.
1번 계정에 A캐릭터, B캐릭터가 있으면 플레이어C가 A캐릭터를, 플레이어D가 B캐릭터를 이용할 수 있는 셈이다. 계정 동시 접속의 경우 보통은 믿을 만한 가족이나 실제 지인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나름 꼼수였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대리 접속 툴은 사용 방법이나 제약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이 접속하기엔 애로 사항이 많았다.
결국, 본인이 직접 신규 플레이어인 척 1인 2역을 맡는 쪽으로 가는데, 인터페이스상 캐릭터 두 개를 동시에 움직일 수 없으므로 결국 1캐릭만 선택해 활동해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부캐릭터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고 해도 쁘락지로 나선 플레이어들도 워낙 고인물이라 알게 모르게 본인의 말투나, 플레이 방식이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정성을 들여 관찰하면 대강 누구인지 추려 낼 수 있었다.
물론, 운 좋게 안 들키고 오래오래 1인 2역을 수행하는 플레이어도 있다. 그러다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1인 2역에 심취해, 진짜로 이중생활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대부분은 결국 발각당해 길드 파멸의 루트를 밝곤 했다.
쁘락지 문화가 전투 길드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쁘락지는 친목 길드에도 만연했다. 초창기 친목 길드는 PVP 대신 쁘락지 전쟁으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 대부분은 고의적으로 분위기를 흐려 분탕을 치는 수준이었다.
시간이 흘러 점차 길드가 안정화되고 세력이 확실하게 나뉘기 시작하자 쁘락지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또 게임사에서도 1인 1계정 1캐릭터 정책을 앞세우며 동일 계정 동시 접속을 막아버리자, 플레이어의 고의적인 모니터링 행위는 근절될 수 있었다.
요즘은 인맥을 이용해 은근히 정보를 캐오는 편인데, 이 역시 철새 문화가 거의 없는 노르드 월드의 특성상 길드원들의 길드 충성도가 높아지는 바람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쁘락지가 있다고 하는 건, 레기온 길드 혹은 ONE 길드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잠깐, 잠깐! 우린 절대 아니에요. 이 얘기 아는 사람이 나랑 지원이랑 신사, 그리고 관우 형뿐인데. 이 멤버가 미쳤다고 떠벌리고 다니겠어요?”
굳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레온이 황급히 손사래 쳤다. 곁에 있던 버베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거들었다.
“맞아! 다른 길드원이면 몰라도. 신사랑 관우 오빠는 진짜 아닌 거 알죠? 의심하지 마요! 마제스티 님, 우리 사이에 이러기 있기? 뭐, 솔직히 우리 길드에도 정보 팔이 하는 사람 없을 거라고 확신은 못 하지만, 진짜 이번 건은 우리 네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에요.”
“진짜 네 사람밖에 몰라요?”
“그렇다니까요?”
“진짜?”
“아, 진짜요!”
백검의 되물음과 버베나의 긍정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마제스티는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레온, 버베나, 신사, 관우. 이 네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오히려 확신할 수 없는 건 레기온 길드원이었다. 리디안과 크라이그가 네르투스 상자를 까던 당시, 아지트에는 레이드 멤버 외에도 일반 길드원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적당히 서로 소통하며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길드원들도 아지트에 자주 들락거리니 길드 내에서 네르투스 상자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길드원을 믿기에 길드원 외에는 얘기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주의를 부탁했으나, 이런 상황까진 예상하지 못해 마제스티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침묵했다.
레온과 버베나도 괜히 미안해져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우리 길드원 의심하고 싶지는 않은데… 솔직히, 아지트에서 들을 거 다 듣고 빈둥거리는 사람 한둘이 아니잖아.”
이노센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제스티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나름 신경 쓴다고 쓰는 편이지만, 솔직히 레기온은 길드 관리 부분에서는 ONE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목 길드처럼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전체 길드원이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주기적으로 파티를 바꾸는 ONE과는 달리, 레기온은 지원자 위주로 파티를 구성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파티의 구성원이 바뀌지 않는다. 리디안이 오랫동안 크라이그와 파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투를 원치 않는 길드원들이 자칫 소외될 수 있으나, 비전투원이라 하더라도 시간대 상관없이 아지트 출입에 딱히 제한이 없는 데다, 정모 역시 중요한 건이 아닌 한 자율 참석 진행. 와도 상관없고, 안 와도 상관없으니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러다 보니 작정하고 아지트에 하루만 붙어 있으면 웬만한 얘기는 다 들을 수 있었다.
“와, 그동안 별일 없어서 방목 방침이 우리 길드 장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단점이 되어버렸네.”
쓰게 웃는 마제스티의 모습에 백검이 그의 등을 위로하듯 두드렸다. 그만큼 길드원들을 신용하고 있었기에 갑작스레 터진 스파이 의혹은 마제스티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대기실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길드에 쁘락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자연스레 서로가 타인을 곁눈질했다. 그중에서도 최근 가입한 프리피케 출신들은 특히나 무안해져 눈치를 살폈다.
누군가에 대한 의문의 시선이, 누군가에 대한 의심의 시선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점 불편해지는 눈빛에 공기는 숨 막히도록 무거워졌다.
“일단 레이드 진행합니다!”
정신 차린 마제스티가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 했다. 덕분에 마지막 타임 레이드는 비교적 어색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 * *
레기온과 ONE 길드가 한참 ‘썩고목’ 레이드를 하는 동안, 태양과 무법자는 새벽 타임인 다섯 시 이후 레이드를 하나 더 예약해 버렸다.
레이드를 끝내가던 때, 레온과 마제스티는 핑크푸크의 예약 메시지를 받자마자 욕설을 뱉었다. 백검도 훤히 보이는 미래에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거 꼬라지가 너무 뻔한데. 보스 선점하려고 대가리 굴리고 타이밍 노리는 게…….”
“눈 뜨고 당할 순 없죠. ONE이 그다음 타임, 열 시로 예약할게요. 상자 얘기는 안 하고 그냥 적당히 길드원들한테 둘러댈게요. 그냥 태양이랑 사소하게 자리싸움 하는 줄 알 거예요.”
근본적인 목표였던 고목나무 꽃 파밍보다 점점 길드끼리의 자존심 싸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잔뜩 약 오른 레온의 긴급 선언으로, 세 길드 간의 고목나무 레이드 예약 싸움이 벌어졌다.
24시간 이후까지 예약이 번갈아 가며 꽉 차는 사이, 불만을 품은 핑크푸크가 레온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핑크푸크 : 동맹이면 같이 돌아야 하지 않나요? 왜 길드 따로 돌아서 보스 더 차지하시나요? 공평하게 각 길드 연합끼리 한 마리씩 나누죠.]속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다. 레온이 보여 준 내용에 마제스티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레온 : 그냥 각자 길드로 충분히 레이드 돌 수 있어서 도는 건데요. 왜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리고 썩고목을 태양, 무법자랑 나누어 가질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더 많이 잡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당연히 핑크푸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알겠다며 마음대로 하라는 답장이 왔고 레이드 예약 싸움은 더 치열해졌다.
거의 3일 내리 연달아 ‘썩고목’ 레이드 예약이 꽉 차고 나서야 레기온의 마지막 레이드를 도운 레온과 버베나는, ONE길드의 레이드 팀을 짜기 위해 황급히 돌아갔다.
마제스티는 그 길로 간부들과 아지트에 모였다.
다소 예민한 사안에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일반 길드원들은 그대로 해산해야 했기에 리디안은 간부들을 힐끔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크라이그에게 내일 오전 일일 퀘스트는 다음으로 미루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웬만해서는 이럴 사람이 아닌지라, 리디안은 걱정 섞인 한숨을 삼켰다. 워낙 불미스러운 일인지라,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