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2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24화
용이 잠든 곳 (7)
“마력… 자체는 큰 변화가 없네.”
흑천의 개화 단계에 맞춰 용맥의 마력이 제한된다는 얘기 때문일까.
용맥을 통째로 흡수했음에도 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라진 건 아냐.’
느껴진다.
불어난 강물처럼 사납게 흐르던 마력의 격류가.
마력을 다루는 재능 하나만큼은 베가마저 경악시켰던 그조차 감히 다룰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의 응어리가.
흑천으로 흘러 들어간 용맥의 마력은 검은 먹구름 속에 똬리를 뜬 채 고고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뭐… 이걸 어떻게 다룰진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누나부터 찾아야지.’
베가가 붙어 있는 이상 크게 다쳤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사냥개자리의 성흔.’
콧속으로 밀려드는 무수한 냄새들.
“크으….”
머리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오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의 냄새들이 밀려들다 보니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사용하다 보면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곤 했다.
‘찾았다.’
익숙한.
언제나 곁에 함께 있던 냄새.
하은의 냄새를 뒤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져내린 던전 바닥을 계단처럼 밟고 내려갔다.
‘음?’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하은의 냄새와는 다른, 봄바람처럼 포근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오, 오진 씨?””
그곳에는 기절한 하은을 부축하고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무, 무사하셨군요!”
화악!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에게 다가오다가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오진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포션으로 응급조치만 취한 오른팔을 젖은 걸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어깻죽지 부근은 팔이 잘렸을 때 쏟아져 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오진 씨, 그 팔….”
“안에서 싸움이 좀 있어서 말이지.”
“어, 어떻게!”
이사벨라가 허둥지둥거리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이다.
“괜찮아. 응급조치는 했으니깐.”
“잠시만요.”
이사벨라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찬란한 금빛이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양자리의 성좌 아리스여, 그대의 어린 양에게 치유의 빛을 내려주소서.”
꽤나 진중한 모습으로 주문을 읊는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선 실소가 흘러나오는 모습이었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우우우우웅!
축 늘어진 오른팔을 황금빛이 감싸자 한결 움직임이 수월해졌다.
“고마워.”
오진은 오른팔을 살짝 들어 올려 흔들었다.
“다행이네요.”
이사벨라는 안도에 찬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오진의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만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핏물 범벅이 된 오른팔 어깻죽지를 손으로 조물거렸다.
“…….”
만지작만지작.
“이사벨라?”
만지막만지작만지막만지작만지막만지작만지막만지작.
“하아, 하아… 꿀꺽.”
뜨거운 시선으로 핏물에 젖은 어깻죽지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붉은 입술을 분홍빛 혀가 야릇하게 훑었다.
베베 몸을 꼬며 핏물에 젖은 어깻죽지를 소중한 보물을 쓰다듬듯 손으로 매만졌다.
“저… 이사벨라 씨?”
뭐야 씨발.
존나 무서워.
“아…! 죄, 죄송해요!”
정신없이 입맛을 다시며 피에 젖은 어깻죽지를 바라보고 있던 이사벨라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치료가 잘됐나 잠깐 확인했어요.”
“어, 응.”
어딜 어떻게 봐도 치료가 잘 된 걸 확인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여기선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누나는?”
“하은 씨는 무사하셔요.”
이사벨라는 부축하고 있는 하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기절한 하은에겐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본녀만 믿으라 하지 않았느냐.]뾰로롱.
은빛 가루가 흩날리며 하은의 주머니 속에서 빼꼼 베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은을 지키기 위해 힘을 많이 쓴 탓인지 베가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
“고마워 베가.”
[무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라. 그나저나… ‘용의 심장’은 어디에다 두고 온 게냐?]베가가 두리번거리며 오진을 살폈다.
용의 심장을 손에 넣고 던전을 클리어한 게 당연히 오진일 것이라 믿고 있는 모습.
오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고 온 게 아니라 뺏겼어.”
[뭐, 뭐라? 그, 그대가 던전을 클리어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응.”
[그런….]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던지 베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흑성회가 있었어.”
오진은 밤 사냥꾼들과 싸웠던 일과 천도윤을 만났던 일들을 짧게 설명했다.
“흐, 흑성회라면 얼마 전에 한국에서 테러를 일으켰던 조직을 말씀하시는 거죠? 뉴스에선 모두 붙잡혔다고 그랬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놈들의 수뇌부는 안 잡혔거든.”
“그런….”
“뭐, 어쨌든 미안 여기까지 와서 허탕을 치게 됐네.”
“아니에요. 오진 씨가 무사하신 것만으로 다행이에요.”
이사벨라가 품속에서 통신용 구슬을 꺼냈다.
“언제 흑성회가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까 바로 헬기를 부를게요.”
“엉.”
투두두두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지 헬기는 금방 도착했다.
오진은 기절한 하은을 안아 들고 헬기에 올라탔다.
“의뢰 보수금은 조만간 오진 씨 계좌로 보내드릴게요.”
“던전을 클리어하지도 못했는데?”
“헤헤. 그래도 여기까지 와주셨잖아요. 당연히 드려야죠.”
“음… 알았어.”
뭐,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도 없다.
“이번엔 좀 아쉽게 됐지만… 나중에 또 오진 씨에게 의뢰를 맡겨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환영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여인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보내는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 진심이라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만 해도 도움이 됐고 말이지.’
자신에게 아무리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밑도 끝도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어서 상대방을 속일 순 없었다.
이번에 천도윤이 속은 것도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어딘가에서 입수했기 때문이리라.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오진 씨.”
헬기를 타고 서울에 다시 도착한 후.
이사벨라는 손을 저으며 떠났다.
“흣차.”
오진은 하은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밖으로 나오니 베가가 뾰로롱 허공을 날아 다가왔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느냐? 그대가 말한 위성교라는 조직이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거늘.]“시간대가 변했어.”
[시간대가 변했다면….]“원래 놈들이 백두산에 숨겨진 성유물을 노리건 못 해도 몇 개월 이후의 일인데… 그게 앞당겨졌어.”
[시간대만 바뀐 게 아니지 않으냐?]그녀의 말마따나, 시간대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성유물을 노린 조직이 위성교에서 흑성회로 바뀌었으니까.
“그건 내가 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흑성회가 위성교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 같아.”
[이름을 바꾼다고?]“내가 전에 흑성회가 뭔지 잘 모르겠다 했었지?”
[으음. 그때 분명 짐작 가는 게 있다고만 얘기했던 것 같구나.]베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흑성회가 아니라 위성교였거든.”
이렇게 되면 자신이 흑성회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아아, 그렇게 된 것이로구나.]베가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그대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제 막 초보 딱지를 뗀 각성자였을 테니… 흑성회가 위성교로 이름을 바꾸기 전을 아예 몰랐던 게로구나.]“그렇지.”
사실 이름을 바꾸기 전이건 이후건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전에 내가 천마가 이끌던 조직이 있었다고 했지? 그게 바로 위성교야.”
[하지만 지금 그들은 천마가 아닌 검은 별들을 섬기고 있지 않으냐?]“아직 천마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
[그렇다면….]베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오진에게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하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
[천마가 나타나면서부터 그들이 흑성회에서 위성교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게로구나.]“아마도.”
실제 천마로 인해 그들의 이름을 바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베가에겐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두는 편이 앞뒤가 맞았다.
‘어차피 나중에 언젠가는 천마가 나타나야 하니까.’
자신이 흑천을 지닌 존재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선 다른 누군갈 천마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베가한테 들키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야.’
베가와 이 정도까지 깊은 관계가 됐다면, 설사 자신이 흑천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해도 바로 손바닥 뒤집듯 모가지를 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를 제외한 다른 성좌들.
흑천이 모든 성좌들을 먹어치우리란 예언이 존재하고, 성좌들이 그걸 굳게 믿고 있는 이상 흑천의 존재만큼은 절대 들통나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철저하게 회귀자를 연기할 필요가 있지.’
흑천의 어둠에서 세상을 구원할 역천의 별.
그 역천의 별이 흑천의 주인이라 의심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있겠는가.
자신이 역천의 별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수록 성좌들은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그럼 큰 문제가 아니더냐. 귀한 성유물이 미래에 천마를 섬기는 세력의 손에 넘어가 버렸으니….]“되찾아야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지만, 순순히 천도윤에게 용의 심장을 건네줄 생각은 없었다.
[방법은 있느냐?]“아직은.”
이우혁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한 상대에게 용의 심장을 빼앗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없다면 만들면 될 뿐.
이사벨라를 이용하건, 자신이 천도윤을 이길 정도로 강해지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의 심장을 손에 넣으리라.
[하아. 벌써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모르겠구나.]“앞으로 더 내가 알던 미래와는 달라지겠지.”
오히려 좋다.
어차피 처음부터 미래 따윈 알지도 못했으니까.
이제부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을 때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쓸만한 변명거리가 하나 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예기치 못한 위험에 빠질 일도….]“걱정하지 마. 애초에 미래를 바꾸기 위해 돌아온 거잖아?”
방긋 미소를 지으며 걱정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네가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미래로 만들 거야.”
[나의 아이야….]베가는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오진의 어깨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거라. 그 사악한 자들이 용의 심장을 가져가서 뭘 할지 알 수 없으니.]“알았어.”
안 그래도 한동안은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그럼 본녀는 이만 가보겠느니라. 이번에 힘을 많이 썼더니 제약이 심해지고 있구나.]“응. 나중에 봐.”
베가가 펜던트 속으로 돌아갔다.
“후우.”
베가가 돌아간 후, 오진은 낮은 숨을 토해내며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운 하은을 내려다봤다.
망가진 의족을 그녀의 다리에서 빼냈다.
‘다시 새 걸로 주문해야겠네.’
휑하니 빈 그녀의 오른 다리를 감추듯.
이불을 끌어 하은에게 덮어줬다.
* * *
-흐응. 거머리 여왕에게 남자가 생겼다고요?
“예. 뇌랑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 피에 굶주린 마녀에게 남자라… 믿기 어렵네요.
뱀의 문양이 새겨진 패가 검은빛으로 점멸하며 실소 섞인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어쨌든. 축하합니다. 그쪽으로 거머리 여왕이 향했다 들었을 땐 조금 걱정했는데 무사히 용의 심장을 손에 넣으셨군요.
어딘가 열띤 광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홀홀홀. 이게 다 뱀자리의 여왕께서 앞길을 밝혀준 덕분입니다.”
천도윤은 뱀의 문양이 새겨진 패를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전 그저 천마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렸을 뿐이죠.
“그분께서는 어찌 지내….”
-호호. 도윤 씨.
기이한 열기를 띠던 목소리가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쉿.
“……!”
흠칫!
천도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뱀자리의 여왕이시여.”
-후훗. 누구나 다 실수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다른 하나도 잘 찾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미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뒀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차갑게 식었던 목소리가 다시 열기를 띄었다.
-그럼 도윤 씨를 믿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파각!
검은빛을 내뿜던 뱀 문양의 패가 산산이 박살 났다.
“후우.”
천도윤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쥔 푸른 구체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심장을 손에 넣었으니….”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을 한 장 집어 들었다.
네모난 사진 속에는 적갈색 머리칼을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눈을 손에 넣을 차례군.”
홀홀홀.
기괴한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