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5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52화
첫 데이트 (2)
오사카 난바역.
며칠 전 해마자리 파벌에 의한 무차별 테러가 있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역 주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와따, 사람 드릅게 북적거리네. 며칠 전에만 해도 난리도 아니었는데.”
“테러가 일어난 건 난바역에서 좀 떨어진 곳이니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들 잘만 돌아댕기네.”
“뭐… 익숙해진 거 아닐까?”
일본의 경우 괴수에 의해 도심지가 습격당한 경험이 꽤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선 어느 정도 내성이 쌓였으리라.
“크흠. 그래,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인데 유령 도시처럼 텅텅 비어있는 것보단 훨 낫다 이게.”
하은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눈을 반짝였다.
오늘은 오진과 연인 사이가 되고 난 후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
이전에 함께 놀러 나갔을 때와는 서로의 입장도 관계도 달랐다.
‘첫 해외여행! 첫 데이트!’
하은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거센 콧바람을 흘리며 오진을 잡아끌었다.
“도톤보리라 했던가? 그쪽에 먹거리가 그렇게 많다는데 빨리 가보자 오지나!”
“천천히 가 누나. 오늘은 시간도 많으니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어딨어, 인마! 이럴 때 팍팍 싸돌아댕겨야지!”
들뜬 웃음을 흘리며 오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진은 들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녀가 이렇게 들뜨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1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꿨던 일이니까.’
곰팡이 가득한 좁은 집 안.
온수조차 나오지 않아 찬물에 몸을 씻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살펴주며 지내고 있었을 때.
해외여행은커녕 밖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맘 편히 하지 못했을 때가 고작 1년 전이다.
이렇게 해외에 나와 즐겁게 웃고 떠들며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자신도, 그녀도 꿈에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 다 돼가고 있네.”
오진은 사뭇 쌀쌀해진 가을바람을 맞으며 옅게 웃었다.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일까.
체감상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좀 추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추우면 누나가 손잡아 줄게. 자, 손.”
하은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마치 어린 강아지를 대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뭔가 알 수 없는 간질거림을 느끼며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그녀의 손은 손난로처럼 따스했다.
“따듯하지?”
“엉.”
“이렇게 하면 더 따듯할 거야.”
하은이 마주 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포근한 온기가 퍼졌다.
몸을 데우는 온기뿐만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의 감촉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누나랑 이렇게 손잡으니까 어때?”
“겨울에 보일러 비 걱정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씨발아.”
산통을 깨는 오진의 말에 하은이 눈을 찌푸렸다.
괜히 길가에 널브러진 캔을 걷어차며 찌릿 오진을 노려보았다.
‘기껏 좋은 분위기였는데.’
이래서야 연인이 되기 전과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겨우내 쭉 이렇게 손잡고 지내자.”
“…엇.”
훅 들어온 오진의 변화구에 하은이 토끼처럼 눈을 떴다.
“크, 크흠! 새, 새끼 또 오글거리는 말한다.”
“아니 누나가 먼저 시작했잖아.”
“헹. 잘 모르겠거덩요.”
하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오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하자! 흑우 등골 좀 빼먹으러 가야지!”
“오키. 마음껏 쓰라고 했으니까 뽕을 뽑아야지.”
오진과 하은은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도톤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의 카드로 즐기는 먹거리 데이트.
이보다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게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난바역 북쪽 출구를 따라 이어진 긴 시장 거리.
잡다한 상품을 파는 가게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 강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도톤보리 거리에 들어오자 가장 처음 보인 것은 거대한 홍게 모형이 걸린 간판.
그곳을 따라 일직선으로 쭉 갖가지 길거리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오! 뭔가 떡볶이랑 순대 팔 것처럼 생긴 거리네.”
분위기만 놓고 보면 딱 그거다.
“얘들 입장에선 비슷할 거야.”
“오지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일식은 전혀 모르는데.”
“글쎄다… 나도 먹어본 적이 있어야지.”
흑천을 각성하기 전 오진의 주식은 말 그대로 ‘생존’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칼로리 바.
하은도 먹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냉동 햄버거나 샌드위치 등을 주로 먹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음식에 비해 비싼 일식은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
“일단 한 번 걸어보면서 먹고 싶은 거 찾아보자.”
“그랭.”
애초에 여기에 온 주목적은 뭔갈 먹는 게 아닌 오진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함이 아닌가.
오진과 하은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거리를 걸었다.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철판 위에 국수를 볶고 있는 가게, 데리야키 소스를 바른 닭꼬치를 불판에 굽고 있는 가게 등.
냄새만 맡아도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가게들을 돌아보던 도중.
“오지나 저거 어때?”
하은의 시선을 끈 것은 동그란 홈이 파인 곳에 밀가루 반죽을 넣어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가게였다.
번역기를 대충 돌려보니 가게 간판에는 ‘타코야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냄새 좋은데? 한 번 먹어볼까?”
“가즈아~!”
하은이 들뜬 걸음으로 가게로 다가갔다.
가게에 가까워질수록 코를 자극하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진은 무슨 공장 기계처럼 절제된 동작으로 타코야키를 만들고 있는 직원에게 주문했다.
“타코야키 두 개 주세요.”
“토핑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올릴 수 있는 거 다 올려주세요.”
“전부 다요?”
“예.”
길거리 음식치고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흑우… 아니, 사카키의 카드라는 든든한 무기가 있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주전자에 담긴 밀가루 반죽을 둥그런 홈에 담았다.
치이이익!
자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고소한 냄새.
기다란 집게로 큼지막한 문어 조각과 피자치즈를 반죽에 넣었다.
반죽의 바닥 면이 익자 꼬챙이를 사용해 빙글 뒤집는다.
탁구공만한 크기로 익은 타코야키를 접시에 담은 후 데리야키 소스와 마요네즈, 가츠오부시를 뿌렸다.
토핑으로 잘게 썬 파와 설탕을 넣은 수란을 위에 뿌리고 마무리로 치즈를 한 번 더 뿌렸다.
-꿀꺽.
옆에서 하은이 군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음식의 퀄리티를 생각하면 이런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보다야 쿠로우시에서 대접받았던 음식들이 수십 배는 더 값비싼 음식이었겠지만.
길거리 음식은 그 특유의 자극적인 맛과 불량스러움이 매력 아니던가.
그리고 평소 값싸게 먹을 수 있는 불량식품을 주로 먹어왔던 하은과 오진에겐 쿠로우시에서 대접받았던 값비싼 음식들보다 이쪽이 훨씬 더 친숙하고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존나 맛있어 보이네.”
하은은 타코야키가 가득 든 접시를 받은 후 기다란 이쑤시개로 푹 찔러 입에 넣었다.
“아뜨뜨!”
타코야키 안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밀가루 반죽에 하은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렇게 십여 초가량 타코야키를 식힌 후 오물오물 입을 움직였다.
입 안에 확 퍼지는 자극적인 소스와 치즈의 맛.
설탕을 넣은 수란과 얇게 썬 파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며 혓바닥 위에서 춤췄다.
“후어어엉.”
하은은 뜻을 알 수 없는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며 타코야키를 꿀떡 삼켰다.
“오지나! 이거 개맛있다!”
“역시 우리 입맛엔 길거리 음식만 한 게 없네.”
사카키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겠다는 처음 계획과는 좀 멀어지게 됐지만.
뭐 어떤가.
맛만 좋으면 됐지.
“오지나.”
“엉?”
하은이 이쑤시개로 타코야키 하나로 푹 찍더니 후후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 식힌 타코야키를 오진의 입에 쑥 내밀었다.
이게 러브코메디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앙’인가 뭔가 그건가?
“자, 누나의 구슬을 먹으렴.”
뭔 소리 하는 거야 이 여자.
“누나 구슬 없잖아.”
“잘 찾아보면 하나 있어.”
“…….”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대답에 오진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오진의 입에 타코야키가 쏙 들어왔다.
“헤헤, 맛있지?”
“맛있는데 맛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누가 이 누나 좀 말려봐요, 제발.
“자! 다 먹었으면 다음 거 먹으러 가자!”
타코야키가 든 접시를 말끔히 비운 하은이 오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오진은 방금 전 아찔한 대화가 지워지지 않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끌려갔다.
“이번엔 저거 먹어보자 오지나!”
들뜬 발걸음으로 손을 잡아끄는 그녀를 바라보며 오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끔 이렇게 한 방 먹을 때도 있단 말이지.’
하여간.
누구랑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입담 하나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누나였다.
* * *
그녀와 도톤보리 거리를 걸으며 눈에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신 후 근처에 있는 오락실에서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새 오후 다섯 시가 됐다.
조금씩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강가를 거닐던 중.
“여기에만 있기 아까우니까 다른 곳도 함 가보자.”
“좋지. 어디 갈까?”
“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덴덴타운? 그게 유명하다고 하던데.”
“덴덴타운?”
오진도 궁금해서 찾아보니 관서 지방의 아키하바라니 오타쿠들의 제2의 성지니 하는 얘기가 보였다.
딱히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관심이 없었지만.
“한 번 가보자.”
사카키의 카드로 이런저런 음식들을 신나게 사서 먹은 탓에 저녁을 먹기도 애매했다.
소화도 시킬 겸 덴덴타운 쪽으로 걸어가니 확실히 주변에 만화나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걸린 가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째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애초에 누나 만화 같은 거 거의 안 보지 않았어?”
“예전엔 그래도 좀 봤지. 그 일이 있던 뒤로는 못 봤지만.”
“…아.”
그녀가 저주에 걸려 시력을 잃었을 때를 떠올리며 오진이 눈을 찌푸렸다.
“가서 구경할래?”
“봐서 뭐 하냐 읽지도 못하는데.”
하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지나 저 볼링핀처럼 생긴 건 뭐냐?”
“글쎄…? 처음 보는데.”
그녀가 가리킨 가게에는 빨간색과 흰색 줄무니가 그어진 커다란 볼링핀이 세워져 있었다.
‘텐…가? 뭐지 저게?’
오진과 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를 바라봤다.
“저기 함 들어가 볼까?”
“그래. 뭐 파는 곳인지 궁금하네.”
하은이 흔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들어간 가게 안에는.
-흐아앙! 팥고물! 징개나무!
뭔가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통역되지 않은 일본어가 들려왔다.
그 뜻을 알 수 없음에도, 이곳이 어떤 뭘 파는 가게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 씨발.”
“…….”
그도 그럴 것이, 가게 안에는 살색의 비율이 과도하게 높은 포스터가 한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여기… 성인용품 가게였냐?”
하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