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5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59화
낙원으로 (2)
“천마… 요?”
“그리 부르더군.”
천상길은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 천마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네만… 아마 이 늙은이의 추측으로는 인간이 아닌, ‘성좌’와 같은 초월자라고 생각하고 있네.”
“…….”
오진은 이어지는 천상길의 말에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표정을 굳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듯한 감각.
생각지도 못한 ‘천마’의 등장에 지끈지끈 두통이 밀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뱀자리의 여왕이 따르고 있다는 ‘천마’가 폴라리스의 예언이 가리키는 흑천의 주인일 리는 없었다.
애초에 천마라는 칭호 자체가 베가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도중 즉석에서 떠올린 그럴싸한 칭호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천마라는 칭호를 지닌 놈이 진짜 흑성회에 있었다는 말이지?’
뭐 이런 미친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사기꾼이 1등 복권의 번호를 알고 있다며 적당한 호구에게 대충 떠벌린 숫자가 실제 1등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 기분일까.
이 정도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밟은 게 아닌 금광을 발견한 수준이다.
‘어? 뭐야? 생각해 보니 이거 개꿀 아니야?’
어차피 언젠가 흑성회에 ‘천마’를 만들어 죽인 후, 자신의 정체를 영영 숨길 생각이었다.
소스케가 했던 방법과 마찬가지.
범인이 잡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쫓고 있던 범인이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니까.
그런데 이젠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이제 그 천마를 ‘흑천의 주인’으로 몰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 천마가 흑성회의 진짜 주인이란 말씀이시죠?”
“그렇게 추측되긴 하지만, ‘주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알려진 정보가 없네. 뱀자리의 여왕 말고는 천마를 따르는 존재도 없고.”
즉,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라 이건가.
‘진짜 인간이 아닌 성좌… 일지도 모르겠네.’
아직 천마의 정체를 단정 짓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천마.]베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오진에게 향했다.
‘뭐야.’
왜 여기서 날 보는 건데?
오진은 베가의 눈빛에 서린 복잡한 감정을 읽으며 눈을 찌푸렸다.
‘천마’라는 말을 들은 순간 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본 걸까.
‘여기서 날 의심할 만한 건덕지는 없을 텐데.’
오히려 자신이 말한 대로 실제 천마가 등장했으니 ‘역시 회귀자의 말대로구나’라는 신뢰의 눈빛을 보내야 맞지 않는가.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그녀에게 말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었다.
처음 그녀에게 천마에 대해 말했을 때 3년 후에나 나타난다고 했는데 고작 1년 만에 등장해 버렸으니까.
‘이건 따로 얘기해 둬야겠군.’
오진은 남은 차를 한 번에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그럼 천마란 놈을 광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거랑 흑성회의 파벌을 하나로 모으려 한다는 것 외에는 뱀자리 여왕에 대해 아는 게 없으시다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그렇다네.”
기대했던 것 치고는 확실히 정보가 너무 없었다.
“흑성회의 파벌들이 모조리 뱀의 손에 넘어가 버리기 전에 손을 써야겠군요.”
“그렇지.”
흑성회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파벌마다 제각각 목적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
남은 다섯 개의 파벌이 모두 힘을 합치게 된다면 상대하기 곤란해질 것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흑성회를 전문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팀을 꾸리고 있다네.”
“팀이요?”
“팀이라고는 해도 아직 세 명밖에 없지만 말일세. 아, 그중에 자네가 알 만한 사람도 한 명 있구만.”
“누구죠?”
“흑사자 이우혁.”
“아.”
확실히 이우혁이라면 천상길이 만들고 있다는 ‘팀’에 가장 적절한 인재였다.
이제 곧 9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실력자일뿐더러 형을 납치해 죽인 흑성회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자네와는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흑성회에 대한 일로 몇 번 함께 싸운 적이 있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천상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바라봤다.
“자네도 이 늙은이가 만들고 있는 팀… ‘수호성’에 들어올 생각이 있는가?”
수호성.
오로지 흑성회를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팀.
칠성의 일원인 탐랑성이 직접 모은 팀인 만큼 여러모로 빵빵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긴 하지만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천상길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빈 찻잔을 모으며 말했다.
“그럼 다시 차를 내올 테니 천천히 생각하고 있게나.”
천상길이 문을 닫고 나갔다.
[나의 아이야….]나지막이 들려오는 베가의 목소리.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옆에 앉아 있는 하은을 힐끔 바라봤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하은 때문에 말하지 못한다는 듯한 몸짓.
“괜찮아. 누나한테도 말했거든.”
[그대가 회귀자라는 사실 말이냐?]“응.”
베가가 놀란 눈으로 하은을 바라봤다.
“어… 응. 나, 나도 들었어.”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하은.
오진은 그녀가 뭔가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아무래도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착각?]“3년 후에 천마가 탄생한다는 거.”
천마는 이미 흑성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천마는 3년 후에 탄생한 게 아니었어. 그 전부터 존재했었는데 정체를 숨기고 숨어 있었던 거야.”
[…그리된 거였구나.]베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복잡한 눈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갑작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저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니라.]뭐지?
‘어제부터 좀 이상한데?’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베가는 오진의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가 걱정스러워서 그랬느니라.]“걱정?”
[천마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타나지 않았더냐? 그대가 그의 표적이 될까 걱정스럽구나.]“…….”
단순히 ‘걱정’만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깊게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 지금 흑성회에 천마를 따르는 사람이 뱀자리 여왕 말고는 없다고 했잖아?”
즉. ‘천마’라 불리는 존재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뱀자리 여왕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흑성회를 통치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럼 그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전력을 깎아놔야겠구나.]“그렇지.”
“오지나 너 수호성인가 뭔가 들어가려고?”
“일단은.”
어차피 흑성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조력자를 구할 수 있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뭐, 어느 정도 조건은 달 생각이야.”
팀이라고 해서 무슨 군대 조직처럼 딱딱하게 상명하복의 관계로 이뤄진다면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위아래가 뚜렷할수록 행동의 제약이 심해질 테니까.
“그럼 나도 들어갈래.”
“누나도?”
“엉. 어차피 흑성회 자식들 박살 내는 건 똑같잖아?”
“뭐, 그렇긴 하지.”
대충 조건을 정리하며 시간을 죽이자 천상길이 새롭게 차를 타왔다.
“그래, 결정은 했나?”
“예. 저희도 수호성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허허허! 역시! 자네라면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리라 믿고 있었다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오진은 생각해둔 조건에 대해 설명했다.
팀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령을 따를 생각은 없다는 것.
어디까지나 정보 공유와 상호 협력이 목적이라는 것.
“알겠네. 자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겠네.”
“우혁 씨야 그렇다 치고, 다른 두 명은 누굽니까?”
“그건 나중에 팀원 소집이 모두 끝나면 알려주도록 하겠네.”
오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들을 정보도 다 들었으니 슬슬 몸을 일으키려 할 때.
“가기 전에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네.”
“예?”
“아, 정정하지. 정확히는 자네가 아니라….”
천상길의 시선이 하은에게 향했다.
“하은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네.”
“엥? 저요?”
하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기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천상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소리’가 들리더군.”
“무슨 소리….”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 말일세.”
천상길의 시선이 안대에 가려진 하은의 왼쪽 눈가로 향했다.
“아직 본인의 힘을 다루는 데 미숙하지 않나?”
“…….”
정곡을 찔린 하은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후후. 이 늙은이가 좀 주책이 많아서 말일세. 사카키도 그렇고 자네처럼 ‘소음’이 들리는 각성자들을 보면 나서서 뭘 가르쳐주고 싶다네.”
“소음… 이요?”
“지니고 있는 힘은 막대한데 제대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각성자들에게 들리곤 하는 소리지. 뭐, 이 늙은이가 지닌 몇 안 되는 재주 중 하나라네.”
그러고 보니 전에 사카키에게 들은 적 있었다.
천상길이 그만의 능력을 사용해서 다른 각성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하은 양을 이 늙은이의 손으로 직접 가르쳐보고 싶네.”
갑작스러운 제안.
오진과 베가의 시선이 하은을 향했다.
“지니고 있는 힘은 막대한데 제대로 사용을 못 한다….”
하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배우고 싶어요.”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눈이 강한 의지로 빛났다.
그녀의 눈빛에 서린 뜨거운 열정을 읽은 천상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과정이 쉽지는 않을 텐데 괜찮겠나?”
“상관없어요.”
하은이 굳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려 칠성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용의 심장’을 받아들이면서 9성에 올라서고 난 후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럼 좋은 가옥을 내주겠네.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지내게나.”
“아.”
당연한 말이지만.
가르침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끝날 리는 없었다.
천상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오진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그 사실이 하은을 망설이게 했다.
“저… 받는 김에 오진이도 같이는 안 되나요?”
“오진 군에게는 이 늙은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없네.”
천상길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시선이 오진에게로 향했다.
“그에게는… 그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으니까 말일세.”
마치 별 없는 밤처럼.
오진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각성자는 처음이군.’
아무리 뛰어난 각성자라고 해도 조금씩은 소음이 들려오기 마련인데.
장막이 드리워진 밀실에 갇힌 것처럼 오진에게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집에 가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다시 올게요.”
하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오진에게 몸을 돌렸다.
“괜찮겠어 누나?”
“어쩔 수 없지 뭐. 떨어져 지낸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구.”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오진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져 있던 하은이 이내 씩 웃으며 오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누나랑 같이 못 잔다고 울면 안 된다?”
“얼씨구.”
“절씨구.”
하은이 성큼 한 걸음 다가오며 오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나 강해져서 돌아갈 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짜샤!”
이제까지 오진에게 받기만 해오지 않았던가.
그에게 받아 온 걸 조금이라도 돌려주기 위해선 그만큼 강해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진이는 저 멀리 멀어질 테니까.’
오진의 터무니 없는 성장 속도를 생각한다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하은이 천상길의 가르침을 받기로 결정된 후.
“그럼 그… 뭐라 불러야 하죠? 천상길 님? 탐랑성 님?”
“허허. 이 늙은이 앞에서 굳이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 없다네. 편하게 대해주게나 편하게.”
“알았어 할부지!! 앞으로 잘 부탁해!!!”
“하, 할부지?”
하은이 천상길의 손을 붙잡고 격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누나.”
오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