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2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27화
낮에 지는 밤 (3)
“통짜 성유석으로 만들어서 전보다 훨씬 튼튼할 겁니다.”
“흐응. 그래?”
하은은 한 부장이 건네준 의족을 다리에 찼다.
과연 비싼 값을 하는 모양인지 부드러우면서도 든든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오오.”
탄성을 내뱉으며 제자리에서 점프를 뛰었다.
전에 사용하던 의족도 상당히 편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시후 군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거든요.”
“그 성유물 만들 줄 안다는 꼬맹이?”
“예.”
“오진이한테 듣긴 했는데 확실히 실력이 좋네.”
“뭐 조금 기분파이긴 합니다만… 실력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 없죠.”
흐뭇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한 부장의 입가에 지어진 아빠 미소를 바라보며 하은이 피식 웃었다.
“그 꼬맹이랑 사이 좋나 봐?”
“아, 뭐… 이래저래 엮일 일이 많아서요.”
“히히. 여튼 그 꼬맹이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하은은 오른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환하게 웃었다.
뭐, 당연히 진짜 다리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지만, 이 정도면 오진과 함께 거리를 거니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헤헤헤.”
조금 있다가 그와 만날 생각에 하은의 입가에 절로 실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
밥 먹고 난 다음에 어디로 놀러 갈까.
신나게 놀고 난 다음에 어디 분위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야지.
‘새끼, 당황할 게 벌써 눈에 훤하네.’
오진은 짓궂어 보여도 은근 쑥맥인 구석이 있었다.
분위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 조금만 어필해 줘도 어쩔줄 몰라 하며 당황하리라.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 부장이 헤실헤실 웃고 있는 하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히. 그런 게 있어.”
“으음.”
한 부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나 간다! 의족 고마워 고릴라 아조씨!”
“고, 고릴라라뇨!”
“캬하핫! 넝담이야, 넝담.”
하은이 붕붕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협회 밖으로 나섰다.
“어디 보자… 식당은 어제 예약했고.”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
‘오진이 자식 선물이라도 살까?’
이제까지 쭉 받기만 해왔으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선물이라… 뭐가 좋으려나.”
하은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최근 지갑 사정이 꽤 넉넉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사벨라처럼 아파트를 통으로 선물해준다거나 하는 미친 짓을 할 정도의 여력은 없었다.
‘오지니에게 필요한 걸 선물해 주자.’
그가 받고 기뻐할 만한 물건.
적당히 실용성 있으면서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것.
“…트레이닝복이라도 사줄까?”
최근 매일 같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으니 좋은 트레이닝복 하나 사주면 딱일 것 같았다.
“좋아.”
하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트레이닝복 중 비싸기로 유명한 메이커에 들어가 몇 분을 둘러보다 오진에게 쏙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의 운동복을 하나 발견했다.
“요거 괜찮냐… 요?”
영 어색한 존댓말로 물었다.
“아, 네! 해당 제품은 각성자 전용으로 만들어진 트레이닝복이며 엄청난 내구성과 편안한 착용감을 자랑하는….”
무슨 기계의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트레이닝복에 대한 정보가 줄줄 흘러나왔다.
귀담아듣던 하은은 설명이 끝날 생각을 하지 않자 약간 질린 표정을 지으며 점원의 말을 잘랐다.
“그럼 이거 라지 사이즈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해당 제품이 가격이 좀… 많이 나가는데 괜찮으신가요?”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진을 위한 선물이다.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돈이 아까울 리가 없었다.
“그럼 782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더럽게 비싸긴 하네.
하은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키며 카드를 내밀었다.
‘어디 그럼.’
그렇게 오진에게 줄 선물까지 산 하은은 들뜬 발걸음으로 예약한 가게로 향했다.
아직 약속 시각이 많이 남았지만, 근처 카페에서 시간이라도 보내며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흐흐흥~♪”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
오랜만에 그와 데이트를 즐길 생각에 입가에 번진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준비는 완벽해!’
이날을 위해 인터넷에서 ‘연하남에게 먹히는 고백 방법’만 수백 가지를 찾아 익혔다.
15900원짜리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어플까지 다운받아 클리어했을 정도.
‘이번 기회에 누나 동생 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거야.’
그럼 그가 자신의 곁을 훌쩍 떠나버릴 거라는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들 것 같았다.
“근데….”
들뜬 발걸음이 갑작스럽게 뚝, 멈췄다.
트레이닝복이 든 쇼핑백 끈을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 혹시 차이면 어떻게 하지…?”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에 얼음 가득한 찬물을 확 들이부은 듯한 감각.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때는 고려하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미안. 나 누나가 여자로 보이진 않아.
차갑게 식은 오진의 목소리.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송곳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아, 안 돼!’
만약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러고 보니 친남매 사이에 연애 감정이 들지 않는 이유도 어렸을 적부터 쭉 같이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기 때문에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니.
적어도 그녀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만, 오진이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아으으으으!”
하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개자식… 차기만 해봐라, 거기를 확 잡아 뜯어버릴 거야 아주.”
방황하던 하은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오진이 용마안을 선물해 줬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눈을 뜨나 감으나 머릿속엔 그의 생각만 가득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삶은 오진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찬다고?’
용납할 수 없었다.
악을 쓰든 땡깡을 부리듯 확 덮쳐 버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와 맺어지리라.
“후우.”
긴장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하은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예약한 식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어?”
하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오전 11시의 대로.
사람이 많이 다닐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했다.
“…….”
하은은 슬며시 표정을 굳히며 주먹을 쥐었다.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고 있던 도중,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검은… 깃털?”
눈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검은 깃털을 발견한 순간.
-파드드드득!
눈처럼 떨어져 내리던 검은 깃털이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크읏!!”
하은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강력한 불길이 전면으로 쏟아졌다.
“크윽!”
그녀의 불길에 휩쓸린 괴인들이 침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너희 뭐야?”
“…….”
“헤에, 대답 안 하시겠다?”
하은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달칵, 안대를 풀었다.
사납게 번들거리는 파충류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다.
“어디 아가리를 지져지고 나서도 계속 다물고 있을지 보자고.”
거칠게 발을 구르며 양팔을 교차했다.
그녀의 팔을 타고 똬리를 튼 두 마리의 화룡이 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크읏!”
“마법사 계열이다! 쫄지 말고 근접해서 제압해!”
숫자는 10명 정도일까.
하은을 둥글게 둘러싼 괴인들이 검은 깃털을 쏘아내며 빠르게 접근했다.
‘전에 오진이가 말했던 밤 사냥꾼들이 이 자식들인가?’
하은은 괴인들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검은 깃털을 무기처럼 사용하는 각성자는 그녀가 알기로 올빼미자리 파벌 외에는 없었다.
‘흑성회가 날 왜 노리는 거지?’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새끼들 예쁜 건 알아가지고 눈 뒤집혀서 달려드네.”
확실한 건 그들이 좋은 목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라는 사실.
-빠악!!
“커허어억!!”
하은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빙글 몸을 돌리더니 뒤에서 달려드는 올빼미의 가랑이 사이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올빼미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뜨더니 괴성을 지르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누가 마법사 계열이면 근접전이 약하데?”
하은은 양 주먹에 화염을 두른 후 낮게 허리를 숙였다.
파앙!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파동음과 함께 불꽃이 폭발했다.
-화르르르륵!
“아아아악!”
“크윽! 빌어먹을 년이!!”
“너는 아무리 빌어도 못 먹어 새끼야.”
하은은 달려드는 올빼미 하나의 인중을 후려치며 오른팔을 넓게 휘둘렀다.
화르르르륵!
부채꼴로 퍼진 화염이 올빼미들을 휩쓸었다.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압도적인 화력에 올빼미들이 쩔쩔매며 뒤로 물러났다.
“어디서 별 같잖은 새끼들이 나대고 있어?”
하은은 사납게 그들을 몰아붙였다.
사실 그녀가 아무리 영약을 먹고 강해졌다 하더라도 올빼미 파벌의 정예들을 상대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었지만.
‘이 자식들… 제대로 공격을 안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올빼미들은 소극적으로 견제기만 날릴 뿐 위협적인 공격은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야.’
자신을 멀쩡히 제압하려 하는 것이다.
하.
하은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짜식들아.”
한층 더 거칠게 공격을 뿜어내며 밤 사냥꾼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이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홀홀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길한 웃음소리.
“크읏!!!”
하은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숙여 바닥을 굴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검은 깃털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뭐, 뭐야?”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었던 공격.
하은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오른쪽을 돌아봐도, 왼쪽을 돌아봐도 기괴한 웃음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은이 다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위!’
고개를 들어 올린 곳에는 검은 깃털 한 장을 밟은 채 유유히 허공에 떠올라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오래된 소나무처럼 주름진 피부.
정갈하게 다린 도복을 입고 있는 것과 달리, 노인의 눈에는 짙은 탐욕의 빛이 가득했다.
“아주 좋은 눈을 하고 있구나.”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를 올렸다.
“홀홀홀. 이 정도로 용안이 완벽하게 개화한 각성자는 찾기 힘들지.”
“누구야 너….”
“누군지가 중요한가?”
“…….”
하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의 말마따나,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하려는지가 중요할 뿐.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경보음이 저 노인은 위험하다 외치고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다급히 몸을 돌리려 했을 때.
“홀홀홀. 어딜 가려는 게냐?”
“허업!”
눈 깜짝 사이에 코앞에 나타난 노인.
주름진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걸렸다.
“자아, 얌전히 있거라.”
노인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탁.
가볍게 하은의 이마를 터치했다.
“━아.”
하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식이 검게 점멸했다.
* * *
“아으….”
지끈거리는 두통.
하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뭐, 뭐야?”
어딘지 알 수 없는 넓은 공터.
아까 전에 자신을 습격했던 올빼미들이 둥글게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익!”
찰그락! 찰그락!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쇠사슬에 묶인 몸은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홀홀홀. 정신을 차린 게냐?”
노인이 기괴한 웃음을 소리를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은은 날카롭게 눈을 뜨며 노인을 노려봤다.
“천도윤. 너 천도윤 맞지? 올빼미의 왕인가 뭔가 하는 새끼.”
“홀홀홀 잘 알고 있구나.”
“날 뭐 인질로 쓰려고 붙잡은 거냐?”
하은은 불안에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물었다.
“인질? 홀홀홀 아니라네.”
“…아니라고?”
그럼 굳이 올빼미의 왕이 직접 움직이면서까지 자신을 노릴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아아, 몇 번을 봐도 아름다운 눈이로군.”
“뭐?”
노인의 주름진 손이 하은의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
등골을 타고 쫙 퍼지는 소름.
“이 미친 새끼가 뭐 하는 짓거리야!!”
하은이 사납게 몸을 비틀며 외쳤다.
“홀홀홀. 날뛰지 말 거라.”
탁.
노인이 하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우드드드득!
섬뜩한 파골음과 함께 그녀의 왼쪽 어깨가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아아아아악!!”
하은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왼쪽 어깨를 통해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
숨 막힐 듯 퍼지는 공포를 억누르며 천도윤을 향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이 변태, 늙은이 새끼가… 감히 누굴, 만져…?”
자신의 몸을 만질 수 있는 건 오진 외에 없다.
“홀홀홀. 괜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분명 이 다 죽은 늙은이조차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아해긴 하다만.”
노인의 눈이 탐욕에 번들거렸다.
“내가 노리는 건 네 몸이 아니란다.”
“…그럼 대체.”
“용안. 네 눈을 내게 다오. 그러면 무사히 풀어주도록 하마.”
“……!”
하은 몸이 흠칫 떨렸다.
“그, 그게… 무, 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네 눈알을 뽑아━ 이 늙은이에게 주면 된다.”
“닥쳐 이 미친 새끼야!!”
“홀홀홀. 어리석은 아이로구나. 목숨보다 눈이 소중한 게 아니거늘.”
노인은 쯧쯧 혀를 차며 하은의 왼쪽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싫다면 억지로 뽑아가도록 하마.”
“아….”
하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참기 힘든 공포가 독처럼 퍼졌다.
“우선은 왼쪽부터. 오른쪽은 아직 개화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같이 받아가 두도록 하마.”
노인은 탐욕에 가득 찬 눈으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봤다.
하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눈을… 뽑아간다고?’
다시.
끝없는 밤 속에 버려지게 되는 걸까.
“시, 싫어.”
어둠이 걷혔을 때 보았던 오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는 전율을 기억한다.
기껏 다시 오진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이토록 허망하게.
눈을 뺏길 수는 없었다.
“싫어…!!!”
“홀홀홀. 반항해 봤자 의미 없다.”
노인의 손이 그녀의 왼쪽 눈가에 닿았다.
탐스러운 보물을 만지듯 눈가를 쓰다듬던 불쾌한 손이 눈알에 살짝 닿았다.
“아, 아으, 아.”
공포가.
참을 수 없는 공포가.
견딜 수 없는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시, 싫어… 제, 제발. 제발… 하지, 마.”
다시 어둠 속에 갇히게 될 거란 공포보다.
이 사실을 알게 될 오진이 절망할 걸 상상하는 게 두렵다.
하은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홀홀홀. 얌전히 있거라.”
“제발… 제발 하지 말아주세….”
그녀의 애달픈 애원이 허망하게 울려지고 있을 때.
콰자자자자작!!!
한 줄기 벼락이.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에서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