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0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08화
누나와 여왕님 (3)
“이사벨라… 양?”
오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뭐야?’
왜 여기에 이사벨라가 있는 거야?
‘분명 지금 한창 마르코 패밀리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바쁠 텐데.’
심지어 그녀는 대외적으로 성녀라는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 채에 달하는 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는 상황.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올 시간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여기에….”
“헤헤. 오진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와버렸어요.”
“…….”
설마.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온 거야?’
오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음? 서로 구면이었나?”
한태호가 놀랍다는 듯 오진과 이사벨라를 번갈아 봤다.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전에 한창 암살시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오진 씨가 절 지켜주셨거든요.”
“아, 전에 뉴스에서 들은 적 있네. 그런 일이 있었군….”
한태호는 쯧쯧 혀를 찼다.
“로마의 성녀를 암살하려고 하다니. 하여간 그 나라도 몹쓸 놈들이 많구만.”
로마의 성녀가 보여준 따듯한 선행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유명했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린 성녀.
그런 그녀에게 암살시도라니, 천인공노할 놈들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오진 군은 어떻게 그걸 알고 이탈리아에 간 건가?”
“알고 간 건 아닙니다. 그때 따로 조사할 일이 있어서 갔는데 우연히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그녀를 발견하게 됐죠.”
“허어. 공교로운 우연이로구만.”
“아뇨.”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오진을 바라보며 가슴께를 쓸었다.
“오진 씨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 이라고 생각해요.”
사과처럼 발그레 붉어진 뺨.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사랑의 빠진 소녀처럼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어, 음.”
한태호는 이런 반응은 생각지 못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허허! 콜그란데 가문의 영애에게 이런 열렬한 관심을 받다니. 자네도 참 재주가 좋구만.”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오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호탕하게 미소 짓는 한태호와 달리 오진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로마의 성녀라.’
갈 곳 없는 자에게 집을, 굶주린 자에게 한 끼의 식사를 베풀어주는 따듯한 마음씨의 여인.
아름다운 외모와 착한 성품만이 아닌, 뛰어난 실력을 지닌 각성자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존재.
‘무슨 수로 양자리의 각성자를 흉내 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에서 그녀는 1년 만에 양자리의 6성 각성자로 올라선 슈퍼 루키라며 오진과 자주 비교되고는 했다.
‘하지만.’
오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오진 씨?”
순진무구한 눈빛.
입가에 지은 상냥한 미소와 봄바람처럼 보드라운 분위기.
보는 것만으로 절로 입가가 풀어지게 만드는 여인이었지만.
‘다 사기지.’
오진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만이.
알고 있다.
‘거머리 여왕.’
흑성회의 서열 3위의 집행관이자 9성 각성자를 손짓 한 번으로 찢어발겼던 괴물.
피에 굶주린 마녀.
그게 이사벨라의 진정한 정체였다.
‘절대 들켜선 안 돼.’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성녀라는 가면 너머의 얼굴을 엿보았다는 것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숨겨야 한다.
“아… 죄송합니다. 설마 이사벨라 양이 한국에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서요.”
“혹시 폐가 됐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고개를 저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이사벨라 양을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사벨라가 성큼 다가오며 손을 잡았다.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앞으로도 함께 있어달라고.”
“그건.”
아니.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씨바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말 않았지.’
오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후훗. 저는 그날 이후로 한순간도 그 말을 잊은 적 없답니다?”
“…….”
미치겠네 진짜.
“그보다 너무하세요 오진 씨.”
이사벨라가 귀엽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연락처도 드렸는데 문자나 전화 한 통 보내주지 않으시고….”
뜨끔.
오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그 뒤로 워낙 여러 일이 있어서요.”
궁색한 변명이긴 했지만.
실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여러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호호. 저도 협회장님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이번에 오진 씨가 큰 공을 세우셨다고.”
이사벨라는 밝게 웃으며 가까이 몸을 붙였다.
“사람들을 구해주시느라 바쁘셨던 거죠? 저를 구해주셨던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
“…이사벨라 양을 구한 건 제가 아닙니다.”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이사벨라는 고개를 저으며 오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포갰다.
“오진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인걸요.”
“…….”
“그나저나 흑성회라고 했던가요? 정말… 끔찍한 사람들이네요.”
그 이름을 차마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출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오진의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반응이었지만.
“예. 저도 설마 한국에 끔찍한 조직이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는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최근 이탈리아에서도 흑성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활동한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이사벨라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콜그란데 가문에서도 그들을 추적하고 있지만 꼬리도 잡히지 않네요.”
당연히 잡힐 리가 없지.
추적하고 있는 본인들이 그 꼬리의 주인이니깐.
“그렇군요.”
“어쨌든! 오진 씨가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사벨라는 꽃이 만개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움켜쥔 오진의 손을 풍만한 가슴께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때.
“━오지나?”
탁!
이사벨라의 손을 사납게 뿌리치며 하은이 둘 사이에 성큼 몸을 밀어 넣었다.
“이년은 또 뭐야?”
“…당신은?”
이사벨라와 하은의 시선이 교차했다.
파직!
거문고자리 성흔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허공에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런 미친.’
오진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퍼졌다.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하은을 바라봤다.
‘안 돼 누나!! 그 여자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
수백에 달하는 마르코 패밀리의 각성자들을 잔혹하게 찢어발겼던 이사벨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급히 하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누나. 전에 한 번 말했던 이사벨라 양이야.”
“…그때 들은 것 치고는 서로 꽤 친해 보인다?”
하은이 가늘게 눈을 뜨며 이사벨라를 위아래로 살폈다.
“흐응. 누나라면 오진 씨의 친누나신가요?”
“아니 거덩여? 머리색 보면 몰라?”
도발하듯 이사벨라의 눈앞에 적갈색 머리칼을 흔들었다.
“…어머. 친누나가 아니시면.”
이사벨라의 눈에 순간적으로 섬뜩한 핏빛이 서렸다.
“설마 오진 씨의 연인… 이라거나. 그런 건가요?”
“뭐, 비슷하다 할 수 있지.”
하은이 으스대듯 어깨를 펴며 콧대를 세웠다.
“누나!”
오진이 다시 한번 다급히 하은을 끌어당겼다.
평소라면 누가 그와 하은이 연인 사이라 한다 해도 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안 돼…!’
이사벨라는 자신에게 기이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고 있다.
하은을 자신의 연인이라 소개한다면 무슨 돌발적인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뭐, 뭐야?”
“누나와는 보육원 시절부터 쭉 같이 커온 사이입니다.”
“아! 그럼 소꿉친구 같은 건가요?”
이사벨라가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사이 아닌데.”
하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빼쭉 내밀었지만.
평소완 다른 오진의 반응을 보고 뭔가 눈치를 챘는지 별말 하지는 않았다.
‘후우.’
오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후훗. 전 어렸을 적 친구가 별로 없어서 두 분 사이가 부럽네요.”
이사벨라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로 부럽다는 듯 하은과 오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크흠.”
대화에 끼지 않은 채 한 걸음 떨어져 있던 한태호가 짧게 헛기침을 흘렸다.
“어쨌든 이사벨라 양과 구면이라면 훨씬 잘 됐군. 오진 군, 이사벨라 양에게 간단하게 서울 시내 구경이라도 시켜줄 수 있겠나? 필요한 게 있다면 협회에서 지원해 주겠네.”
오진을 바라보는 한태호의 눈빛이 기대감에 빛났다.
콜그란데 가문이라면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명가, 아니 유럽 전체를 놓고 봐도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콜그란데 가문의 영애가 뇌랑과 두터운 친분이 생긴다면 협회 입장에선 그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예, 그렇게 하죠.”
어차피 떨어트리려 해봐야 떨어질 것 같지도 않고.
‘확인할 것도 있고 말이지’
그녀가 한국에 온 이유가 정말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만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사벨라 양을 부탁하겠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협회장님.”
이사벨라는 한태호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인 후 쪼르르 오진에게 다가왔다.
오진은 이사벨라와 하은을 데리고 협회 밖으로 나왔다.
“혹시 가고 싶은 곳이라든지 있으십니까?”
“흠…. 한 곳 있긴 해요.”
이사벨라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오진 씨 집에 가보고 싶어요.”
“…예?”
집이요?
“후훗.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서요.”
“으음.”
오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가고 싶은 곳이 자신의 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흥. 집은 뭔 집이야? 외국에서 왔으면 걍 명동이나 남산 타워 쪽에 던져주면 되는 거 아냐?”
하은이 눈살을 좁히며 사납게 이사벨라를 쏘아봤다.
“히, 히끅!”
이사벨라는 움찔 몸을 떨며 하은을 피해 오진 뒤로 몸을 숨겼다.
빼꼼.
어깨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어?”
“아까부터 제게 화, 화나신 게 있는 것 같아서요.”
“그, 그건.”
당황해하는 하은.
이사벨라가 눈을 글썽이며 외쳤다.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저도 모르게 실례를 저지른 게 있다면 사과드릴게요!”
꾸벅.
이사벨라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으으으!”
하은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차라리 싸우자 달려들자면 모를까,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되려 할 말이 없었다.
“…씨이.”
한 번 더 이사벨라를 노려보던 하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래, 가자 가.”
“…예?”
“오지니 집 가고 싶다며? 가자고!”
“아! 정말요?”
이사벨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은 말끔히 자취를 감췄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오진은 하은을 구워삶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여자야.’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쿵. 드르륵!
집 앞에는 여전히 공사가 한창인지 시끄러운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참! 깜빡 잊을 뻔했네요!”
이사벨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선물! 선물 준비해 왔어요 오진 씨!”
선물?
“무슨 선물 말씀입니까?”
“헤헤. 전에 절 구해주신 보답도 해드릴 겸 좋은 물건으로 하나 구했어요.”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선물을 준비해왔다는 것치곤 깨끗한 빈손이었다.
‘설마 선물은 나, 라던가 뭐 그런 고전적인 수법은 아니겠지.’
붉은 리본을 몸에 두른 채 야릇하게 미소짓는 이사벨라를 잠시 상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철 지난 러브코미디 만화도 아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오진 씨 마음에 꼭 들었으면 좋겠네요.”
“근데 어디 선물이 있다는 겁니까?”
“응? 바로 앞에 있잖아요? 저기요.”
“예?”
뭔 소리야?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은 깔끔한 빈손이고.
딱히 가져온 가방이라든지 짐 같은 것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라고는━
“…잠깐.”
오진의 시선이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아파트 향했다.
5성급 호텔이라 착각할 정도로 화려한 외관을 지닌 주상복합 아파트.
“에헤헤.”
이사벨라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베베 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국 남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조사해보니까 집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평생 집 한 채 사기 위해서 돈을 모은다거나.”
아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서 선물로 적당한 집을 준비했어요!”
“…….”
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적당한’ 집이라고?
“…대, 대체 몇 평짜리 집을 구하신 겁니까?”
“예? 몇 평이라뇨?”
“……?”
뭐야.
외국은 평수 말고 딴 거로 계산하나?
“저 아파트 전체를 구한 건데요?”
“예?”
뭐요 씨발?
“저, 저 아파트를 통째로 구하셨단 말씀입니까?!”
몇 평짜리 집이 아니라.
그냥 아파트를 통째로 구했다고?
심지어 그걸 나한테 선물로 준다고?
“네. 헤헤.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서울 중심부에 있는 30평대 아파트 하나면 해도 15억이 훌쩍 넘어가는데 아파트 전체를 통째로 사버렸다면 대체 얼마나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런 미친.’
이게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영향력을 지닌 콜그란데 가문의 재력이란 말인가.
꿀꺽.
오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뜨거운 시선으로 이사벨라를 응시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등을 떠밀었다.
“저… 이사벨라 양.”
성큼. 이사벨라에게 다가가 손을 꽉 붙잡았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오, 오진 씨…?”
발그레.
이사벨라의 뺨이 붉어졌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실 수 있습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