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3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38화
탐랑성 (1)
“타, 탐랑성?!”
하은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쩍 입을 벌렸다.
탐랑성 천상길.
강화도 특별 관리 구역, 흔히 ‘낙원’이라 불리는 도시의 지배자.
명실상부 한국 최강의 각성자이자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각성자가 오진을 찾아오다니.
그것도 부하 길드원이나 수행인을 시켜서가 아닌 탐랑성 본인이 직접.
“탐랑성이 왜 오지니를…?”
하은이 얼빠진 표정으로 천상길과 오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때.
천상길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오진에게 다가왔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 해도 다행히 아직 귀가 멀지는 않아서 말일세. 뇌랑에 관한 얘기들은 많이 들었네.”
“영광입니다.”
오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천상길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주름진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청명한 기운.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정제수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마력이었다.
‘진짜 도인이라도 되는 건가.’
이제까지 많은 각성자들을 봐왔지만, 이 정도로 정갈한 마력은 처음이었다.
“잠깐 자네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네. 시간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칠성의 일원이 직접 찾아왔는데 바쁘다며 거절할 수는 없었다.
‘탐랑성이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던 초인이 직접 자신을 찾아오다니.
뇌랑이라는 이름이 가진 파급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네. 자리는 마련해뒀으니 따라오게.”
천상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오지나 이거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거 맞지?”
“뭐, 상관없겠지. 둘만 따로 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하은과 함께 천상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내한 곳은 전통 한옥 스타일로 만들어진 조용한 찻집.
서울 시내 한복판에 웬 조선시대 궁궐이 들어와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호화롭고 으리으리한 가게였다.
‘뭔 찻집이 이래 크다냐.’
찻잎이 아니라 아편을 달여 내와도 유지비나 나올까 싶은 가게였다.
“우선 차부터 한잔 들지. 마시고 싶은 차가 있는가?”
“차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요.”
“그러면 적당히 시키도록 하겠네.”
천상길이 테이블 위의 종을 가볍게 흔들자 미닫이문이 열리며 고운 한복차림을 입은 점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성차 3잔 부탁하네.”
“네.”
유성차?
그런 이름의 차가 있었던가?
“성유석을 곱게 갈아 섞은 거름으로 키운 찻잎을 달여 만든 차라네. 맛도 맛이지만 체내의 마력 순환을 도와주는 효과가 있지.”
“…….”
뭔지는 모르겠지만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쌀 것 같은 차였다.
-드르륵.
잠깐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든 점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오진은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청아한 박하 향이 입 안에 확 퍼지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는 입에 좀 맞나?”
“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네요.”
“다행이군.”
천상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은이 쭈뼛거리며 오진을 따라 차를 마시더니 동그랗게 눈을 뜨며 후르륵 원샷에 차를 들이켰다.
누나 그거 맥주 아니야.
“자네를 찾아온 건 우선,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함이네.”
“예?”
고맙다니?
천상길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못난 아우 놈이 더 흉악한 죄를 짓기 전에 막아줬으니 응당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게 맞겠지.”
“…….”
“푸훕!!! 뭐, 뭐? 아우?”
오진이 마시던 차를 슬쩍 뺏어 마시던 하은이 거하게 차를 뿜으며 천상길을 바라봤다.
천상길이 말하는 ‘아우’가 누군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으리라.
“…천도윤과 형제 관계셨던 겁니까?”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일세.”
천상길은 씁쓸한 표정으로 유성차를 들이켰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 살아있는 줄도 몰랐네. 8년… 아니 벌써 9년이 됐구만. 늙어서 시간 감각이 헷갈리니 이해해주게.”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북극에 마경으로 통하는 문이 열린 이후 도윤이와는 연락이 끊어졌었네. 당연히 죽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신 거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놈이 흑성회의 집행관이 되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천상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래서 이번 올빼미 소탕 작전에서 천혜 길드가 움직였던 건가.’
어지간해서는 낙원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들이 갑자기 움직인 이유가 그런 이유였다니.
“못난 아우 놈이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 직접 처단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더군.”
천상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자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걸세.”
오진이 천도윤과 싸워 이긴 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천혜 길드의 정보망까지는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고맙네. 이 못난 늙은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줬구만.”
자리에서 일어난 천상길이 깊게 머리를 숙였다.
혹여나 천도윤과 싸우던 도중 사용한 개천에 대해 알고 있나 싶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뇨. 저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하하! 과연, 영웅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청년이로군.”
아무래도 천상길은 자신이 무슨 불타는 정의감 휩싸여 천도윤을 처단했다 착각하는 모양.
실상은 정의감 때문에 싸운 게 아니라 단순히 천도윤이 하은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지만.
‘오히려 좋지.’
영웅이라는 타이틀만큼 이용하기 좋은 건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선한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선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처럼 느껴지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칠성만 하겠습니까.”
“이 늙은이에게는 너무 과분한 칭호라네.”
천상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뇨. 탐랑성 님이 얼마나 많은 위업을 세웠는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칠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탐랑성이 무슨 위업을 세웠는지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그가 탐랑성이라 불리게 된 계기 정도일까.
오진은 괜히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소리를 자유로이 다룬다는 염소자리의 고위 각성자! 6년 전 게이트를 빠져나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수천의 괴수 무리를 휘파람 한 번으로 제압하셨던 일화는 전 세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크, 크흠. 그, 그런가?”
몰라.
근데 존나 유명한 얘기긴 하지.
칠성에 대해 쥐뿔도 관심 없는 나조차 알고 있는 얘기니까.
“한국인들에게 있어 천상길 님은 흠모해 마지않는 영웅이십니다.”
“허허. 그만하게나. 이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군.”
그렇게 말하는 천상길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역시, 칠성이니 뭐니 해도 똑같은 사람인 건 마찬가지구만.
“그래서… 감사 인사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던 겁니까?”
설마 칠성이나 돼서 말로만 고맙다 하고 끝낼 건 아니지?
“가장 큰 이유는 그거지. 아, 물론 말로만 퉁칠 생각은 없다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준비해뒀지.”
“아, 아뇨!”
그래! 이거지 씨발!
“존경하는 영웅을 직접 뵌 것만으로 전 충분합니다!”
준비한 게 뭔지는 모르지만 빨리 꺼내 봐.
“이걸세.”
“정말 이러실 필요 없는데….”
가장 필요했던 게 바로 이거야.
“후우. 주신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천상길이 건네준 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건 여권처럼 생긴 직사각형의 카드.
“낙원의 입장권일세.”
“아… 예.”
오진은 김이 팍 식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00억을 내면 구할 수 있다는 낙원의 입장권.
예전에야 혹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딱히 흥미가 끌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뭐, 이 경우에는 초대장이라 부르는 편이 더 맞겠군.”
“초대장이요?”
“자네를 낙원에 초대하고 싶네.”
낙원이라.
워낙 베일에 싸인 곳이다 보니 한번 가보고 싶긴 했지만.
“죄송하지만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베가의 봉인을 푸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 급할 필요 없다네. 시간이 날 때 한 번 찾아와주게. 아마 자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게야.”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초대장을 안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건….”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답했다.
“일본에 좀 볼 일이 있어서요.”
“일본이라… ‘해마’를 잡으러 가는 건가?”
역시.
해마자리 파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이놈과 한 번 만나보게.”
천상길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자 어디선가 개량 한복차림의 수행인이 나타나더니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펜을 잡아 들며 마치 붓을 놀리듯 종이 위에 연락처를 적었다.
“나와는 좀 연이 있는 각성자라네. 성격은 좀… 개성적이다만 자네에게 도움을 줄 게야.”
연락처에 적힌 건 ‘사카키 료’라는 이름.
“감사합니다. 한 번 연락해보겠습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해마자리 파벌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쪽 현지인들과도 연줄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탐랑성과 연이 닿아 있는 각성자라면 믿을 만 할 것이다.
“그럼 이만 이 늙은이는 물러가도록 하겠네. 아, 계산은 미리 해둘 테니 애인과 식사라도 하고 가게. 여기 한정식이 그걸로 아주 유명하다네.”
“그거요?”
천상길은 오진과 하은을 돌아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주름 입가를 살짝 내밀며 휘파람을 불었다.
-정력 말일세 정력!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무슨 득도한 도인이나 산신령처럼 생긴 외모를 지녔던 천상길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외침이었다.
‘아니.’
갑자기 뜬금없는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늙은이.
-후후. 한번 먹어보면 오늘 밤에 놀랄 걸세. 아주 기냥 불기둥이 빡!
천상길이 주먹을 굳게 쥔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마 이 새끼야.’
다급히 하은 쪽을 바라봤지만, 자신한테만 들리는 소리였던 듯 옆자리에 앉은 하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하하하! 이거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구만!”
천상길은 털털한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아 참, 마지막으로….”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로 오진을 돌아봤다.
-뱀을 조심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닫혔다.
“…뱀이라.”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불길한 이름을 중얼거리며, 오진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을 흔들었다.
“예, 주문받겠습니다.”
“한정식 코스 주세요.”
풀코스루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