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이튿날, 오후 한 시, 황량한 헬하임 중앙 게이트 앞으로 ONE, 레기온 소속의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이마다 고가의 풀 장비로 무장했기에, 지나가던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랭커들을 향한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수군거림은 여기저기 퍼져 나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잉여 플레이어들도 득달같이 달려와 구경꾼처럼 자리 잡았다. 조금만 신경 써 염탐하면 대충 그들의 행선지가 파악되기에 다들 흥분한 얼굴로 떠들기 바빴다.
“와, 쟤네 지하 도시 도전함? 지금 레이드 난이도 헬이라던데, 쟤들은 페널티 생각 안 하나?”
“오늘만 사는 듯.”
“그냥 바뀐 패턴 알아내려고 테스트하러 가는 거 아님? 그때 죽사막도 쟤네가 죽어가면서 공략법 완성하고 공개한 거잖아.”
“살신성인 지렸다. 그럼 조만간 지하 도시 패턴도 공개되겠네?”
“뭐야, 태양 애들 또 X나 꿀 빨겠네. 죽사막 템 먹겠다고 핑푸가 아퀴나스랑 무너스키 X꼬 겁나 빨던데.”
“ONE도 극혐인데, 태양이 꿀 빠는 것도 솔직히 역겹지 않냐?”
“인정. ONE이랑 레기온이 공략 공개 안 하고 X나 진흙탕 싸움했으면 좋겠다. 팝콘 각 나오게.”
“그럼 완전 빅 재미지. 저번에 고목나무 필드전 때도 분위기 지렸다며.”
“지리긴. 태양이랑 무법자 개처발림. 그냥 양민학살 수준? X신들, 레기온한테 살살 녹더라. 아이스크림인 줄. 나 거기 구석에서 은신하고 직관했잖아.”
“나도임. 근데 솔직히 그때는 프리피케가 다 했지. 이긴 것도 프리피케발이야.”
“엥? 레기온만 있었어도 개발랐을 건데? 컨트롤부터가 급이 다른데?”
“레기온만 있었으면 그나마 비슷했겠지. 그때 보니까 페이지가 혼자 다 잡더만. 그리고 인원도 태양 쪽이 상대적으로 딸렸음. 핵심 딜러 대장군도 없었고.”
“장난함? 대장군 있으면 뭐하냐. 지금 부주 아니고 본주라면서. 개발컨 본주. 그 새끼 저번에 보니까 변두리 주점에서 여자들한테 웃음 팔고 있던데. 팬클럽 놀이하면서.”
“야, 컨은 후잡해도 얼굴이랑 기럭지는 솔직히 인정하자. 그리고 이 게임, 여자 비율 높아진 것도 그 새끼 덕분 아니냐? 걔가 방송에서 언급한 뒤로 여자 유입 늘어났다며.”
“그랬나? 그거 그냥 영자가 VIP 기 살려 주려고 언플한 거 아닌가?”
군데군데 모여 떠드는 무리를 목격한 이노센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저 새끼들은 어떻게 된 게, 발전은커녕 나날이 퇴화만 하지? 오늘도 주둥아리 모터 돌리느라 고생들 하네. 아니,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줄이던가. 하여튼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불끈 주먹을 쥔 모습을 보니 언제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리디안은 화르륵 불타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리디안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죽사막’ 때 한 번 겪어 봤기에, 그러려니 애써 의연한 척하는 것뿐.
또 지금은 리디안을 향한 험담보다는 스카디 아이템 자체에 대한 화제성이 더 높았다. 때때로 ‘템발 낙하산’이라는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운발도 실력이라고 두둔하는 플레이어도 없진 않았다. 리디안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제 얘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리디안 님!”
성난 이노센트를 달래는 사이, 반대편에서 규호가 손을 흔들며 이리 오라 손짓했다. 오랜만에 리디안을 본 ONE의 세인트들이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온화한 웃음 덕분에 이노센트도 한결 기분을 누그러트리곤 리디안의 등을 떠밀었다.
때마침 다가온 백검과 자리를 체인지한 리디안은 총총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어디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쟁쟁한 하이 랭커가 즐비했다. 회의를 마친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별다른 문제없이 이만한 인원이 지하 도시 투어를 위해 모였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사전 회의는 도시 외곽에서 당일 오전 내로 짧게 이루어졌고, 전날부터 미리 준비한 간부들 덕분에 파티 편성까지 스피드하게 끝난 상태였다.
기본 멤버는 ‘죽사막’ 때와 같았다. 그리고 추가로 열 명이 합류했다. 프리피케 출신의 하이 랭커 5인과 ONE 길드 소속의 하이 랭커 5인이었다.
‘죽사막’ 때보다 멤버 구성이 더 탄탄하다 보니, 전에 비해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다만 ONE과 비교하면 지하 도시 레이드 초행자가 많은 레기온의 사정 탓에, 진행 도중 약간의 혼란을 예상하고 있었다.
프리피케 출신 역시, 괴자를 빼곤 전부 초행이었다. PK를 위해 지하 도시에 간 적은 있어도 보스 레이드를 하러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르드 월드는 레이드 콘텐츠와 메인 퀘스트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필수적으로 클리어해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아이템 역시 똑똑한 사람이라면 다들 현질한 골드로 구매하니 힘들게 파밍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레기온의 참가 멤버들은 따로 새벽부터 모여 속성 강의를 진행했다. 패턴 변수가 있어도 기본 베이스는 게임 시절 공략을 따라가기에 리디안은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기본 공략을 머리에 박았다.
난이도에 걸맞게 몇 가지 골치 아픈 패턴은 있었는데, 설명으로만 듣기에는 ‘죽사막’에 비해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아마 변수로 난도가 더 높아질 거고, 직접 당해 봐야 앓는 소리를 내겠지만…….
“리디안 님, 오랜만이에요.”
활짝 웃는 규호의 뒤로 나머지 세인트들이 보였다. 캐티스, 그레이스, 드림드림도 마찬가지로 리디안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만난 오빠, 삼촌 사이처럼 리디안도 헤헤 웃으며 꾸벅 고개 숙였다. 그러다 한 인물이 보이지 않아, 리디안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 페페 님이요? 저쪽에 있어요.”
눈치 빠른 규호가 재깍 검지 손끝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 멀리 뒤엉킨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페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탁한 빛의 방어구들 사이에서 흰색의 대제사장 시리즈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차림새였다.
리디안은 페페와 마주 보고 서있는 여자 워로드를 목격하곤 갸웃했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ONE의 하이 랭커 ‘그리고’였다.
등을 지고 있어 페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의 눈이 초롱초롱한 걸 보니 페페가 그녀를 돌봐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고, 페페도 원체 다정하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이라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역시 페페 님은 인기가 많구나. 나름 레벨 업도 많이 했고, 비슷하진 않아도 적당한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페페는 저 꼭대기에 있는 듯했다.
“저 누나는 무슨 놀러 나온 줄 아네. 그냥 따라오지를 말지. 솔직히 별로 도움도 안 될 텐데.”
규호가 적나라한 불평을 뱉었다. 리디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못마땅한 표정의 규호를 두고. 캐티스가 쓰읍, 소리 내며 눈치를 줬다. 타 길드 앞에서 자기 식구에 대한 불평은 옳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규호는 멈출 줄 몰랐다. 오히려 억울한 듯 토로했다.
“솔직히 저 누나가 필드 타입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 캐릭 본주가 자기 지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한테 그냥 양도하고 간 거고. 그 이후로 저 누나, 뭐 한 거 있어요? 노가리 깐다고 랭킹만 줄줄 떨어트려 놨지. 채팅만 줄기차게 할 거면 친목 길드로 빠지던가. 이도 저도 아니게 여기저기 궁금한 척 다 찔러보고, 소풍 가듯 사냥터 대충 따라다니고. 일반 필드면 그러려니 하는데, 솔직히 레이드는… 공략 배울 생각도 없이 호기심으로 무작정 버스 타려는 거 보기 좀 그렇잖아요.”
신랄한 규호의 비판에 분위기가 싸악 가라앉았다. 리디안은 왠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주춤주춤 물러섰다. 캐티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레이스도 동감하듯 한마디 했다.
“안 그래도 버베나가 고민 많이 하고 있어. 네 말대로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야. 근데 사람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것뿐이잖아. 그리고 저 얼굴 보면서 쓴소리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최소한의 눈치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죠. 맨날 몰랐다, 봐 달라, 웃으며 하자,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기나 하고. 특히 요즘 페페 님이랑 동갑인 거 내세우면서 더 뻔뻔해졌잖아요. 그게 제일 웃겼어요. 페페 님이 잘 돌봐 주면 자기도 레이드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그거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요. 저러다 죽으면 페페 님 탓할 텐데, 솔직히 페페 님도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본인도 엄청 껄끄러울걸요? 진짜 나라도 한 소리 하고 싶은데, 누나라서 말도 못 하겠고…….”
그간 맺힌 게 많은지 규호는 오랫동안 쏟아 내고도 쉽사리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날이 선 분위기에 리디안이 쭈뼛쭈뼛해지자, 캐티스가 결국 규호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무거운 공기에 리디안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뜨렸다. 머쓱해진 그레이스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드림드림을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드림 님, 세팅은 다 했어요? 상태 이상 저항 수치 부족하다면서요.”
마찬가지로 눈치를 보고 있던 드림드림이 서둘러 반응했다. 자연스럽게 아이템 세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리디안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 * *
한참 후, 레기온의 세인트들도 차례차례 도착해 합류했다. 앵두군과 무니의 입담 덕분에 분위기가 더 가벼워졌고 리디안은 껄끄러웠던 대화를 천천히 잊어 갔다.
“리디안 님은 이제 조언 드릴 필요도 없네요. 아주 완벽해.”
그레이스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리디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세인트들도 동감하듯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페페의 아이템 옵션 작업에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지하 도시 일반 몹이 성가시게 상태 이상을 걸었던 것처럼 지하 도시의 보스 역시 심심하면 상태 이상을 거는 특성이 있어 비격수들의 상태 이상 저항 세팅은 필수였다.
하지만 이는 최대한 스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MP 최대치와 MP 틱, 체력 수치를 평균 이상으로 잡아야 하는 비격수에겐 어려운 숙제였다. 작정하고 돈을 발라 아이템의 옵션을 맞추지 않는 한 세팅이 애매했기에, 높은 수치의 상태 이상 저항이 필요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풀 세트를 포기하고 3부위 정도는 상태 이상 저항 전용 아이템으로 맞춰야 했다.
레기온의 앵두군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그는 풀 세트로도 상태 이상 저항 평균 수치를 유지하고 있는 리디안을 부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리디안 님, 지도 좀…….”
템발의 위력에 민망해하던 때, 길마 마제스티가 다가와 조심스레 요청했다. 지하 도시의 입장권인 지도. 보스 존으로의 입장을 위해선 파티장이 소유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리디안은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지도를 꺼내 양도했다.
“입장권 아까워서라도 네 시간 풀로 채우고 나와야겠네요.”
허겁지겁 뛰어가는 마제스티를 보며 앵두군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무니는 ‘죽사막’ 때를 떠올리며 찡그렸다.
“죽사막 한 시간 뛰는 것도 피로도 딸려서 죽을 뻔했는데, 가능할까요?”
“글쎄다. 일단 전멸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라서 테스트 차원이니 중간중간 쉬면서 하지 싶은데.”
휴식 시간이 있을 거라는 이모탈의 말에 무니가 크게 안도했다. 듣고 있던 그레이스도 웃으며 덧붙였다.
“죽사막은 패턴이 좀 특이해서 달리는 일이 많았던 거예요. 지하 도시는 랜텔 말고는 거의 뛰어다닐 일 없어요. 뭐,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피로도 부분에선 죽사막 정도는 아닐 거로 생각해요.”
“그럼 다행이지만…….”
보스에 대한 걱정으로 소소하게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전체적인 인원이 다 모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캐티스와 규호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