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2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23화
용이 잠든 곳 (6)
“뭐라…?”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가득 찬 시선이 오진을 향했다.
“자네가 거머리 여왕의 지아비라고?”
“그래.”
천도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 전, 아들에게 들었던 한 정보가 머리를 스쳤다.
-거머리 여왕이 뇌랑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네요.
설마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게 ‘먹잇감’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서였다니.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오진을 노려봤다.
흔들리지 않은 시선, 규칙적인 숨소리, 담담하게 일(一)자를 그리고 있는 입술.
천도윤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거짓말이 아니다.’
‘왕’이라 불리며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렸던 그는 타인의 표정과 몸짓, 눈빛만으로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는 뛰어난 눈썰미를 지니고 있었다.
오랜 시간 쌓여온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청년은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고.
‘애초에 뇌랑이 이사벨라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던 시점에서 거짓일 수가 없지.’
이사벨라가 누구보다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 흑성회 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
그녀의 정제를 알고 있는 시점에서 둘 사이에 깊은 관계가 오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홀홀홀! 그 피에 굶주린 마녀에게 남자라니… 자네도 참 불쌍하구만.”
“불쌍하긴, 이사벨라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잘해주는 건 사실이다.
“홀홀홀! 과연 그게 얼마나 오래 가리라 생각하는가? 마녀의 관심이 식는 순간 자네는 그녀의 한 끼 식사가 될 게야.”
“아까부터 혓바닥이 좀 기네. 그래서 죽일 거야 말 거야?”
“…….”
천도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뇌랑의 말 대로 그가 거머리 여왕의 남편이라면, 섣부르게 손을 댈 순 없었다.
“홀홀홀. 어차피 마녀의 관심이 꺼지면 죽게 될 테니 내 손으로 직접 죽일 필요는 없겠지.”
“새끼 쫄려서 못 죽이는 거면서 아가리는 존나 터네.”
“…….”
“뭐, 됐다. 그래서 그게 용의 심장이냐?”
오진의 시선이 천도윤의 손에 쥐어진 푸른 구체를 향했다.
거대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보는 것처럼 반투명하게 빛나는 구체.
사과 정도 크기의 구체에서는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용의 심장이라는 것 치곤 엄청 작네.’
저 정도 크기면 심장은커녕 용의 코딱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작았다.
물론 크기만 작을 뿐.
느껴지는 마력 자체는 ‘심장’이라 불리기 충분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용의 심장에 관심이 있는 게냐?”
“없으면 던전에 들어왔겠어?”
“홀홀홀!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지만… 용의 심장은 넘겨줄 수 없다.”
천도윤은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손에 쥔 푸른 보석을 쓰다듬었다.
“그래. 너 가져라.”
오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
시원함을 넘어 싸늘하기까지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천도윤이었다.
“용의 심장을 노리고 던전에 들어온 게 아닌 게냐?”
“그랬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미련 없이 포기하는구나.”
“왜? 포기 안 하면 조금 떼주기라도 하게?”
오진은 코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와서 용의 심장을 얻지 못한 건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미 천도윤의 손에 넘어간 용의 심장을 억지로 뺏을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이사벨라의 이름을 팔아도 병신이 아닌 이상 용의 심장을 넙죽 내주진 않겠지.’
천도윤보다 먼저 도착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용의 심장을 손에 넣는 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이사벨라의 이름을 팔아 목숨이라도 부지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상황.
‘아쉽긴 하지만 여기선 포기하는 게 맞아.’
팔도 한 짝 움직이지 않고, 베가조차 없는 상황에서 천도윤과 싸울 수는 없었다.
“홀홀홀. 그래도 주제 파악을 못 할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닌 모양이구나.”
천도윤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손에 쥔 용의 심장을 소중하게 품속에 넣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거머리 여왕에게 가서 전하거라.”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오진을 노려봤다.
“━계속 그렇게 검은 별의 뜻을 거슬렀다가는 머지않아 ‘그분’의 손에 갈가리 찢길 거라고.”
“…….”
그분이라.
천도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또 있었던 건가.
-파드드득!
천도윤의 몸이 검은 깃털로 변해 사라졌다.
-띠링!
[‘용이 잠든 곳’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을 달성한 각성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72시간 후 게이트의 입구가 완전히 폐쇄됩니다.]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메시지창.
당연하지만, 클리어 조건을 달성한 각성자는 자신이 아닌 천도윤이었기에 보상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72시간이라.”
게이트 폐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오진은 푸른 수정을 이뤄진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역시, 위성교랑 흑성회 사이에 확실한 연결점이 있어.’
이신혁의 기억을 통해 얻은 정보로는 백두산에 숨겨진 성유물을 노리는 건 ‘위성교’라는 단체였다.
하지만 정작 던전 안에서 마주친 것은 위성교가 아닌 흑성회.
단순히 미래가 바뀌었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두 조직 간에 유사점이 너무 많았다.
‘흑성회가 미래에 위성교로 이름을 바꿨다고 치면.’
이신혁이 기억하고 있는 1회차 세계와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간에 시간대가 어긋나 있다.
‘아직 이름을 바꾼 상태가 아닌데도 놈들은 성유물을 노리고 움직였어.’
흑성회가 위성교로 이름을 바꾸는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위성교가 아닌 흑성회의 이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간대가 어긋난 거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았다.
‘유진과 아샤드 칸의 죽음. 최소 2년 후까지 살아 있었을 천우성을 죽인 것.’
원래는 흑성회가 가져야 했을 성유물을 흡수한 것과 서울역 아래 잠들어 있는 괴물을 처리한 것까지.
이제까지 그가 해왔던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나비효과처럼 미래에 영향을 줬을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이제 그럼 이신혁의 기억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는 건가.’
미래가 바뀌기 시작한 이상.
이신혁이 기억하고 있는 1회차 세계와 전혀 다른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어느 정도 지표는 될 수 있겠지만.’
예전처럼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후우.”
이신혁이 죽고 자신이 회귀자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부터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지도 없이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막막했다.
어쩌면 지금부터는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회귀자를 연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닌가.
오히려 1회차의 세계와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면, ‘역천의 별’이 존재할 이유 자체가 없다.
‘일단 지금은 누나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하러 갈까.’
마지막에 베가가 떨어지는 하은을 안아 드는 것을 봤으니 크게 다쳤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
오진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뗐다.
-꾸르르륵.
“음?”
의식하지도 않은 사이.
등 쪽에서 빠져나온 검은 먹구름이 끈적하게 동굴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녹은 치즈가 늘어나듯 동굴 벽과 오진의 등 사이에 먹구름이 이어졌다.
‘뭐야?’
이렇게 멋대로 흑천의 구름이 빠져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오진은 몸을 돌려 푸른 수정으로 이뤄진 동굴 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꾸륵, 꾸르르륵!
손바닥에서 빠져나온 흑천의 구름이 동굴 벽에 달라붙었다.
━그래.
마치 먹잇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푸른 수정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혀로 핥듯이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 전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용들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 용맥이 가장 짙게 흐르는 장소에서 자신의 마력을 심장에 가둬 결정으로 만든다고 전해진다.
“용맥이 가장 짙게 흐르는 장소….”
오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공동.
그 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푸른 수정들.
‘설마.’
오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굴 벽에 손을 댄 채, 정신을 집중했다.
-꾸르르르륵!!
하얀 종이에 검은 잉크를 쏟아부은 것처럼.
푸른 수정으로 이뤄진 동굴 벽을 흑천의 구름이 뒤덮기 시작했다.
넓게 퍼져나간 먹구름이 푸른 수정 안에 깃든 마력을 흡수했다.
“이런 미친.”
오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리 흑천이라고 해도 설마 용맥 자체를 흡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
댐이 무너지듯.
한껏 불어난 강물이 격류가 되어 쏟아져 내리듯.
무시무시한 마력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커헉!”
오진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양이 많다, 라고 표현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제기랄…!’
붙잡힌 흑성회원들에게 마력을 흡수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득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흑천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어쩌면.
천도윤이 가져간 ‘용의 심장’안에 깃들어 있는 마력보다도 많은 마력들이.
‘멈춰! 그만, 들어와…!’
오진은 입술을 짓씹은 채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풍선 안에 한계까지 바람을 집어넣는 것처럼.
터질 듯이 몸 안을 휘젓고 있는 마력을 조금씩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큰 건… 안 들어 온다고!!!!!”
어라.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기분이 X같은데.
“크으으으으으윽!!!!”
필사적으로 흑천을 거둬들이려고 했지만.
흑천은 굶주린 야수가 날고기를 씹어먹듯 용맥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진정, 해, 이 새끼야…!”
오진은 흑천의 먹구름을 노려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진짜 말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탐욕스럽게 용맥을 흡수하던 흑천의 기세가 아주 살짝 줄어들었다.
‘지금!’
오진의 눈이 반짝였다.
“흐아아아아아아!!!!”
거친 포효를 내지르며 용맥에 달라붙어 마력을 흡수하고 있던 흑천을 다시 몸속으로 거둬들였다.
꾸르르르르륵!!
흑천의 마지막 한 점의 마력까지 빨아먹겠다는 듯 용맥의 마력을 흡수하면서 오진의 몸속으로 돌아왔다.
-띠링!
[‘개천(開天)’의 일부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Ευχαριστώ που ψάχνατε, έγραψα οτιδήποτε]개천의 조건이 달성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읽을 수 없던 글자들이 뒤틀리고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Ευχ𝌖𝌜𝌘τώ που ψάχ𝌵𝍑τε, έγραψα ο𝌜𝌘𝌱ποτε] [𝌜𝌘αριστώ π𝌱𝌵υ ψάχνατε, έ𝌘𝌱𝌵α οτιδή𝌘𝌱𝌵ε] [𝌜𝌘𝌱𝌵𝍑ώ π𝌖𝌜𝌘υ ψά𝌘𝍑𝌒τε, έ𝍑αψα οτι𝌖𝌜𝌘οτε]치지지직.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흩어지는 글자들.
난잡하게 흩어지던 글자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게 맞춰진 하나의 문장.
여전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힌 글귀가… 변했어.’
오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메시지창에 떠오른 알 수 없는 문장을 빤히 바라봤다.
그 문장에 담긴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기 전에,
-띠링!
[‘용맥’의 마력을 성공적으로 흡수했습니다.] [경고!] [흡수한 마력의 양이 너무 막대합니다!] [흑천의 개화 단계에 따라 용맥의 마력이 제한됩니다.]용맥의 마력이 제한된다는 말과 함께 터질 듯이 몸속에 휘몰아치던 마력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하아! 하아!”
오진은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거침 숨을 토했다.
“미친….”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전등의 스위치를 끈 것처럼.
거대한 공동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푸른 수정들은 더 이상 빛나고 있지 않았다.
“진짜… 용맥을 통째로 먹어치워 버렸잖아.”
오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 * *
[‘용이 잠든 곳’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을 달성한 각성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72시간 후 게이트의 입구가 완전히 폐쇄됩니다.]“흐응.”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며.
백금발의 여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역시, 생각대로네요.”
이사벨라는 던전 바닥에 떨어진 둥그런 패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에 새겨진 뱀의 문양.
“올빼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던 건… 그자였군요.”
섬뜩한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손에 쥔 패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