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89
89화
경험치는 들어오지 않았다. 축적되어 다음 퀘스트에 줄 모양이었다. 리디안은 잔뜩 실망했다. 그럼 그렇지.
‘그나저나 정말 안구가 맞는 모양이네? 이 게임 아이템은 왜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거야?’
한숨 쉬면서도, 리디안은 어딘가 낯익은 몬스터의 이름에 고개를 기울였다.
혼을 부리는 마법사…….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리디안의 뇌리로 조금 전 다녀온 지하 도시가 떠올랐다. 분명 그곳의 보스 이름이었다. 어, 혹시 그 보스가 로크바 본인인가?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왜 그래요?”
당혹스러운 리디안의 표정을 알아본 크라이그가 다가와 물었다. 리디안은 눈동자를 흔들며 대답했다.
“지, 지하 도시… 보스를 잡으래요.”
재잘재잘 떠들던 파티원들이 그 소리를 듣곤 텁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헐, 미쳤네.”
“와, 퀘스트 난이도 봐라?”
“죽으러 가라는 건가?”
눈을 깜빡이던 괴자가 어? 하더니 어! 하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오토마타 옆에 있던 괴자는 황급히 달려와 리디안의 앞에 정지했다.
“그거! 기억났어요! 일기장 연동 퀘에서 제일 빡센 거. 근데 그거 보스한테 퀘템 드롭이 안 되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냥 보스 잡으면 자동으로 클리어만 될걸요? 그래서 사람들이 버그 리포트도 많이 보냈을 거예요.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안 고친 거로 알아서, 그동안 업데이트 내역에도 없었고. 아마 보스 잡아 봤자 퀘템이 안 나와서 다음 퀘스트 진행하긴 힘들 거예요.”
“허, 버그 리포트를 보냈는데 오류를 안 고쳐? 역시 망한 게임. 일을 안 하는구먼.”
모두가 노네임의 투덜거림에 동의했다. 리디안도 뜻밖의 소식에 허탈함을 느꼈다. 결국, 여기서 막히는구나. 아쉬우면서도,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조금 후련한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퀘스트 할 일은 없겠네요. 그동안 같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리디안은 파티원들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그에 적혈구가 흐뭇하게 웃었다.
“같은 길드, 같은 파티인데 당연하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
미안함에 망설이던 게 바보 같을 정도로 끝도 없는 상냥함이었다. 리디안은 쑥스러워 볼을 긁적였다.
“그럼 이제 우리, 어디로 가?”
번쩍 손을 든 노네임이 그리 물었다. 그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시간도 오후 세 시. 다들 별다른 일정도 없었고, 오랜만인지라 사냥 의욕을 보였다. 대충 분위기를 봐서 가볍게 끝내려 했던 크라이그는 의외의 모습에 실소하며 도도를 바라봤다.
“도도 님,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도도의 자원으로 결성된 파티였으나, 크라이그 파티 입장에서는 귀한 객원이기에 의사를 물었다. 도도, 시우, 페이지, 괴자, 오토마타가 쑥덕쑥덕 논의했다. 어디가 궁금하고 어디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한동안 입씨름을 벌이던 그들이 결정 끝에 말했다.
“헬하임이요. 거기서 사냥 좀 해보고 싶어요. 제일 쉬운 곳, 아무 데나 좋아요.”
“그럼 무생숲밖에 없죠.”
갓 70이 된 플레이어들에게는 벅찬 곳이지만, 값비싼 장비로 무장한 고레벨들에겐 적정 사냥터. 심지어 이만한 인원의 파티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개미집도 눈치 없이 터트리며 몹의 씨가 마를 때까지 사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사냥 속도도 빠를 테니, 경험치가 절실한 리디안이나 헤른, 노네임에겐 피버 타임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무생숲’은 사냥은 기존의 여섯 명 파티로는 좀 힘겨울 수 있었기에, 크라이그도 잘 됐다는 눈치였다.
“그럼 무생숲으로 결정. 진수 형이랑 헤른 님, 아이템 정상으로 세팅해도 돼요.”
신나서 춤을 추는 노네임과 헤른을 선두로 파티는 곧장 헬하임 ‘무생숲’으로 향했다.
각자 장비를 맞춘 그들은 ‘무생숲’의 A구역으로 입장했고, 그곳에서 꽤 오래 사냥했다. 도도를 비롯한 프리피케 출신들이 제대로 된 파티 사냥에 재미를 붙인 덕분이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무생숲’에 머무른 리디안의 파티는 맵을 쓸다시피 활보했고, 도도가 만족감을 느낄 즈음 덩달아 빠르게 오른 경험치에 기뻐하며 미드가르드로 귀환했다.
“그럼 내일 또 봐요!”
정다운 작별과 함께 각자 짝을 지어 떠나간 후, 게이트 앞에는 크라이그와 리디안만 달랑 남았다.
별도의 약속이 있어 헤른과 갈라진 리디안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게 퍽 웃겼는지, 크라이그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 빤한 시선을 느낀 리디안이 덜컥 굳어 삐거덕 땀을 흘렸다. 헤헤, 민망하게 웃은 리디안은 슬그머니 손을 내려트렸다.
“박회장 님한테 연락해 볼게요.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는지.”
못 본 척해 주는 건지, 곧장 시스템 창을 두드리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리디안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히 박회장과 일찍 만날 수 있게 되어, 리디안은 크라이그를 따라 어느 주점으로 들어섰다. 이름은 ‘초원의 들꽃’. 중심가에서 가장 핫한 ‘발할라의 아침’에 비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저쪽에 앉죠.”
쳐다보는 플레이어들을 피해 구석으로 숨었지만, 리디안은 플레이어의 시선보다 크라이그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별거 아니겠지만, 잘해 주겠다는 말이 내심 신경 쓰였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잘해 줄 생각인 걸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미묘한 침묵 속에서 크라이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슬그머니, 조심스럽게 리디안의 눈을 마주 본 크라이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물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불편한 건 아니죠?”
직설적인 물음에 리디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깜짝 놀란 리디안은 딱딱한 나무 테이블을 붙든 채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 그게 아니라! 그냥 의미가 궁금……!”
잠시 높아진 제 목소리는 물론. 괜한 말을 꺼냈다 싶어 당황한 리디안은 금세 빨개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주르륵 고개 숙였다. 잠시 놀랐던 크라이그도 그런 리디안을 바라보며 또다시 폭소했다.
“크라이그 님?”
창피함에 고개 숙이고 있던 리디안에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에 정신 차린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박회장 / 길드 : 대기업(M)
레벨 : 76 / 직업 : 나이트 / 보조 직업 : 재단사
HP : 3300 / MP : 1080
게임 시절, 지나가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디안은 기억 속의 그는 여성 캐릭터였기에 잠시 당황했고, 아이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분위기와는 다른, 몹시 평범하게 생긴 20대 남성이라는 모습에 또 당황했다.
대기업은 친목 길드로 분류되어 있지만, 친목보다는 사냥 목적이 더 큰 길드였다.
본래는 박회장이 전투 길드로 창설하려 했으나, 신세계가 먼저 창설 기준을 맞추는 바람에 순번을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별수 없이 친목 길드로 창설했고 사냥과 친목을 겸해 운영하고 있었다.
두 목적이 공존하는지라 길드 이미지나 평판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목적에 따라 파벌이 나뉘어 있어 내부 단합으로 따지자면 약간 애매했다.
그래도 친목 길드 중에서는 가장 전력이 훌륭했고, 길드 마스터인 박회장이 전투 길드에 대해 호의적이라, 레온이나 마제스티 등의 하이 랭커들과 교류가 깊었다.
크라이그와는 같은 나이트라는 공통점은 물론, 시스템이나 공략 위주로 제법 성격이 맞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퀘스트 하시는 분이 있다고 해서 신기했는데, 요즘 유명하신 리디안 님이셨네요.”
자연스럽게 크라이그 옆에 앉은 박회장이 넉살 좋게 인사하며 웃었다. 대뜸 제 얘기가 나오자 리디안은 허둥지둥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요?” 얼떨결에 인사하면서도 더듬거리며 되묻자 박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게임 때부터 유명하셨잖아요. 아낌없이 초보 플레이어 도와주셨던 거랑, 특이한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여기 와서는 여자분이어서 더 유명해지셨고, 최근에는 스카디까지 먹어서 들고 계시니까요.”
리디안의 두 눈이 흔들렸다. 게임 때야 그렇다 쳐도, 여기 와서의 일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유명, 유명이라니. 달갑지 않은 단어에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크라이그를 쳐다봤다. “정말 그래요, 제가요?” 하지만 리디안만큼 사람들 평판이나 입담에 관심 없는 크라이그는 갸웃할 뿐이었다.
“뭐,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게 궁금하신 건가요?”
땀을 뻘뻘 흘리는 사이. 박회장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신 차린 리디안도 침착하게 비극의 일기장 퀘스트를 떠올리며 설명했다. 마녀의 무덤 보스 레이드에서 얻을 수 있는 특정 아이템으로 시작하는 고레벨 스토리 퀘스트라, 박회장이 금세 떠올리며 끄덕였다.
“일기장 퀘스트, 오랜만이네요. 올 초에 했었나? 퀘템 갖고 알프하임 NPC 찾아가는 게 시작이었죠?”
“맞아요. 그 불친절한 할아버지 NPC요.”
“흠… 말투가 좀 고깝긴 했죠. 술 가져오라고 행패 부려서 미미르 산맥에 그 꼬마한테 가서 노가다 한 번 더 하고, 맞죠?”
“와, 맞아요. 회장 님, 기억력 좋으시네요. 괴자 님은 해보셨다면서 거의 기억 못 하셨는데.”
“제가 스토리 이런 거 좋아하는 편이라 정독하고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전 아까 듣고 온 것도 잘 기억 안 나는데, 대단하세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라 잘 기억하는 것뿐이죠.”
척척 떨어지는 맞장구에 조심스럽던 리디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낯선 사람이지만, 주제가 맞물려 잘 통하는 기분이라며 말이다.
그에 잠시 소외된 크라이그의 미간이 자동으로 좁혀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NPC들 하는 말이나 더 귀담아 들어 놓을 걸 그랬다고. 대화에 끼지 못한 크라이그는 조용히 두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퀘스트 얘기로 재잘거렸다. 리디안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추억과 대조하던 박회장은 어느 순간 웃음을 멈춘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몹시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일기장이… 읽혀요? 그런 기능 없었는데?”
의심스러운 물음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리디안은 휘둥그레 뜬 눈을 끔뻑거렸다.
일기장이 읽을 수 없는 아이템이라고?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