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1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19화
용이 잠드는 곳 (2)
꾸욱꾸욱.
상의를 벗은 등을 부드러운 손길이 압박한다.
등 주변에 뭉친 근육을 엄지로 꾹 누르자 짜릿한 쾌감이 전신에 퍼진다.
“자~ 고대로 팔 벌리고 있어. 마사지해 줄 테니깐.”
“…벌리라는 게 이런 의미였어?”
“히히. 왜, 야한 거라도 생각했냐?”
하은이 음흉하게 웃으며 날개뼈 부근을 빙글빙글 돌렸다.
“아니 뭐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 안 하는 게 더 비정상 아냐?”
“뭐, 그… 저, 정 그러면 쪼~금은 들어줄 수도 있고.”
얼굴을 붉히며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됐네요.”
“아니 왜.”
“그런 거 누나랑 안 어울려.”
오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은의 눈살이 좁혀졌다.
“안 어울리긴 뭐가 안 어울린다는 거야! 야, 이 누나가 길가만 걸어도 남자들이 침을 줄줄 흘려요 아주! 어제 장 보러 갈 때만 해도….”
“어떤 새끼야.”
“엉?”
“어떤 새끼가 누나보고 침 흘렸냐고.”
오진은 더없이 불쾌하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섬뜩한 살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지, 진짜 침을 흘렸겠냐?”
“아, 뭐야.”
살기가 사라졌다.
“하여튼 새끼… 깜짝 놀랐잖아.”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는 하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어쨌든. 얌전히 누워 있어 인마.”
하은이 다시 마사지를 재개했다.
“근데 갑자기 웬 마사지야?”
“아니 뭐….”
말끝을 흘리며 꾹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거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문장이 까끌하게 입천장을 간질였다.
“…그냥.”
이제까지 그에게 많은 걸 받았다.
받기만 해왔다.
도저히 갚지 못할 정도로 값진 것들을.
철없는 아이였을 때도, 처음 각성자가 됐었을 때도, 저주를 받아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
삶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오진에게 받아왔던 기억만 가득했다.
‘그에 비해.’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
아직 성(星)만 따지면 자신이 높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진은 이미 6성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찌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그는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으로 순식간에 멀어질 것이다.
‘하나도… 없어.’
돈?
이미 오진은 협회의 에이스로 여겨지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집?
이사벨라가 선물해준 집에 비하면 그녀가 마련해준 집은 다 허물어가는 판잣집이나 다름없다.
하다못해 맛있는 식사라도 챙겨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조악한 실력으로 매번 실패만 하고 있다.
그나마 생각을 쥐어 짜낸 거라고는 자학에 가까운 수련 일정으로 인해 지친 그에게 마사지를 해주는 것뿐.
그 정도야 자신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하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내렸다.
“누나?”
“어, 응?”
“왜 그래?”
“크흠! 암 것도 아냐 새꺄.”
꾸우욱.
엄지에 힘을 준다.
“아악! 그, 그만!”
“히히. 사내새끼가 엄살은.”
“엄살이 아니고 진짜 뒤질 것 같은데!!”
“얌전히 이 눈나의 손길을 받아들이렴.”
“크허억! 누나 나 죽어!!”
진짜 뒤져!!!
-꾸욱, 꾸욱.
하은의 손길이 등을 자극했다.
이걸 마사지를 받는 건지 고문을 받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띵동!
“응?”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지?”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곱슬기 있는 백금발 머리칼을 지닌 눈부신 미녀.
“헤헤. 안녕하세요~!”
봄바람처럼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밝게 인사했다.
이사벨라 콜그란데.
유럽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가의 영애이자 ‘로마의 성녀’라 불리는 각성자.
그리고.
오진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알 수 없는 여자.
“…여긴 왜 온 거야?”
하은이 가늘게 뜬 눈으로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후훗. 오진 씨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방긋.
이사벨라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구두를 벗었다.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하은이 말릴 새도 없이 거실로 도도도 달려갔다.
“어? 야, 야! 누가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오래?!”
“흐응.”
이사벨라는 가늘게 눈을 뜨며 거실에 상의를 벗은 채 누워 있는 오진을 내려다봤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땀에 젖은 채,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오진의 모습.
“…뭘 하고 계셨던 거죠?”
이사벨라의 눈빛에 서늘한 빛이 번뜩였다.
“그, 그냥 마사지 해주고 있었던 거야.”
“마사지? 마사지를 받는데 저렇게 돼요?”
“어… 음. 좀 빡시게 해주다 보니.”
하은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끄응. 죄송합니다. 흉한 꼴을 보여드렸군요.”
오진은 뻘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상의를 벗고 있었던 터라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과 가슴 근육이 훤히 드러났다.
“━아.”
이사벨라의 동공이 확장됐다.
“오, 오, 오진 씨 그… 옷을.”
파르르 어깨를 떨며 홍조를 띄웠다.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꿀꺽.
이사벨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뜨거운 시선으로 오진의 몸을 살폈다.
먹음직스러운 진미(珍味)를 눈앞에 둔 듯.
거친 콧바람을 뿜으며 연신 입맛을 다졌다.
“무슨 부탁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그 전에.”
이사벨라가 뺨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분명 전에 말을 편히 해주신다 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랬었지. 미안.”
“정말. 계속 이러시면 저 삐질 거예요?”
팔짱을 낀 채 흥, 콧바람을 내뿜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오진은 피식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성녀님.”
“앗! 또 그러신다!”
“하하. 농담이야.”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먼데?”
“음… 오진 씨는 던전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던전?”
던전.
게이트와 비슷한 곳이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게이트의 경우 한 번 열리면 일정 기간, 혹은 영구히 사라지지 않고 열려 있는 반면 던전에는 ‘클리어’라는 개념이 있었다.
즉.
던전 내의 보스를 처치하거나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닫혀버리는 일회용 게이트라는 것.
‘던전이라.’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다.
‘고등급 성유물이 잘 나온다 했던가.’
일반적인 게이트와 비교해 던전에서 고등급 성유물이 발견될 확률이 훨씬 높다 들었다.
심지어 클리어 보상이라는 것도 따로 주어지기 때문에 안에서 성유물을 얻지 못해도 쏠쏠한 이득을 가져갈 수 있다던가.
물론. 보상이 큰 만큼 던전 내부엔 강력한 괴수와 복잡기괴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던전은 왜?”
“이번에 백두산 쪽에서 던전이 하나 발견됐어요.”
“……!”
백두산이라고?
“…확실해?”
“후훗. 저희 가문에서 조사한 정보니 틀림없어요.”
“…….”
백두산에서 발견된 던전이라.
‘이신혁이 말했던 성유물이 숨겨진 장소인가?’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
백두산에 숨겨져 있다는 성유물.
때마침 발견된 던전.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긴 했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아.’
아직 위성교라는 조직이 등장하지도, 이우혁이 눈에 불을 켜며 위성교의 뒤를 쫓고 있지도 않은 시점이다.
벌써 숨겨져 있다는 성유물이 발견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면.’
오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래가… 바뀐 건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아는 미래가 있어야지 바뀐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오진 씨?”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호호. 좀 놀라신 것 같네요. 하긴, 던전이 그리 흔하게 발견되는 게 아니긴 하니까요.”
“그 던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을 노리는 집단이라거나….”
“으음.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일단, 던전에 대해 말한 건 오진 씨가 처음이에요.”
위셩교에 대해선 이사벨라도 모르는 건가.
‘아니지.’
이사벨라의 정체는 흑성회 3위 집행관.
거머리 여왕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위성교와 흑성회가 모종의 연결점이 있다면 일부러 숨기는 걸 수도 있겠지.
‘결국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나.’
쯧.
오진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래서 던전에 대한 정보를 나한테만 알려준 이유는 뭐야?”
“콜그란데 가문의 이름으로 오진 씨에게 던전 탐사를 정식으로 의뢰하고 싶어요.”
“던전 탐사?”
“예. 오진 씨는 협회에 소속되어 계시지만 용병처럼 따로 의뢰를 받고 일을 하신다고 들어서요.”
“그건 맞긴 한데.”
던전 탐사라.
‘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던전 안에서 이신혁이 말했던 성유물을 찾을 수도 있었고, 설사 찾지 못했다 해도 던전의 막대한 보상을 생각하면 가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의뢰금은 대충 이 정도에요.”
그녀가 수표 한 장을 쓱 내밀었다.
‘워매 씨벌.’
대체 0이 몇 개야 이거.
“이 정도면 8성급 각성자를 둘… 아니면 셋은 고용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은 이제 막 6성에 올라온 각성자.
세계적인 루키라 불리고 있지만, 결국 루키는 루키일 뿐이다.
“헤헤. 전 ‘성’만 높은 분들보단 오진 씨가 더 믿음직스러운걸요?”
이사벨라가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힘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성만 따지면 아직 6성에 불과하지만, 어지간한 8성급 각성자는 그에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는 것을.
‘하긴 모르는 게 말이 안 되지.’
이탈리아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려 9성급 각성자를 손짓 한 번에 도륙 내는 강자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좋아. 의뢰를 받을게.”
“얏호! 오진 씨랑 처음으로 같이 파티를 꾸리게 됐네요!”
“…엥?”
뭐야.
같이 가는 거였어?
“어딜 멋대로 오진이랑 파티를 짜려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하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괜히 가서 우리 오지니 발목 잡지 말고 빠지시지?”
“어머, 저도 실력엔 나름 자신 있는데.”
“헹. 너 몇 성인데? 엉?”
“6성이에요.”
“6성? 꼴~랑 6성 주제에 우리 오지니랑 파티를 맺으려고 해?”
“오진 씨도 6성 아닌가요?”
“그건 그거고!!”
하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네가 가면 나도 갈 거야.”
“하은 씨에게 줄 보수까진 없는데.”
“오지니 꺼 반띵하면 돼.”
누구 맘대로요.
“…그만들 싸우고.”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은과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미치겠네.’
마음 같아선 혼자 가고 싶었지만, 둘 중 누구라도 떨어트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아.”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서 같이 가자.”
양손에 꽃이 아니라 무슨 반물질 폭탄을 쥔 기분이지만.
어쩌겠는가.
‘내 인생이 이렇지 뭐.’
M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