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3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33화
낮에 지는 밤 (9)
약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다.
시야는 어두웠고, 먹구름이 낀 것처럼 몸의 감각은 흐릿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늘을 뒤덮은 검은 하늘만큼은.
너무나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이게… 개천, 인가.’
몽롱한 의식을 붙들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짙은 먹구름이 낀 듯 어둡게 느껴졌다.
‘하아.’
달뜬 숨을 내쉬며 몸을 살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듯.
천도윤과 싸우는 도중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마력이 저절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 있었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마력.
다만, 이제까지 익숙하게 사용해오던 성흔의 마력은 아니었다.
성흔의 마력과는 조금 다른, 어딘가 끈적하게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속에서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파직, 파지직!
오진은 가볍게 손을 들어 뇌전을 일으켰다.
평소와 같은 푸른 빛이 아닌, 짙은 검은 빛의 뇌전이 고요히 타올랐다.
처음 사용해보는 개천임에도.
오랜 고향에 돌아온 듯 낯익은 감각이 느껴졌다.
“뭐, 뭐냐! 무, 무슨 짓을 한 게냐 이노옴!!”
저 멀리서 두 눈가를 부여잡은 채 패닉에 빠져 있는 천도윤의 모습이 보였다.
공포에 질린 채, 익숙하지 않은 어둠에 벌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
병실 침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던 하은의 모습이 문뜩 머리를 스쳤다.
‘당해보니 좀 어때?’
벌벌 떠는 천도윤을 향해 말을 건넸지만.
어째서인지 목을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뭐지?’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어둠에 녹아들 듯 부분부분이 먹구름이 되어 있는 몸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개천의 영향인가.’
어딘가 의식이 몽롱하다.
오진은 발작을 일으키듯 몸부리치는 천도윤을 향해 느긋이 몸을 돌렸다.
여기서 더 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내, 내가 졌다!! 용안도! 용의 심장도 모두 포기하마!!”
천도윤과의 싸움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끝났다.
눈에 안대를 채운 세 살짜리 어린애와 싸우면 이런 기분일까.
짙은 먹구름에 휩싸인 채 허우적거리듯 발악하는 천도윤의 모습에 낄낄 웃음이 터져나왔다.
━미칠 듯한 전능감.
탈 인간의 영역이라 불리는 고위 각성자를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짓밟는 감각은 마약을 들이킨 듯 짜릿했다.
‘지금이라면.’
밤 하늘에 빛나는 성좌들조차. 모두 씹어삼켜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아.’
흑천의 힘에 취할수록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지금처럼 몸 부분부분이 먹구름으로 변한 게 아니라.
아예 몸 전체가 먹구름으로 변한다면, 영혼까지 흑천에 녹아든다면.
━얼마나 더 이 짜릿한 전능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 으.’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지는 유혹.
하늘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이 마치 샤워를 마친 후 이불 속에 들어간 것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검은 잉크가 번지듯, 몸 곳곳이 먹구름으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위험, 해.’
아득해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오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있으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등을 떠밀었다.
‘정신 차려.’
짙게 깔린 어둠.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방황한다.
흐릿하게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한 줄기 푸른 빛이 눈에 들어왔다.
‘거문고자리의 성흔.’
북극성의 별빛은.
밤하늘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 사이에서도 찬란히 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우, 하!”
수면 위로 떠오르듯 흐릿해져가던 의식이 다시 맑아졌다.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목을 더듬었다.
‘있다.’
먹구름으로 변해 있었던 방금 전과 달리, 제대로 목이 남아 있었다.
‘위험했어.’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퍼졌다.
만약 그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찾지 못했다면.
자신은 흑천에 녹아들어버려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오진은 고개를 돌려 꼴사납게 몸을 떨고 있는 천도윤을 내려다봤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 전에.
뽑아낼 수 있는 건 모두 뽑아낼 생각이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이곳에서 나가게 해줄 게.”
“저, 정말이냐?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는 게냐?”
천도윤의 눈에 서린 희망을 내려다보며 짙게 웃었다.
팔다리가 사라진 채, 망가진 오뚜기처럼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내게 알려줘봐. 최대한 자세하게.”
“내, 내가 알고 있는 거라니…? 뭐, 뭘 말하는 거냐?”
“뭐든지 좋아. 용의 심장과 용안에 대한 것, 흑성회에 대한 것, 검은 별의 성좌나 마경에 대한 것. 네가 알고 있는 거 모두 알려준다면.”
푸른 귀화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살려줄게.”
“…….”
천도윤은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요, 용의 심장은 용자리의 각성자가 사용했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
“다음.”
“해마자리 놈들이 오사카 지역을 모두 저, 접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
“검은 별의 성좌는 과거 성좌들 사이에서 ‘위성’이라 배척 받으며 추방 당한 성좌들이다.”
“다음.”
다음, 다음, 다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려퍼졌다.
“요, 용의 심장을 가져오라 지시한 건….”
“지시한 건?”
턱.
천도윤의 말이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그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푸른 귀화에서 시선을 피했다.
‘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서 받은 금제 때문에 아무리 용을 써도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왜? 말할 수 없어?”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다오!!”
“괜찮아, 괜찮아. 다 이해하니깐.”
낄낄낄.
섬뜩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했다! 어, 어서 여기서 날 내보다오!”
“그래, 알았어.”
오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주름진 뺨을 손으로 감쌌다.
“자, 천천히 눈을 감고, 입으로 천을 세는 거야.”
노래하듯 속삭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새야해. 알았지? 빨라지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 세게할 테니깐.”
“아, 알겠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고개.
“하나, 둘, 셋.”
그의 말에 따라 천천히 숫자를 센다.
천천히, 천천히.
“백오십, 백오십일, 백오십이.”
아아.
고작 15분 조금 넘는 시간이 어찌나 이토록 아득하게 느껴진단 말인가.
미칠듯한 초조함과 불안함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초조와 불안이 커질수록 덩달아 희망이 커져갔다.
“오백사십이, 오백사십삼, 오백사십사.”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 희망하게 된다.
더 갈망하게 된다.
이 어둠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천.”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터널의 끝이 보인다.
터널의 끝을 넘어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
“아, 아아.”
천도윤은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뒤틀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주름진 뺨에 눈물이 흐른다.
“왜, 왜, 대체 왜…! 처, 천을 세면 내보내준다고…!”
“아, 그거?”
낄낄낄.
섬뜩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거짓말이야.”
퍼석!
검은 뇌전이 천도윤의 머리를 관통했다.
“…….”
오진은 축 늘어진 천도윤의 시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꾸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그의 시체를 뒤덮었다.
“하아.”
먹구름을 타고 올빼미자리의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이제까지 흡수했던 올빼미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띠링!
[각성자 ‘천도윤’의 성흔을 성공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올빼미자리의 별자리가 완성됐습니다.] [올빼미자리의 성좌, ‘녹투아’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올빼미자리를 대표 성흔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설정하시겠습니까?]“미쳤다고 하겠냐.”
고려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날파리를 쫓듯 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메시지창을 손으로 치웠다.
“크윽!”
치이이이익!
메시지를 치우는 것과 동시에 왼쪽 가슴에서 뜨거운 통증이 달렸다.
피에 젖어 엉겨붙은 옷을 살짝 들추자 거문고자리의 성흔 옆에 새겨진 획(劃)이 일곱 개로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7성에 도달한 건가.’
하긴.
탈 인간이라 불리는 9성 각성자를 통으로 먹어치웠다.
아무 변화도 없으면 섭하지.
‘전승은….’
가만히 기다려도 전승은 따로 이뤄지지 않았다.
‘개천을 사용해서 그런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필요한 정보는 이미 천도윤에게서 뽑아낸 상황.
굳이 전승으로 그의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럼.’
오진은 주변에 짙게 깔린 검은 먹구름들을 돌아보며 짧게 심호흡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활짝 열린 하늘을 닫았다.
-꾸르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오진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왔다.
“오, 오지나!!!”
먹구름이 모두 사라지자 하은이 다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바, 방금 뭐야 대체? 너, 너 몸에서 먹구름이 막…!”
“누나.”
“막 씨팔 또도가스가 빵구뀌는 것처럼!!”
“좀 닥쳐봐 이 여자야.”
또도가스는 뭔 또도가스야.
“처, 천도윤은 어디 간 거야? 사, 상처는 어떻게 다 나은 거고?”
“나중에 집 가서 설명해 줄게.”
흑천을 사용하는 것을 들킨 것도 모자라 개천을 사용하는 것까지 모두 들켜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사기꾼이라 해도, 여기서 거짓말로 그녀를 속여넘길 순 없겠지.
“그것보다.”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오지나…?”
하은이 움찔 몸을 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겁 먹은 강아지와 같은 모습이 퍽 귀엽다.
나지막이 손을 뻗어 사과처럼 붉어진 그녀의 뺨 위에 올렸다.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온기.
소중한 보물을 쓰다듬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장님은 안 됐으니까 누날 책임질 필요 없겠네?”
“어?”
하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 아니. 그, 그게 말이지! 아, 아까 했던 말은 그… 뭐냐.”
오진에게 고백했던 일이 떠올랐는지 허둥지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크흠! 그, 그래 뭐. 두, 두 눈 멀쩡하니 책임질 필요는… 어, 없겠네.”
어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오진은 고갤 돌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거짓말이야.”
“어, 엉? 뭐, 뭐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거.”
“그게 무슨 뜻… 흐읍!”
하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