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5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54화
아담의 사과 (1)
마트에서 적당히 고른 사과 한 박스.
그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나이프로 손바닥을 길게 그어 핏물을 낸 후, 사과 겉면에 얇게 펴 발랐다.
‘변형.’
먹음직스러운 붉은색을 띠고 있던 사과가 황금을 녹여 만든 것처럼 금색으로 변했다.
황금 사과를 만든 오진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이 흘러내렸다.
‘유지가 쉽지 않아.’
몸에서 떨어진 신체 일부에 변형을 사용하는 건 꽤나 많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머리 대신 마우스와 키보드로 손을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형태를 자유롭게 바꾸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대로 장기간 변형된 형태를 유지하는 건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했다.
‘차라리 마력이 소모됐으면 몰라.’
정신력이 소모되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건데.”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손에 쥔 황금 사과를 내려다봤다.
단순히 사과의 색깔만 바꾼 걸로 ‘아담의 사과’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신물(神物)인 척 속일 수는 없었다.
지난번 던전에서 발견했단 ‘용의 심장’이 그렇듯.
규격 외의 힘이 담긴 성유물은 가만히 있어도 숨통을 조여올 듯한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기 마련이다.
“율법의 제약을 줄일 수 있는 사기템이 밋밋한 기운을 풍겨선 안 되겠지.”
오진은 ‘변형’을 사용해 만든 황금 사과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이제 ‘흑막’을 사용해 마력의 기운을 바꿔 버리면━
-파각!
손에 쥔 사과가 산산이 박살 났다.
“제기랄.”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박살 난 사과를 그릇에 내던졌다.
이미 그릇에는 처참하게 조가 난 사과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한 박스로는 어림도 없네.’
한숨을 내쉬며 포크로 조각난 사과를 짚어 입에 넣었다.
베가 피셜 성흔의 마력을 다루는 일에 경이로운 재능을 지녔다고 했는데.
고작 이 사과 하나를 부수지 않게 마력을 조절하는 것조차 헤매고 있었다.
‘차라리 마력을 빵빵 쏘는 거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사과의 내구도가 버틸만한 미량의 마력만으로 ‘아담의 사과’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너무 적은 마력을 넣으면 기운이 약하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마력을 흘려 넣으면 사과가 부서져 버리고 만다.
“미치겠네 이거.”
오진은 텅 비어버린 사과 박스를 뭉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사과 말고 다른 거 쓰면 되는 거 아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담의 사과’라고 해서 굳이 사과의 형태를 할 필요는 없었다.
용의 심장만 해도 심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치곤 외형은 그냥 푸른 빛을 뿜어내는 반투명한 수정이었으니까.
“그래도 되도록 사과를 써서 만들어 보려고.”
“왜 굳이?”
“뭐, 연습도 할 겸 겸사겸사하는 거지.”
흑천이 여섯 번째 개화를 하며 강화된 변형과 흑막의 능력.
이 두 가지 특성은 앞으로 오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성좌들의 눈을 속이며 회귀자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이 두 능력이 꼭 필요하게 될 테니까.
‘고작 사과 하나에 좌절할 순 없지.’
단순히 ‘아담의 사과’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 오진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세밀하게 능력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익혀 두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흐응, 그래?”
소파에 길게 누운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하은이 하얀 다리를 흔들며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를 분위기 좋게 마치고 돌아왔는데 남친이라는 놈이 기껏 큰맘 먹고 산 경찰복 보다 웬 사과 쪼가리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으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지사.
그녀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새하얀 맨발 끝으로 오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야.”
“그냥 짜증 나서.”
“아니 왜.”
내가 뭘 했다고.
“몰라 새끼야. 어쨌든 사과 한 박스 다 써서 이제 할 일 없는 거지?”
“더 사 와야지.”
“새벽 1시에 뭔 사과를 사러 가. 헛소리 말고 일 다 끝났으면 누나 다리나 주무르렴?”
하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오진의 허벅지 위에 왼쪽 다리를 척 올렸다.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허벅지 위에 올려진 늘씬한 다리의 발목 부분을 붙잡고 발바닥을 간질였다.
“꺄아악!! 뭐, 뭐 하는 짓이야 이 미친놈아!!”
“이제 짐 싸고 집 갈 준비해야지 다리를 주무르긴 뭘 주물러 이 여편네야.”
오진은 소파 위에서 자지러지며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 하은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귀기 시작했다고 해서 다 바뀌는 건 아니네.’
이렇게 예전처럼 장난을 주고받는 것도 좋았다.
뭔가 마음이 평안해진달까.
“갸아아악! 멈춰! 멈추라고오오!!”
누나는 평안해 보이지 않지만.
***
“흐음. 벌써 떠나는 건가?”
사카키가 아쉽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며칠 더 있어도 괜찮네만.”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요.”
“뭐… 사나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쿠웅!
사카키가 발을 구르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나이란 헤어질 때 가장 크게 웃는 법! 만나서 영광이었네 동생!!”
“저도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크하핫! 자네가 준 도움에 비하면 내가 해준 게 뭐 있다고 그러나!”
솥뚜껑만 한 손으로 등을 팡팡 두드린다.
존나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위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그럼 잘 들어가 보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내 한달음에 달려갈 테니!”
사카키라면 진짜 뜀박질로 바다를 넘을 것 같았다.
“또 연락하겠습니다.”
“오우!”
사카키를 뒤로 하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티켓을 끊고 짐을 부치러 가는 길에 하은이 옆에 찰싹 달라붙더니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 그 흑천인가 뭔가 단계가 올라갔다 했지?”
“응.”
“그러면 이제 내 도움 없이 개천을 쓸 수 있는 거야?”
“아마 가능할 거야.”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용맥의 마력이 풀린 양을 생각하면 충분히 자력으로 개천을 사용할 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완전한 개천은 아니라지만.’
불완전한 상태로도 흑성회 6위 집행관을 어린애처럼 바지에 오줌을 지리게 만드는 기술이라니.
이쯤 되면 단순히 ‘기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권능 같은 거라 봐야 하나?’
뭐, 명칭이야 어쨌든.
자력으로 개천을 사용할 수 있다면 베가를 율법의 제약에서 풀어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나의 아이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은발 여신님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한시라도 빨리 율법의 속박을 풀어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전에 아담의 사과를 만드는 게 우선이지.’
오진은 비행기에 타기 전 쇼핑 앱에서 사과를 주문했다.
***
“야! 권오진!!”
이른 새벽부터 쩌렁쩌렁 집을 울리는 목소리.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하은이 기겁한 표정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이, 이게 다 뭐야?!”
살짝 열린 현관문 앞에는 이삿짐을 옮기는 것마냥 대량의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사과 주문한 거야.”
“아니 대체 몇 개를 주문한 거야?”
“일단 이천 개.”
“…….”
하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이천 개씩이나 주문했으면서 ‘일단’이라니?
“내가 못 살겠다 증말.”
하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현관 앞에 쌓인 사과 박스를 옮기는 걸 도와줬다.
“자, 그럼.”
오진은 박스에서 사과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나이프로 손바닥 그어 핏물을 낸 후 꼼꼼히 사과에 발랐다.
‘변형.’
찬란한 황금빛으로 변하는 사과.
거기에 조금씩 마력을 흘려 넣는다.
‘흑막.’
흘러 넣은 마력의 기운을 흑막으로 변환했을 때.
-파삭!
산산이 폭발하는 사과.
“끄응.”
오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고생 좀 하겠네.”
다른 것보다 마력 양 자체가 너무 커진 게 문제였다.
지금 오진은 순수한 마력 양만 놓고 보면 고위 각성자도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마력만 무식하게 많다고 무조건 센 건 아니지만.’
애초에 마력의 양만으로 승패가 갈렸다면 천도윤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일도 없었다.
막대한 마력 양은 오진의 강점 중 하나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 또한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금처럼 세밀한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
‘일단 사과를 깨트리지 않으면서 마력을 흘려 넣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
비유하자면 수십 톤에 달하는 포크레인으로 계란을 깨지지 않게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
마력의 양 자체가 너무 막대한 탓에 세밀한 조정에 필요한 컨트롤 요구치가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큰 것이다.
“뭐, 하다 보면 되겠지.”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음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퍼석, 퍼석, 퍼석.
하나씩 바스러지는 사과.
그냥 버려지는 사과가 아까워서 그릇에 옮겨 담아두는 것도 잠시.
사과가 들어있던 상자에 조각난 사과들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거칠어지는 숨.
조그마한 쌀알을 바늘 끝으로 조각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탓에 뇌가 녹아버릴 듯 머리가 뜨겁다.
하지만.
-퍼석, 퍼석, 퍼석, 퍼석, 퍼석.
멈추지 않는다.
멈출 이유가 없다.
참아서 해결되는 일이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밀려와도.
하나씩, 하나씩.
정신을 집중해 사과를 움켜쥔다.
그렇게 2주가 넘도록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방 안에 앉아 사과 쥐고 부수고를 반복했을 때.
-우우우우웅!!!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는 사과.
내용물은 그저 평범한 사과에 불과했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은 신화에 나오는 선악과(善惡果)처럼 영험하고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됐, 다.”
다크 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오진이 손에 쥔 황금 사과를 붙잡은 채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됐다고 씨바아아아!!”
2주 동안 대체 몇천, 아니 몇만 개의 사과를 부숴 먹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오진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거실로 뛰쳐나갔다.
“사과… 이제 사과 시러….”
그곳에는 조각난 사과가 한가득 든 상자 수십 개에 둘러싸인 하은이 망가진 기계처럼 사과를 주워 먹고 있었다.
“누나! 성공했어!”
“…어? 성공?”
하은의 시선이 오진에게 향했다.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황금의 사과.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힐 듯한 영험한 기운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미, 미친? 이게 진짜 사과라고?”
하은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반쯤 입을 벌렸다.
“어때?”
“어떻고 자시고…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어지지 않는데?”
하은의 반응을 확인한 오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됐어.’
이제 이걸 들고 가 리아크에게 보여준 후, 베가를 율법의 속박에서 풀어주면 된다.
‘그 전에.’
오진의 몸이 스르륵 쓰러졌다.
“오, 오지나?”
“나 좀 쉴게.”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오진은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때마침 눈앞에 떠오른 푸른 메시지창을 확인하지 못한 채.
-띠링!
[성흔의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개천(開天)’의 해방에 필요한 일부 조건을 달성했습니다.]잠든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을 해낸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