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6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62화
백조자리의 성좌 (3)
“헤에.”
아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
데네브의 머리색과 같은 검푸른 눈동자가 오진을 향했다.
“어차피 네가 이길 테니까 졌을 때 내가 뭘 요구할지 알려줄 필요도 없다고?”
까득.
사납게 이를 갈며 오진을 노려보았다.
“역시 그 성좌의 그 사도 다운 말이네.”
예전부터 그랬다.
같은 ‘북극성’의 칭호를 지니고 있음에도, 언제나 그는 베가와 폴라리스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며 멸시와 조롱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폴라리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예언’을 하고 난 이후 기나긴 은거에 들어갔고, 베가는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이어받을 적합자를 찾지 못해 수년을 허비했다.
그동안 데네브는 백조자리의 성흔을 가장 훌륭하게 개화할 수 있는 인재를 찾아 12명의 사도를 만들었다.
물론, 다른 성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의 사도였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성장한 덕분에 그의 신격은 과거에 비해 높아지게 되었다.
‘이젠… 내가 진정한 북극성이야.’
데네브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베가를 노려보았다.
수백, 수천 년의 아득한 시간 동안.
다른 성좌들에게 폴라리스와 베가만이 진정한 북극성이라 조롱당했던 기억들.
지독한 열등감은 증오로 승화되어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두고 봐.”
데네브는 베가와 오진을 둘러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너희들 모두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사납게 윽박지르는 데네브.
하지만 어린 소년의 외모를 지니고 있는 탓에 사납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찍찍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햄스터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만해 데네브. 나까지 부끄러워지니까.”
“흐갹?!”
깊은 한숨을 내쉰 알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데네브의 뒷덜미를 잡아들어 올렸다.
훤칠한 키를 지닌 알렌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데네브.
그 모습이 마치 작아진 베가를 손 위에 올려두고 골려주고 있던 하은을 떠올리게 했다.
“놔! 놓으라고 알렌!!”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이익! 하, 하지만 저 자식 하는 말 못 들었어?! 생각도 안 해보고 내 소중한 아이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하잖아!”
“그래, 그래. 다 들었어.”
우는 아이를 달래주듯 알렌이 데네브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데네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 하지 마!”
오진을 가리키며 박박 소리치던 데네브가 울먹이듯 눈을 글썽였다.
“이러면 북극성으로서의 체면이….”
“걱정하지 마.”
기계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체면 같은 거 차리지 않아도, 데네브 넌 가장 위대한 성좌니까.”
“…알렌.”
데네브가 훌쩍 코를 삼키며 알렌을 올려다봤다.
오진은 그런 둘의 콩트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뭔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르네.’
단순히 외모만 어려 보이는 줄 알았는데, 데네브의 태도를 보니 정말 영락없는 애가 따로 없었다.
베가 쪽을 돌아보자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정말 그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뭐, 불만이야?”
데네브가 도끼눈을 뜨며 베가를 노려봤다.
베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파리를 쫓듯 손을 저었다.
[되었다. 얘기가 끝났다면 이제 가보거라.]“흥! 한 달 후에 망신당할 준비나 하라고!”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몸을 돌리는 데네브.
그런 데네브를 뒤로 하고 알렌이 차가운 시선을 오진에게 향했다.
“자신감이 상당하시더군요.”
“싸우지도 않았는데 졌다며 찡얼거리는 것보다 낫죠.”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만.”
피부가 얼어붙을 듯한 날카로운 살기.
“용기와 만용 정도는 구분하시길 바랍니다.”
“용기일지 만용일지는 결과를 보면 알 수 있겠죠.”
“데네브의 사도들을 가볍게 여기셨다가는… 후회하실 겁니다.”
나지막한 경고를 날리며 알렌은 데네브를 뒤따라 몸을 돌렸다.
그렇게 데네브와 알렌이 신전 밖으로 나가고 난 후.
[왜 그런 터무니 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게냐!]베가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녀는 오진의 팔을 꾸욱 붙잡으며 잡아당겼다.
[데네브의 사도들이 얼마나 강대한지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더냐!]“어차피 알렌이나 다른 칠성과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 해도!]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는 베가.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오진도 잘 알고 있었다.
‘승률을 따진다면 그리 높지 않겠지.’
다른 각성자도 아니고 같은 북극성의 사도들과의 대결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성(星)보다 한두 단계 높은 성을 지닌 각성자들을 쉽게 압도했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겠지.
그리고 심지어 한 명이 아닌 세 명이나 되는 사도를 꺾어야지만 승리할 수 있다.
베가가 이렇게 초조한 표정으로 호통을 치는 것도 당연하리라.
하지만.
‘베가나 데네브가 모르는 게 있지.’
자신에게 흑천이 있다는 것.
물론, 베가와 데네브가 관전할 게 뻔한 대결 중에 개천을 사용하는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그에겐 용맥의 마력이나 이제까지 흑천으로 흡수해왔던 막대한 마력이 있었다.
마력의 양이란 격투기로 비교하면 기초 체력.
단순히 체력이 많다고 해서 싸움에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유리한 고점을 자치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신격이 부족하다며? 그럼 싸워서 뜯어내야지.”
애초에 이 승부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베가의 잃어버린 신격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는 데네브의 신격이 필요했다.
[그, 그건 그대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니라!]“그럼 누가 걱정할 문젠데?”
[신격에 대한 건 본녀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느니라.]“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치고는 표정이 많이 어둡던데?”
[그건….]베가의 황금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뭔가 변명할 거리라도 찾고 있는 거겠지.
“베가. 전에 소멸까지 각오하고 날 지켜줬잖아?”
[…그대의 성좌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라.]“그렇다면 이것도 당연한 일이겠네.”
성좌가 자신의 사도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사도로서 자신의 성좌를 지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나의 아이야….]베가는 말끝을 흐리며 오진을 지그시 응시했다.
심장이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에게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언제부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게 됐을까.
그가 웃으면 따라 웃고, 그가 울면 따라 울게 됐을까.
언제부터.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됐을까.
[…….]처음에는 그저 놀라웠다.
수년 동안 찾지 못했던 적합자를 찾았다는 것과 그가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역천의 별’이라는 사실에.
그 다음에는 기특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그의 모습이.
치열하게 발버둥 치며 운명을 뒤바꾸려는 그의 모습이.
마치 배 아파 나은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들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후우.]스피카에게 들었던 ‘운명의 사람’이라는 말.
그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오진을 바라보는 베가.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뭘 준비할 생각이기에 한 달의 유예를 달라 한 게냐?]데네브의 사도들과의 결투까지 남은 기한은 한 달.
오진이 한 달의 유예를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하나였다.
“뭐, 그 동안 간단하게 수련이라도 하고 가려고.”
흑천이 여섯 번째 개화를 하며 늘어난 용맥의 마력과 짙어진 거문고자리의 성흔의 힘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이건 완전히 익숙해진 다음에 싸워야지.’
그리고 하나 더.
-파지지직!
오진의 손바닥에 위에 튀어 오른 푸른 스파크가 용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마치 3D 프린터기로 뽑은 것처럼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용의 모습.
정신을 집중하자 용의 모습이 서서히 하은의 얼굴로 바뀌었다.
‘이게 진짜 되네.’
아담의 사과를 만들어내며 터득했던 미세한 마력의 조절.
그걸 사용하니 예전에 베가가 했던 것처럼 뇌전을 이런저런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이것도 활용할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 정도로 섬세한 마력 조절을 할 수 있다면 전투에서도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건 또 언제 익힌 것이냐?]베가가 오진의 손바닥 위에서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고 있는 뇌전을 바라보며 토끼 눈을 했다.
오진은 대답 대신 뇌전을 베가의 형태로 바꾸며 씩 웃었다.
[정말… 그대를 볼 때마다 놀라움밖에 없구나.]마력을 섬세하게 다루는 능력만 놓고 보면 벌써 리아크를 넘어선 것 같았다.
“이거 잘 다루면 이런 것도 가능하더라고.”
오진은 베가의 형태를 한 뇌전을 움직여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점프하도록 만들었다.
[아앗. 무, 무얼 하는 게냐!]제자리 점프를 하다가 갑자기 윈드밀을 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하는 베가.
[본녀를 가지고 놀지 말거라!!]베가가 얼굴을 붉히며 오진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오진은 손바닥 위에 만든 베가의 형상을 지워내며 낄낄 웃었다.
“미안, 미안. 그렇게 화내지 마.”
[…그대는 성좌에 대한 경외심을 좀 기를 필요가 있겠구나.]팔짱을 낀 채 흥,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획 돌리는 베가.
오진은 그런 그녀를 달래주며 리아크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한 달간 빡시게 수련할 생각이니까 좀 도와주쇼.”
“머리가 좀 커졌다고 해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애송이.”
코웃음을 치는 리아크.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며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드득!
순식간에 늑대인간 폼으로 변신한 리아크가 가볍게 주먹을 풀며 오진을 향해 까딱까딱 검지를 흔들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지. 대신….”
리아크는 베가를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몸이 이렇게 도와주는데 데네브 그 자식의 사도한테 지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이긴다니깐.”
파지지지직!
푸른 뇌전이 오진의 몸을 휘감았다.
* * *
그렇게 직녀성의 신전에서 요란한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 지 한 달.
“후우.”
신전 근처에 있는 연못에서 몸을 닦은 오진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나왔다.
“오늘인가.”
정신없이 수련하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어.’
육성개화를 하며 한 번에 확 강해진 힘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흑천의 힘은 물론,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다루는 경지 또한 올라갔다.
‘좋아.’
오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못 근처에 개어둔 옷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나의 아이야! 슬슬 출발해야 하느니라!]베가가 은빛 드레스를 사락사락 흔들며 신전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알몸의 오진.
[허, 허업!!]베가는 다급히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미, 미안하구나!!]“…….”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라!]“…어.”
[절대 아니니라!]그런 것 치고는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가 다 보이는데요 여신님.
[자, 장군감이로구나.]뭐가요.